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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7.16 15:06 수정 2019.07.16 20:45

시가지가 죽음의 거리로 변한 중국 상해(1932년 1월 30일 동아일보) ⓒ 동아일보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는 중국 본토까지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를 고의로 폭파한다. 그리고는 적반하장으로 침략자 중국을 응징하겠다고 나선다. 이처럼 거짓 술책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 일제는 이듬해 1월 상해(上海)를 무차별 공격한다.
 
동양 제일의 국제도시 상해는 1932년 정초부터 전란에 휩싸인다.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난 것. 황푸강은 군함으로 성(城)을 이뤘다. 거리는 탱크들이 누볐으며, 시가지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일제의 광기는 3월 1일 '만주괴뢰국(만주국)'을 세운 후 더해갔다. 중국은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호소했고, 국제연맹은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거부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상해에 영사관을 둔 나라 대표들 중심으로 정전 협의를 추진한다. 이후 협의가 원만하게 진행돼 4월 30일 조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전날(29일)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이 사망하여 난항을 거듭하다가 5월 5일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 또한 국내외 시선을 만주국 건설 공작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일제의 책략이었다.
 
상하이에서 만난 중국인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KOREA 만세!"
 
지난 6월(1일~8일까지),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첫날(6월 1일)은 대한민국 100년 역사가 시작된 상하이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두 번째 청사가 있던 회해중로(옛 하비로), 신규식 선생 거주지, 김구 선생과 윤 의사가 회중시계를 교환했던 원창리 13호, 김구 선생 가족 거주지,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 임정 요인들 신년하례회가 열렸던 영안백화점, 의열단 의거지(와이탄) 등을 돌아봤다.
 
둘째 날 일정도 상하이에서 시작했다. 오전 7시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8시 호텔을 출발,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루쉰공원(옛 홍구공원) 내에 위치한 윤 의사 의거지, 매헌(梅軒) 기념관, 공원 인근의 송경령능원(만국공묘) 등을 돌아봤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홍커우공원(옛 홍구공원), 지금은 루쉰공원(魯迅公園)으로 되어있습니다.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루쉰(魯迅)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죠. 1956년인가 이곳으로 이장한 루쉰의 묘와 기념관이 있고요. 중국 문화와 역사, 상하이 시민 생활상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윤봉길 의사 의거지와 매헌기념관이 있어 친숙한데요. 거기를 돌아보고 만국공동묘지(송경령능원)로 가겠습니다." (중국 현지 가이드)
 
"윤봉길 의사는 홍커우공원 거사를 3일 앞둔 4월 26일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어제 우리가 갔던 원창리 13호에서 김구 선생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회중시계를 교환하죠. 그때 윤 의사는 시계를 건네며 '선생님, 제게는 한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한 시간은 원창리 13호에서 홍커우공원까지 이동 시간을 말하죠. 자세한 설명은 도착해서 하겠습니다." (김종훈 기자)

 

루쉰공원에서 중국 전통무술 연습하는 중국인들 ⓒ 조종안

   

중국인이 쓴 윤봉길 의사 추모 글 ⓒ 조종안

 
호텔에서 루쉰공원까지 소요 시간은 약 40분. 오전이라서 입구가 한산하다. 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이 객을 반긴다. 플라타너스 우거진 도로는 산책 나온 주민과 관광객으로 번잡하다. 전통 중국무술과 마술공연장, 배드민턴 코트 등은 만원사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휴일을 다양하게 즐기는 그들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붓으로 길바닥에 글을 쓰는 일명 '거리의 서예가'도 보인다. 중국의 대도시 공원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가슴 뿌듯하게 하는 글귀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한 남자가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KOREA 만세!'라고 써 내려간 것. 붓을 놓으며 만족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에서 상하이에도 윤 의사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윤봉길 의거현장' 표지석, 실제 위치와 달라
 

잘 가꿔진 루쉰 묘 ⓒ 조종안

   
일행은 루쉰 묘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 <광인일기> 등의 저자인 루쉰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문인으로 알려진다. 대문호 묘지답게 주변 녹지가 잘 정리되어 있다. 빽빽한 숲에서 풍기는 자연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루쉰 동상 뒤편에는 '노신 선생 지묘(鲁讯先生之墓)'가 황금색으로 음각된 묘비가 있다. 묘비문은 마오쩌둥 친필이란다.
 
루쉰 묘에서 매헌기념관으로 이동한다. 기념관 입구에서 표지석 한 쌍을 발견했다. 작은 돌에는 '윤봉길 의거현장'이라 새겨있고, 큰 돌에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에서 태어나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네자와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친 윤 의사 생애가 음각되어 있다.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으로 추정되는 자리여서 비석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윤의사 의거 현장’ 새겨진 비석 앞에서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김현석


김종훈 기자는 윤 의사 의거 현장을 알리는 안내문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엄밀히 따지면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이 여기는 아니고요. 우리가 아까 봤던 루쉰 동상 앞 광장이 당시 의거 현장입니다. 그러면 '윤 의사 의거 현장'이 새겨진 비석을 왜 여기에 세웠느냐. 윤 의사 의거 때 그러니까 천장절 행사장에서 사망한 시라카와 사령관 추모탑이 있었던 겁니다. 이곳 일본인들이 시라카와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탑을 세웠던 것이죠. 그 후 일본이 패망하자 상하이 시민들이 그 탑을 없애고 윤 의사 기념공간을 마련한 거죠.

정확히 얘기하면 그날 11시 45분경 윤 의사가 군중을 뚫고 18m쯤 전진, 물통형 폭탄을 던져 '빵!' 터뜨린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시락 폭탄을 준비했는데 그사이 몰려온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기절할 정도로 폭력을 당합니다. 그래서 윤 의사 얼굴이 맞다, 안 맞다 논란이 상당히 깊었어요. 후손들은 맞다고 하고 학자들은 다른 사람이라 하고, 어쨌든 윤 의사가 폭력을 엄청나게 당해 두 번째 폭탄을 던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죠."
 

김 기자는 "의거 당일 군경 포함 1만여 명의 일본인이 행사장에 운집했는데 비석이 있는 매헌기념관 입구는 그 많은 인파를 수용할 수 없는 공간이고, 또 하나는 윤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현장은 일본군 사열식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는데 이곳은 길 따라 주변에 작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어 윤 의사 의거지라고 하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라고 덧붙인다.
 
의거 이후 임시정부 상해 떠나
 

윤봉길 의사 의거를 알리는 동아일보 호외(1932년 4월 29일) ⓒ 동아일보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행사는 일제가 상해사변 승리를 자축하는 승전기념식이었다. 그날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은 단상의 시라카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과 노무라 해군 사령관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시라카와는 당일, 가와바타 상하이 거류민단장은 다음 날 사망하였고, 노무라, 우에다 등 일본 군부와 정계 핵심 인물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동아일보는 29일, 30일 연거푸 호외를 발행한다. <폭탄(爆彈) 현행범인(現行犯人) 조선인(朝鮮人)으로 판명(判明)> 제하의 29일 호외는 '폭탄 현행 범인은 조선인 윤봉길(25세)로 판명됐고, 연루자를 조사 중'이라며 '상해 정전(停戰) 회의는 30일 본의를 열고 정식 조인할 터였으나 폭탄 사건으로 개최 불능의 형세이며 외무, 군부와 협의 중'이라고 전한다.
 
윤 의사 의거는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한 거룩한 투쟁으로 대한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국제적 사건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와 정치적인 주장을 고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일제는 가만있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926년부터 사용하던 정든 마당로 청사를 뒤로하고 항주(항저우)로 옮겨가게 된다.
 
탐방단, 김구 선생 피난처 자싱으로 이동
 

윤봉길 의사 흉상 앞에서 헌화하는 탐방단 ⓒ 김현석

 
과거 루쉰공원에는 윤 의사 의거 기념 표지석 하나 없었으나 한중수교(1992) 후 두 나라 정부가 유적지 복원을 추진, 1994년 '매정(梅亭)'이란 정자가 세워진다. 1998년 윤 의사 의거 기념비를 세우고, 2003년 생애사적 전시관 개관과 함께 흉상 제막식도 가졌다. 2009년 현판 글씨 '매정'을 윤 의사 호를 따라 '매헌(梅軒)'으로 개칭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헌기념관 주위에는 고결한 정신과 충절의 상징인 매화나무 몇 그루가 심어 있다. 마당 한쪽은 윤 의사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과 사진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 1층은 추모공간으로 꾸며졌고, 2층에서는 윤 의사 생애가 담긴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일행은 윤 의사 흉상 앞에서 헌화하고 묵념을 올린 뒤 돌아섰다.
 
임정로드 탐방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다섯 분(신규식, 박은식, 안태국, 김인전, 노백린 등)이 잠들어있던 만국공묘를 돌아보고 김구 선생 피난처가 있는 자싱(嘉興)으로 이동했다. 일행은 달리는 버스에서 각자 느낀 점을 주고 받으며 고난의 임시정부 역사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김종훈 기자의 한마디가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당시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가 '중국 대군도 못 한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냈다'고 했듯 윤봉길 의사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우리 독립운동 방향을 바꿔놓은 거사였습니다. 만약 윤봉길이 없었으면 임시정부 활동도 그것으로 끝났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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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