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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0.29 18:02 수정 2019.11.12 14:08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박정훈

 
24일 저녁 배달 라이더 한 명이 숨졌다. 오토바이는 무등록차량으로 운행이 불가능했지만, 일손이 부족했던 배달대행업체는 그냥 일을 시켰다. 계약서도 한 장 쓰지 않았다. 근로자라면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 노동자이자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쓸 필요가 없었다.

한발 양보해서 개인사업자라 하더라도 용역계약서를 써야 하지만 어떤 문서도 없었다. 배달업체 사장이 가입 의무가 있는 산재도 가입하지 않았다. 산재보상은 사업주가 가입하지 않아도 보상이 되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 사장이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다. KBS에 보도된 대행업체관계자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여기는 프리랜서예요. 자기가 한만큼 벌어가는 프리랜서예요." 이보다 이틀 앞선 22일 저녁에는 경기도 양평의 라이더가 사망했다.

'인재'의 진짜 뜻 - '모든 책임은 일하는 사람에게 있다'
 
이런 와중에 25일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에서 정부 권고안을 발표했다. 4차 산업혁명위원회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보면, 앞으로는 경쟁의 핵심 요소가 '토지', '노동', '자본'에서 '데이터', '인재', '스마트자본'으로 변화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눈에 띄는 것은 노동을 인재라고 규정한 내용이다. 민간 전문가 100명으로 구성된 4차산업위원회에서 규정 내린 인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인재'는 전통적 노동자와 다르게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시간이 아닌 성과로 평가받으며 도전을 통해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하는 글로벌 경쟁력의 핵심."
 
앞으로 라이더를 보면 노동자말고 4차 산업혁명의 '인재'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생산수단인 오토바이를 라이더가 소유하고, 시간급이 아니라 건당 3천 원 정도의 성과로 평가받는 사람이지 않은가. 4차 산업혁명위원회와 동네배달대행업체 사장의 논리는 비슷해 보인다. 단어는 창조적이지만 내용은 오래되고 낡았다. 모든 책임을 일하는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심지어 일하는데 필요한 생산수단까지 알아서 구해야 한다.

노동자가 아니므로 일하면서 생기는 각종 사건사고에 대한 책임도 홀로 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문제는 '인재'라는 예쁜 이름표를 단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심지어 이 보고서는 엉뚱하게도 주 52시간의 일률적 적용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불확실성이 높은 4차 산업혁명 시대 혁신의 주체인 '인재'를 육성하고, 그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주 52시간제 등 노동제도개선, 대학 자율화, 산업별 맞춤형 지원 등 정부의 충실한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논란은 있지만 새로운 혁신을 이끄는 세계적인 기업인 구글, 애플, 페이스북은 한국처럼 장시간 노동을 권장하지 않으며, 사내복지가 좋기로 유명하다. 유명한 CEO들은 명상과 요가를 즐기며 창조적인 노동을 위한 쉼의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심지어 주 40시간도 아닌 주 52시간을 혁신을 방해하는 노동제도라고 규정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 '혁신'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였지만, 정부는 규제하지 말고, 교육은 시장에 맡기고, '노동규제는 하지말자'라는 오래되고 시대착오적인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권고안이 국무회의에 올라간 건 10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52시간 시행에 대한 보완을 지시한 경제장관회의가 열린 날짜는 10월 17일이다. 청와대가 '혁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인가?
  

지난 3월 18일 서울 광화문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에서 장병규 위원장이 '제5차 규제, 제도혁신 해커톤'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차두원 개인형 이동수단 의제리더 ⓒ 연합뉴스

 
이 보고서의 압권은 4차 산업혁명위원회 장병규 위원장이 인상 깊게 읽은 아래의 기사를 권고안 첫 문장으로 배치한 것이다.

"중국은 지난 200여 년의 세계 산업화, 현대화의 역사 속에서 3차례의 산업혁명 기회를 놓쳤다. 3차례에 걸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중국은 변경국, 낙오국, 낙후국이었고 이로 인해 1820년 세계 GDP의 3분의 1을 차지했던 중국 경제가 1950년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4차 산업혁명 태동기의 중국'(북경일보, '13.2.24, 후안강 칭화대 국정연구원장)
 
전형적인 발전국가 논리이자, 지금 혁신에 실패하면 오욕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는 '플랫폼 민족주의'와도 연결된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국내 스타트업기업들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글로벌 시대의 플랫폼 기업들과 혁신기업들은 국제적인 금융자본의 투자 위에서 성장한다. 쿠팡은 일본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의 투자를 받았고, 이 비전펀드엔 중동 오일머니 자금이 65%다.

'배달의 민족'의 최대주주는 중국 상하이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 힐하우스 BDMG 홀딩스(Hillhouse BDMJ Holdings Limited)다. 자본에는 민족도 국가도 없다. 이 보고서에서는. '인공지능에 따른 업무 대체에 앞서, 해외 기업의 경쟁력 배가에 따른 우리 기업의 도태, 도산, 그리고 일자리 상실을 염려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라고 지적하며, 국제적인 금융자본이 투자하고 이윤을 가져가는 현실을 호도한다. 우리 국민들이 일하고 있는 '요기요'는 독일계 회사인데, 독일계 회사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사라지나?

반대로 우리 국민들은 민족자본이라고 불리는 재벌들의 노동착취와 해고를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약탈적인 금융자본의 투자를 받은 새로운 형태의 산업이 우리 국민들을 착취하지 않는지 감시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인데도, 이 보고서는 혁신을 위한 조력자의 역할만 하라고 강조한다.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터무니 없는 보고서가 발표되고 청와대가 흔들리는 동안, '혁신의 모델'이라고 부르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정반대의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 담당 집행위원은 24일 "고용주들이 자신의 노동자들을 자영업자로 분류하더라도 그 분류가 단지 그들이 노동자인 것을 숨기기 위한 '꼼수'라면 그 노동자들과의 단체협약이 담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보도 인용)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인정하는 한편, 4차 산업혁명위원회가 새로운 혁신의 동력이라고 말한 '인재'라는 개념이 꼼수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미국 캘리포니아플랫폼노동자들을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AB5법안이 통과됐다. 청산되어야 할 구태가 누구인지, 진짜 혁신되어야 할 사람들인지, 4차 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을 포함한 소위 전문가들이 되돌아봐야 할 때다. 평범한 사람들의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는 사람들의 무지는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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