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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2.12 09:18 수정 2019.12.12 09:18
대한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경복궁 동편 동십자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고개가 있었다. 중학동 전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전 미 대사관 직원숙소 사이에 있던 고개로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솔고개', '솔재'라 불렀는데, 한자로는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송현이란 이름은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송현은 진흙이 많아 비가 오면 질퍽하여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걷기 좋게 얇고 작은 돌인 '박석(薄石)'을 깔아 놓아 '박석고개', '박석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쪽은 송현동(松峴洞)'이라 하였고, 서쪽은 '벽동(碧洞)'이라 하였다. 두 동은 붙어 있어 한 동이나 다름없었다.

벽동은 '벽장골', '다락골'이라고도 하였는데, 사간동과 송현동 사이의 고개가 있는 곳쯤이었다. 벽장처럼 여러 동 사이에 끼어 있고, 다락처럼 길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마을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송현동과 벽동에 걸쳐 있던 송현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새로이 길을 정비하면서 고개를 깎아버려 사라지게 되었다.  

벽동에 살던 대갈대감 윤덕영
 

김은호 '윤덕영, 윤택영 초상' 유지 초본, <이당 김은호>(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1979) 재촬영. ⓒ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송현 주변 지역은 북촌 지역 중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에서 가까워 종친들과 세도가들이 많이 살았다. 특히 동십자각 바로 건너 벽동에는 천하의 친일파 벽수(碧樹)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 살았고, 바로 옆집 송현동에는 윤덕영의 동생으로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尹澤榮, 1876-1935)이 살았다. 이들의 집은 크고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는데, 두 사람의 집은 언덕을 따라 구름다리가 놓여 있어 서로 넘어 다닐 수 있었다.

이 중 형인 윤덕영은 세태를 파악하는 능력인 뛰어났고, 재산을 관리하는 데에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을사보호조약, 한일병탄에서부터 평생토록 일본이 한국을 장악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앞장섰다. 이를 빌미로 일제의 막대한 은사공채를 받는 등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는 귀족 칭호인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의 머리 앞 뒤통수가 큰 것에 빗대어 '대갈대감'이라 빈정대었다. 그의 한평생은 '친일(親日)'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윤덕영은 18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895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의 현실을 과신한 윤덕영은 철저히 일제에 붙어 승승장구한다. 1909년에 일어난 한 사건은 윤덕영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대변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하자 윤덕영은 이완용(李完用) 등과 함께 장충단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를 가진다. 당시 민심과 어긋나는 역적 같은 행위였다.

또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과 함께 대궐 안 문신들의 반대를 무마시키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여 늑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때 어전회의가 열리자 그의 조카딸인 순종비 순정효황후는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내시가 들고 오던 국새를 가로채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겼다. 그러자 윤덕영은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여 조약 체결을 이루게 하였다. 그는 이 공로로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는다.

1917년에는 순종이 일본 천황을 알현하게 하는 행사를 추진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1919년에는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국민들 중에는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고종이 사망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수고한 민간인들에게 조선총독부의 임명장인 첩지를 위조하여 팔아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윤덕영은 이러한 친일 행위를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하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의 그악스러운 행위는 일본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 일본인은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 그 집요함, 대담함, 거칠 것 없음, 그리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 수단의 신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까지 비꼬았다.

순정효황후 아버지 송현동 후작 윤택영
 

매일신보에 실린 윤덕영과 윤택영의 휘호 글씨 ⓒ 국립중앙도서관

 
윤덕영의 동생이자 순종의 장인인 해평부원군 윤택영은 윤덕영의 벽동 집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주소는 송현동이었다. 그의 집 또한 매우 크고 호화로웠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가용 승용차가 있었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은호가 고종의 초상을 그리러 궁에 갈때 윤택영의 집으로 가서 승용차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윤택영은 원래 부자였으나 딸을 동궁비로 책봉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빚을 지게 된다. 훗날 왕비가 되면 빚을 상쇄하게 될 줄 알았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낭비벽이 심하고 씀씀이가 커 점점 있는 재산은 탕진하고 빚은 더욱 늘어갔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현실을 모르고 무분별하게 낭비를 하였고 결국 그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윤택영은 경제력이 고갈되자 권력을 배경으로 돈을 더 빌리기 시작한다. 빚은 점점 불어나 나중에는 120명이나 되는 이에게 빚을 지고 감당을 하지 못한 그는 파산의 지경에 이른다. 빚쟁이 중 20명은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9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빚을 갚지 않자 빚쟁이들은 차례로 윤택영을 고소하였고, 그의 파산은 당대 사교계의 최고 화제 거리였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 최고의 빚쟁이', '채무왕(債務王)', '부채왕(負債王)', '차금대왕(借金大王)'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윤택영은 도저히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아들과 함께 몰래 중국으로 야반도주하여 베이징에서 자리 잡는다. 베이징에서 그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한때는 엿장수를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빚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윤택영은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몰래 들어오는 등 한국에 온 적은 있으나 이때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결국 다시 몰래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이어진 경제적 생활고와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다.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윤덕영은 늑막염에 걸려 한 작은 병원에 입원하나 치유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참으로 초라한 죽음이었다. 딸이 황제의 비가 되었고 자신은 후작(候爵)이라는 작위까지 얻었으나 그의 헤픈 낭비벽은 불행한 최후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윤택영의 죽음에서 이상한 점은 그가 부원군이었고 그의 형 윤덕영은 거부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이국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그냥 두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추측할 만한 당시 기록이 하나 전한다.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국장으로 온 나라가 애도 분위기에 싸여 있을 때였다. 잡지 <개벽>의 '회고조선 500년 특집호'에 뜬금없는 기사 하나가 실린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 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형 '대갈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

이를 보면 윤택영의 빚이 너무 많았던 것도 있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 중에 그를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덕영이 엄청난 재산이 있었고 권력도 있었는데, 동생을 구제하지 못한 데에는 형제간임에도 서로 인정이 없는 냉혈한들이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안중식이 윤덕영의 벽동 집을 그린 '벽수거사정도'
 

안중식 ‘벽수거사정도’ 초본 ⓒ 고은솔

  

안중식 ‘벽수거사정도’ 작품 ⓒ 고은솔

 
벽동에 있던 윤덕영의 집은 매우 규모가 크고 조경이 특별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집은 지금의 사간동 오른 쪽 벽동에 있었는데, 송현 고개를 옆으로 두고 있어 경관이 빼어났다. 집은 큰 기와집이었으며 정원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뜰 한 가운데는 커다란 노송과 은행나무가 있고, 그 사이에 오동나무가 있고 이어 버드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 온통 나무와 꽃들과 기이한 화초가 줄지어 있었다.

뒤편으로는 백악산과 인왕산이 보이고, 그곳은 성곽으로 둘러있고, 멀리로는 한강이 바라보이는 남향의 별세계 같은 곳이었다. 계절에 따라 온갖 꽃들이 피는 별세계 같은 집이다. 특히 뜰 한쪽에는 새로이 작은 산(假山)을 쌓아 그 위에 작은 정자를 세웠는데, 산에는 작은 소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이러한 조경은 당시 한국에는 거의 없는 특별한 방식이었다.

윤덕영의 '벽수(碧樹)'라는 호는 아름다운 윤덕영의 집을 생각하여 순종이 '벽동(碧)의 나무(樹) 많은 곳에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내린 호이다. 어느 날 순종은 '벽수거사정(碧樹居士亭)'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현판을 만들어 윤덕영에게 보낸다. 이에 감읍한 윤덕영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에게 집 주변 풍경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안중식은 직접 윤덕영의 집을 찾아 스케치 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단에 옮겨 그림을 완성한다.

또한 늘 존경해오던 문인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게는 이 정자에 관한 글을 짓게 하고, 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 1842-?)에게는 글씨를 쓰게 한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과 글은 따로 보관되어 오다가 비단에 그린 그림이 습기에 훼손되자 더 이상 망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의 두루마리 축권(軸卷)으로 꾸며진다.

이 작품은 친일파 윤덕영의 부탁으로 그의 집을 그린 불순한 면이 있으나 안중식의 그림으로는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더욱이 초본까지 함께 남아 있어 관심을 끄는데, 수정한 흔적까지 있어 안중식이 사생하며 느낀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흔적은 실제 작품에 반영되어 있어, 회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이 그림은 당시 지배층들의 삶의 모습이나 건축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실제 거주하던 집의 구조를 알 수 있고, 정원의 구성 양식 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벽수거사정도'에는 집 주변에 새로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인 '가산(假山)'을 만든 모습이 나온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건축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매우 새로운 모습이라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윤덕영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부를 유지해, 1935년에는 옥인동에 프랑스식 저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어 '한국의 아방궁'이란 빈정거림을 당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윤덕영은 국민들의 어려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배만 불리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윤덕영도 결국 일본의 교토에서 창설된 '대본교(大本敎)'에 빠져 조선 지부를 만들려 하였고, 말년에는 중국에서 창시된 사이비 조직인 '홍만자회(紅卍字會)'의 조선 지부를 만드는 등 혼란스러운 인생을 살다 인생을 마친다.

세월이 흘러 결국 윤덕영이 젊은 시절 살며 가꾸었던 벽동 집도 정치적 변화에 따라 없어지고, 말년에 지은 화려한 옥인동 집 또한 원인모를 화재에 불타 없어진다. 이를 보면 나라를 팔아가며까지 쌓은 '권력(權力)'과 '부(富)'라는 허상은 결국 '화마(火魔) 후의 재'같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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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