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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05 14:32 수정 2019.11.06 07:57
술맛을 구분하는 전통주 대회가 있다. 그 대회에서는 소주 열다섯 종류를 제시하고, 그 중의 하나를 유리잔에 따라주고 그 이름을 맞추는 문제가 출제된다. 그 문제를 맞추기 위해서 열다섯 종류 소주의 특성을 익히는 연습을 했다.
 

똑같은 병에 술을 담고 난수표 번호를 붙여 술맛을 구분해보다. ⓒ 막걸리학교

 
술을 구분할 때, 색, 향, 맛의 차이를 본다. 먼저 눈으로 색을 본다. 열다섯 종류 중에서 색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세 종류였다. 아무리 색깔이 짙은 원주(증류하기 전의 술)라 하더라도, 증류하면 모두 투명한 물빛으로 변한다. 색깔이 있는 증류주라면, 증류한 뒤에 약재나 목재나 과일 따위의 부재료가 들어가서 색이 우러난 경우다.

감홍로, 문경바람, 죽력고가 갈색을 띠었다. 그중에 가장 짙은 갈색은 용안육, 계피, 귤껍질, 정향, 생강, 감초, 지초가 들어간 감홍로였다. 지초가 들어가서 붉은 빛을 띠는 진도홍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감홍로는 홍로(紅露)답게 옅은 붉은 색이 돌았다. 문경바람은 오크통에 숙성해서 오크 색이 돌고, 죽력고는 훈증하여 추출한 대나무 기름이 들어가서 옅은 참기름색이 돌았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유리잔에 담긴 술잔을 바닥에 놓고 둥글게 흔들어도 본다. 단맛이 강할수록 알코올 도수가 높을수록 잔을 타고 내리는 액체의 속도가 느려진다. 당도가 높으면 끈적거리는 점성 때문에 잔 안쪽에 술이 더 오래 머물다가 흘러내린다. 또 알코올은 물보다 가벼워서 도수가 높을수록 흘러내리는 속도가 더디다.

술잔을 흔들어보는 것만으로 열다섯 종류 중에서 두 종류의 술이 달라보였다. 천안 거봉포도로 만든 두레앙 증류주는 당도도 높고, 그 기질도 달라서인지 술잔 벽에 묻은 술이 가장 더디게 흘러내렸다. 그 더딤이라야 찰나에 지나지 않지만, 비처럼 흘러내리지 않고 땀방울처럼 맺히며 흘러내렸다. 도수가 25도로 가장 낮은 이강주는 술잔을 흔들고 나면 술이 잔 벽에 흘러내리는 속도가 가장 빨랐고, 옷이 흘러 내리듯이 함께 흘러내렸다.

이제 두 번째로 향으로 술을 구분해야 한다. 향에 민감한 사람들은 향기만으로도 대부분의 소주를 구분할 수 있다. 향기는 재료에서 오는 향기와 발효중에 생겨나는 향기가 있다.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6%로 낮고 물 함량이 높아 향기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아 휘발성이 강해서 향기로 잘 구분할 수 있다.

감홍로에서는 계피향이 짙고 오래 가고, 문경바람에서는 오크향이 두툼하게 올라오고, 죽력고에서는 민트향에 목재향이 따라와서 쉽게 구분되었다. 이 세 종류는 색깔도 눈에 띄고 향도 특성 있어서 구분하기가 수월하다.

고구마소주, 보리소주, 수수로 빚은 고량주는 주재료에서 올라온 향이 강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쌀소주는 향이 여려서 특징을 잡아내기 어렵다. 한국 증류식 소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재료는 쌀이다. 그래서 한국 쌀소주에서 쌀 향기를 맡기란 쉽지 않다. 그보다는 누룩 향기를 찾아내는 것이 더 빠르다.

민속주 안동소주에는 지푸라기나 치즈에서 나는 밀누룩 향이 분명하게 담겨 있다. 그 향기를 누군가는 "비오는 날 볏단 밑에 숨어있다가, 볏단에서 흘러내는 빗물이 내 입술에 닿았을 때의 맛과 향"이라고 표현했다. 쌀누룩을 사용하는 화요와 명인 안동소주에서는 향기로운 아세톤향이 풍겼다.

둘 다 구연산 생성 능력이 좋은 쌀누룩을 사용하는 걸 보면, 그 누룩에서 생겨난 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화요에서는 중독성이 강한 아세톤 향과 함께 파인애플 향도 따라오는데, 명인 안동소주에서는 아세톤 향이 돌다가 독한 알코올 향이 밀려든다.

소주를 내리는 방법에 따라 향기의 특징이 달라질 수 있다. 증류 방식은 상압증류와 감압증류로 나뉜다. 에틸알코올이 78.4도에서 끓는 일반적인 상태에서 증류하는 게 상압증류이고, 증류기 안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 에틸알코올의 끓은 점을 40~50도로 낮추어 증류하는 것이 감압 증류다.

상압 증류는 옹기로 만든 소주고리나 동증류기를 쓰고, 감압증류는 압력을 견딜만한 강도를 지닌 스테인리스 증류기를 쓴다. 상압 증류한 술은 향과 맛이 사납고 탄내가 날 수 있고, 감압 증류한 술은 향과 맛이 순한 편이고 탄내가 적게 난다.

열다섯 종류 중에서 상압 증류한 술은 여섯 종류로 미르, 감홍로, 두레앙, 죽력고, 민속주 안동소주, 문경바람이다. 상압 증류하는 이유도 조금씩 다른데, 과일 증류주는 그 향을 살리기 위해서, 죽력고와 민속주 안동소주는 전통을 살리기 위해서, 미르와 감홍로는 향과 맛의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다. 미르에서 그을린 토스트 향이 돌았는데, 이는 대표적인 상압 증류의 흔적이었다.
 

시음하게 된 15종류의 소주들. ⓒ 막걸리학교

 
향기는 세 번에 걸쳐 맡을 수 있다. 한번은 잔에 코를 대고 술 표면에서 휘발되는 향을 맡고, 두 번째는 잔을 흔들어서 술 속에 잠긴 향을 맡는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들숨으로 향을 맡는다면, 세 번째는 술을 입안에 넣고 코로 날숨을 내쉬어 맡는다.

담솔은 솔잎이 들어간 솔송주를 증류한 술이어서, 진토닉의 향이나 비릿한 송진 향이 돌았다. 송진 향은 들숨 향보다는 날숨 향에서 더 잘 느껴졌다. 계룡백일주에서는 도라지 같은 뿌리 약재의 향이 돌았다. 멥쌀과 찹쌀을 주재료로 삼고 솔잎, 진달래꽃, 국화, 오미자가 들어간 발효주를 증류한 술인데, 꽃이나 열매보다는 줄기나 뿌리가 들어간 묵직한 향기가 돌았다. 배와 생강이 들어간 이강주에서 배향이 강하게 돌았고, 문배주에서도 배향이 돈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감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원도 속초에서 만드는 설이소주와 경기도 안성에서 만든 한주에서는 희석식 소주에서 나는 알코올 향이 강하게 뭉쳐 있었다. 설이소주는 도수가 40도로 높아 알코올 향을 오래 맡고 있기 어렵다면, 한주는 35도로 조금 낮아 알코올 기운이 순했다. 한주를 포함하여 40도가 넘는 소주는 알코올의 독한 기운 때문에 그 향을 오래 맡고 있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고소리술을 놓고 그 향기를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오래 망설였다. 전통 고소리술은 조가 주재료인데, 제주샘 고소리술은 조 10%, 멥쌀이 90%가 들어가 있어서, 쌀소주보다는 약간 사나운 기운이 느껴지는 정도였다.

향에 집중하여 소주를 구분하니, 열다섯 종류 중에서 열네 개에 연상되는 단어를 붙일 수 있었는데, 마지막 하나 제주 고소리술에는 연상되는 단어를 부여하지 못했다. 향이든 맛이든 연상되는 명사형 단어가 없으면 기억할 수 없다. 못 없는 벽에 옷을 걸 수 없듯이, 연상 단어 없는 기억은 뇌리에 남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입안에 술을 10㎖ 정도 넣고 혀를 굴려 술을 입안에 온통 묻힌 뒤에 맛을 본다. 맛은 색이나 향보다 훨씬 불안하고 불규칙한 존재다. 맛은 기분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또 앞서 무엇을 맛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앞서 단맛을 보고 나면 단맛에 무뎌지고, 신맛을 보고 나면 신맛에 무뎌진다. 술맛을 구분할 때, 색과 향으로 먼저 구분하고 마지막에 맛으로 구분해야 판단을 정확히 할 수 있다.

향이 비슷하면 맛에서 그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명인 안동소주에는 알코올의 강한 기운에 감춰진 신맛이 존재한다. 문배주는 술맛이 뭉쳐져 목을 타고 넘어간다면, 고소리술은 술맛이 입안에서 고슴도치치럼 퍼지면서 넘어간다. 맛은 어떤 물질에 비유하는 것보다, 그 맛의 높낮이나 여운으로 가늠될 수도 있다.

나는 오미를 오음계로, 맛의 높낮이나 여운은 음표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 소리처럼 맛도 악보화시킬 수 있다. 정확하게는 악보가 아니라 음보가 맞을 것이다. 문제는 악보는 소리를 재현할 악기가 있지만, 음보는 맛을 재현할 그 무엇이 안보여서 내 상상력은 멈춰서고 만다.

소주를 맛보지만, 결코 독한 알코올만을 넘기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은 향기와 맛을 잘 지켜주는 파수꾼이다. 색과 향과 맛을 즐기는 일은, 후각과 미각을 확장시키는 일이고, 지난날들 속에 켜켜이 쌓인 맛의 추억을 소환해내는 일이다. 소환할 색과 향과 맛이 많을수록, 생은 더 다채롭고 향기롭고 맛깔스러워질 것이다.
 

15종류의 증류주 시음표.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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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