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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22 08:22 수정 2019.04.23 09:42

베를린에서 열린 이옥선 할머니의 위안부문제 강연 ⓒ Tsukasa Yajima


내가 그를 처음 본 때는 2013년 베를린 공대 대강의실에서였다. 나는 그 강의실에서 몇 안 되는 아시아인이자 한국인이었다. 곧이어 대강의실 문이 열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와 그가 강단 위에 올랐다.

이옥선 할머니의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수많은 청중들은 처음 듣는 외국어의 뜻을 헤아리려는 듯 꽤나 집중한 모습이었다. 이내 그가 유창한 독일어로 할머니의 말을 통역했다. 청중들은 할머니의 입으로 전해져 오는 한국어보다 그가 번역한 독일어를 듣고 나서야 웃고, 슬퍼하고, 감탄했다. 다른 세계에만 존재했던 아픈 역사가 또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한국 이름은 한정화, 독일 이름은 나탈리 한. 1962년 서울 출생. 현재 독일에서 통역, 번역, 시민운동, 강의, 한반도문제 연구 등 수없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독일사회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활동을 오랫동안 해왔다. 

베를린에서 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독일에서 위안부 문제, 한국 노동자 문제, 분단 문제, 인권 문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의 굵직한 활동에는 늘 한정화씨와 그가 속해 있는 '코리아페어반트(www.koreaverband.de)'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 16살 소녀 한정화는 파독간호사였던 어머니와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했다. 슈투트가르트공항에 도착한 그가 가진 건 20kg 남짓한 여행 가방이 전부였다. 그 가방에는 몇 벌의 옷가지, 아끼던 일기장, 친구들이 보내준 이별 편지와 납땜한 용기에 담긴 된장·고추장이 다였다. 그때의 소녀는 이제 자신의 삶이 전혀 다른 곳에서 펼쳐진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삶을 위해 여행가방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와 나, 우리의 대화는 이 여행 가방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다.

반공소녀가 페미니스트로
 

이옥선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역하고 있는 한정화씨. ⓒ Tsukasa Yajima


- 1978년 독일로 떠나기 전 한국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 살았었다. 어렸을 때 충정로2가쯤에 있는 육교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전차들이 있었다. 그때는 미군에서 쓰던 지프차에 색을 칠해서 택시로 사용했었다. 반공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나고, 반공 웅변대회에서 상도 탔었다. (웃음)'

중학교 때 한 학급에 80명 정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서울 태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80명 중에 나를 포함해 딱 2명만이 서울에서 태어난 학생이었다. 전쟁 때문에 이민과 이주가 그만큼 많았던 때였다. 살던 지역에서 뿌리 뽑힌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연희중학교에 다녔을 때 어느 날 국어선생님이 잡혀갔던 기억도 난다. 국어선생님이 '북한에도 좋은 책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 것을 학생이 부모님께 얘기하는 바람에 공안경찰에게 잡혀간 것이다.

점심시간에는 선생님이 나에게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시켰다. 당시 정부가 잡곡밥을 먹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의 도시락이 흰 쌀밥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잡곡밥과 흰 쌀밥의 비율(%)을 적어야 했다. 돈이 없어서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시대였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당시 <코리아 타임즈>의 논설위원이셨던 아버지는 검열을 못 견뎌 빨간 글씨로 퇴직서를 내던지고 나오셨다. 그 후 집에서 영어로 기사를 쓰시거나, 번역을 하셨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가 늘 귓가에 들렸다. 아버지는 영어를 하려면 자기 키만큼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생활이 어려워 어머니는 파독 간호사에 지원을 하셨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집에 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아버지는 내가 하자는 대로 놀아주고 항상 궁금한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 정말 즐거웠다. 어머니는 어머니 집안에서 대학을 가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침 어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에서 가족들이 피난을 가면서 전주 간호사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한국에 있을 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흑백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독일에 어머니와 살게 된 후의 기억은 모두 컬러사진처럼 기억된다."

"한국 사회 소식, 울면서 번역했다"

- 지금처럼 정보가 많지 않던 시절에 여행 가방 하나 들고 독일에 왔다. 겨우 16살이었는데 이후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독일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 또는 프랑스어 등 3개 국어가 필요했다. 1978년 처음 도착했을 땐 독일어와 라틴어를 동시에 배워야 했다. 그렇게 1984년부터 대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교육과정에서는 한때 왕따를 경험하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자 아시아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16살에 독일에 왔기 때문에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독일에 온 후로 사람들은 나에게 늘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어디서 왔니?' 그때마다 나는 참 열심히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었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는 내게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웃음) 내가 대학 생활 중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주변사람들은 학업 때문에 임신중지를 해야 한다고 권했지만 괜한 오기가 생겼고 첫째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를 데리고 강의실이든 행사장이든 어디든 갔었다. 그러면서 대학에 탁아시설을 만드는 운동도 했었다. 독일 사회도 내 아이를 사회에서 단절시키지 않고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80년도 초반 어느 날, 내가 아직 카톨릭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였다. 한국에 있는 중학교 동창이 대학을 그만두고 구로공단의 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5.18 관련 카세트 테이프를 들려줬다는 죄로 수감돼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못 하고 독일에서 잘 지내는 내가 죄인처럼 느껴졌다."
   
- 낯선 언어와 문화, 사회에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치열하게 살아야 했을 텐데, 한국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1978년까지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다가 1987년에 서베를린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분단체제였기 때문에 분단된 도시였던 서베를린만의 특수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시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자연스럽게 베를린대학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데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베를린의 한인단체인 '민협(민족민주운동협의회)'에서 의뢰한 번역을 돕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간첩이 되었나'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남영동 고문사건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민낯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 기사를 독일어로 번역을 했는데, 정말 울면서 번역했다. 

그렇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기사 속 기지촌 여성들의 사진을 보고 한국에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6살에 독일에 온 후 단 한 번도 한국에 가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1991년도에 장학금을 받아서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고, 동두천 기지촌여성들을 리서치하게 되었다."

"당신은 울지 않아도 된다"
 

1991년 두레방에 대한 한겨레 기사 ⓒ 한겨레

 
- 처음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을 만났을 때 어땠나?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여성단체인 '두레방'을 통해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기지촌 여성들이 나를 너무 반갑게 받아줬다. 당시 내 나이가 29살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여성들 대다수가 나보다 어렸지만 10년째 그 바닥에서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기지촌의 여성들은 술을 마실 때면 엄청 울었다. 돈을 벌어서 집에 보내기 위해 일을 하는 여성도 있었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성매매로 돈을 벌어 여동생을 뒷바라지 했지만 교사가 된 여동생이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며 슬퍼하는 여성도 있었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여성들인데 말이다. 나는 '당신은 울지 않아도 된다'라고 거듭 말해줬다. 그들은 그저 어렸을 때부터 자립과 독립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이었다.

당시 '두레방'에서 활동하던 문혜림, 유복림 선생님은 기지촌 여성들이 외부인을 보고 열린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이야기해주셨다. 한국의 동두천 기지촌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나는 독일 성매매 여성들을 만났었다. 독일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의 일이 '직업'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한국과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순간 여성들은 법의 사각지대로 들어가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많은 여성단체들이 성매매 합법화 운동을 했었다.

직업이 있고 노동이 있는 자리엔 그에 따른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 이런 사고가 당연한 곳이 독일이다. 독일에서는 노동법을 준수하기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 또한 노동이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연금을 비롯한 사회적 안전망이 제공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들 또한 보통의 여성으로 보고 성매매를 하는 것에 대한 평가보다는 구조적인 문제 자체를 해결해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고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성매매 주제는 다각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이 문제에 있어서 성구매자인 남성들, 그리고 불합리한 유통구조들에 대한 고발은 저조하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해 언제부터 깊이 생각하게 되었나?
"어느 날 독일 TV에 성매매 여성이 나와 당당하게 자신에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그걸 본 후 내가 갖고 있던, 한국에서 습득한 성에 대한 어떤 인식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1979년쯤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을 때였다. TV 속 성매매 여성은 '우리도 평범함 여성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독일에서 '매춘여성이 당한 강간은 강간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결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여성에 대한 불공평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 독일에서 시위중인 한정화씨. ⓒ 한정화 제공

 
(다음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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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독일해외통신원. 한국에서 공공미술가로 활동하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고 있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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