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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15 12:01 수정 2020.01.15 12:01
"비전을 세우는 것이 먼저고, 세부적인 계획은 모두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할 필요가 있을까?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특히 정책이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비전이 보이지 않고, 있더라도 모호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무원들 사이에 '비전'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부 정책들을 아우르는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말을 '비전'이라고 여기는 게 아닐까?

비전은 그보다는 장기적인 계획, 미래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2045년까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정하려고 한다면 2045년에는 어떤 사회가 됐으면 하는지에 대한 큰 목표, 그 사회를 마치 미리 '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상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비전(vision)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만일 지금 사회가 작동되는 그대로 쭉 이어져서 2045년이 돼도 별로 문제될 게 없다면, 굳이 그런 비전을 세우고 세부 계획을 둘 필요가 없다. 올해보다 내년에 더 열심히 하고, 내후년에 더 열심히 하자는 정도의 다짐만 있으면 된다. 반대로, 2045년에 한국 사회가 2020년의 사회와는 상당히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그 상을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단계적으로,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

2045년 미래상이 혁신적 포용국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정해구 위원장이 지난달 12일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혁신적 포용국가 미래비전 2045' 발표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자, 이제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경제·인문사회연구소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혁신적 포용국가 미래비전 2045'(이하 미래비전2045)를 살펴보자. 6개월 동안 166명의 연구진이 참여해 만들었다는 이 보고서가 제시한 비전은 말 그대로 '혁신적 포용국가'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말만으로는 2045년이 지금과 어떻게 달라지기를 바란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비전 하의 4대 과제는 다음과 같다. 안정되고 품격있는 삶, 성장동력 확보, 협치와 분권의 민주주의, 지속 가능한 환경. 모두 좋은 말이다. 다만 궁금해지는 것은, 이것은 2020년의 목표일까, 아니면 2045년의 목표일까? 2045년까지 달성하면 되고 지금은 부족해도 되는 것들일까? 그렇지 않다. 때문에 현재 해당 분야 정책들도 이미 대동소이한 목표 하에 실행되고 있다.

22개 실천 과제를 보면 좀 다를까? 역시 말의 상찬이다. 핵심 과제 중에 새로운 과제들도 보이기는 한다. 문제는 대부분 과제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필요성이 강조돼 왔지만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없어서, 혹은 상반되는 가치 중 하나를 내려놓을 수 없어서 실천되지 못 한 것들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는 실천 과제 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저소득 비정규직에 대한 안정화와 고소득 조직 노동에 대한 유연화 정책을 결합'함으로써 '한국형 유연안정성 모델을 설립'한다는 것이다.

덴마크 등 유럽의 유연안정성 모델을 한국에 맞게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10년도 더 전부터 반복돼온 것이다. 실천은 안 되고 주장만 반복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소득 조직 노동자의 해고를 지금보다 자유롭게 하자는 주장은 쉽게 나오고, 실업자가 돼도 생활에 문제가 없고 이직 훈련 등이 어렵지 않을 만큼 복지 안전망을 높이는 논의는 더디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반발이 큰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을 이룬다'는 실천 과제 하의 핵심 과제 중에는 '탈석탄·내연기관차 퇴출 시점 명시'라는 게 있다. 퇴출 시점을 누가, 어떻게, 언제까지로 명시하자는 것일까? '국제사회 기후변화 정책목표에 부응하는 장기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 및 이행' 이라는 과제도 있는데, 목표를 언제까지 얼마 이하로 설정하자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국가 차원에서 연구해 제시한 2045년 비전이라면 바로 이 문서 안에 바로 그 시점과 목표치가 제시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과감하게 추진할 것은 추진하면서 석탄 및 내연기관차 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대책, 이 산업 의존도가 높은 지역 경제 대책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목표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하게 될까? 아무 것도 안 하게 될 뿐이다.
 
서로 모순되는 정책 과제들

서로 모순되는 정책 과제들도 보인다. '제조업 강국으로 글로벌 가치 사슬의 상단을 점한다'는 실천 과제 하의 핵심 과제에는 '중소기업 노동생산성을 2045년까지 대기업의 70%까지 제고한다'는 것이 있다. 그냥 보면 좋은 말 같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OECD 최하위 수준이라 하니 높이기는 높여야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노동자 수를 줄이거나,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임금을 줄이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위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밀어붙인다면 실업자가 늘어나고, 가계소득이 줄어들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노동자 수나 임금을 그대로 둔 채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이 지표가 정체돼 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저출산 고령사회에도 활력 있는 사회를 구현한다'는 실천 과제 하의 핵심 정책 과제를 보면 청년 세대의 경제활동 참여율도 높이고 노령인구 고용도 촉진한다고 돼 있다. 이는 앞서 제시된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사회'라는 목표와 함께, 사람들은 연령에 불문하고 최대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담고 있다. 그래야 국가의 복지 비용이 덜 든다는 이유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목표 하에 정책을 추진하면서 '노동생산성'까지 높일 수가 있을까? 게다가 노동자 비중으로는 87% 남짓, 사업체 비중으로는 9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들에서 노동생산성이 높아져야 한다니, 곧이곧대로 밀어붙인다면 숙련도가 낮은 사회초년생과 고령자 일자리들이 대거 사라질 위험이 있다. 즉, 연령을 불문하고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아져야 한다는 목표와,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표는 모순된다. 

또 '개인화와 급속한 기술변화 속에서도 성평등사회를 지속한다'는 실천 과제 하의 과제로는 '일에만 전념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일과 돌봄, 지역사회 활동을 균형 있게 병행하는 시민을 모델로 한 노동시장, 가족 제도 재구조화'라는 대목도 있다. 일에만 전념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는 것은 시민의 삶 전체를 보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이지만, 이 목표 역시 노동생산성은 높인다는 목표와는 모순돼 보인다.

이렇게 모순된 목표들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국가의 핵심 정책 과제로 제시돼 있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말뫼 모델'의 핵심은 비전 선정 과정
 

일마 리팔루 전 말뫼 시장이 지난 13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2020 해외 도시혁신 전문가 간담회에서 말뫼시 혁신 전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황세원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은 모두 2045년의 미래 사회를 상정한 목표이자 정책 과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이미 추진돼 왔거나 더 추진해야 하는 내용들이다. 그야말로 '작년보다 올해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 정도인 것인데, 지금처럼 상반되는 이해관계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매년 조금씩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사실, 그렇게 개별 정책 단위로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전'이라는 게 필요한 것이다. 바람직한 예로 스웨덴 말뫼의 전환 모델을 살펴보자. 말뫼는 1980년대까지 세계 최고였던 코쿰스 조선소가 경쟁력 하락으로 문을 닫고, 2만 5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뒤 쇠락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1994년부터 시작된 전환 과정을 통해서 지금은 신산업 일자리가 계속 만들어지는 도시, 청년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가 됐다.

2018년 말뫼를 방문해서 일마 리팔루(Ilmar Reepalu) 전 시장을 비롯해 코쿰스 조선소의 전 노조위원장, 노동자들 등을 만나고 온 이후로 말뫼 모델에 대해서 여러 편의 글을 쓰고 발표를 해왔다. 그러는 동안 자주 접한 비판이 "말뫼는 코펜하겐과 연결하는 외레순대교 등 대규모 건설 사업들로 경제를 띄운 사례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몇몇 국내 지자체들이 말뫼 모델을 따른다면서 교량 또는 랜드마크 건설, 도심 재개발 등 사업부터 추진하는 예도 봤다.

그렇지만 말뫼 모델의 핵심은 바로 비전, 그리고 이를 정한 과정에 있다. 이 글의 처음에 쓴 "비전을 세우는 것이 먼저, 세부적인 계획은 모두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말은 1월 9~10일 창원에서 열린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과 1월 13일 전국사회연대경제지방정부협의회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2020 해외 도시혁신 전문가 간담회' 등에 참여한 일마 리팔루 전 시장이 여러 차례 강조한 말이다.
 
"비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맥락(context)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어떤 사회(도시)에 살고 싶은지, 큰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 방향이 정해졌다면 관계된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논의의 테이블로 불러서 어떻게 그 실천이 가능할지 토론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업도, 공공기관도, 시민들도 모두 자신이 이 변화 과정의 중요한 수행자(actor)라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설명에는 어떻게 복잡한 이해관계 조정이 가능한지에 대한 실마리가 들어 있다. '지속가능한 환경'과 같이 시민 누구나 관계돼 있는 크고 중요한 목표를 두고 산업, 고용, 교육, 주거, 교통 등의 모든 부문을 그에 맞춰 변화시킨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손해를 보게 될 사람들, 예를 들면 오염 배출 산업의 경영자나 종사자들도 이 도시의 시민이자 여기서 자라날 아이들의 부모일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규제에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충격이 덜한 전환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세번 스즈키와 그레타 툰베리
 

1992년 리우 환경회의에서 연설한 세번 스즈키(왼쪽)와 201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그레타 툰베리. 둘 다 환경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과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했다.(UN 유튜브 영상 캡쳐) ⓒ UN

  
말뫼가 1990년대에 "2020년까지 지속가능발전 측면에서 최고의 도시를 만든다"는 비전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은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UN 환경회의의 영향이 컸다. 캐나다의 열두 살 소녀 세번 스즈키(Severn Cullis-Suzuki)가 각국 정상들 앞에서 "환경을 부수는 일을 제발 멈춰 달라" "깨끗한 환경을 되찾기 위해 모두가 하나가 돼서 행동해야 한다" 등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보고 당시 스웨덴의 시민들, 특히 청년과 청소년들 사이에 기후변화, 탄소저감 목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문가와 시민 그룹의 집중 토론 결과 '지속가능한 발전'이 도시 전환의 비전으로 선정됐다.
 
그렇게 비전을 세우자 세부 정책들 역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엄격한 분리수거 규칙도 시민들이 "이 쓰레기가 재생돼서 이 도시 버스들의 에너지원이 된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무리없이 잘 지켜졌다. 그 덕분에 2000년까지만 해도 50%를 밑돌던 쓰레기 재생 비율이 2011년에는 98.1%로 크게 높아졌고, 매립하는 쓰레기는 전체의 1.9%에 불과하게 됐다.

이번에 한국에서 다시 만난 그에게 "외레순대교 등 건설 사업은 말뫼의 전환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었다. 그는 "외레순대교는 전환이라는 큰 그림에 들어맞는 한 조각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밖에 재생에너지 산업 등 신산업 창업을 지원한 것,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주거단지를 개발한 것, 환경과 기술을 접목하는 등 융합 학문 중심의 말뫼 대학을 설립한 것 등 각기 부분은 다르지만 모두 '최고의 지속가능성 도시'라는 비전의 맥락 하에서 추진된 사업들이었다.

시 차원에서 조선소 실업자들을 지원한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주거지 주변의 환경 개선 사업에 참여한 실업자들에게 공영주택 월세를 깎아줬다. 이와 같은 사업이 국제 환경상을 받는 등 주민들의 자부심을 높여줬기 때문에 실업자들에게만 월세를 낮춰준 것이 적절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식의 논란은 없었다.

세번 스즈키의 연설 이후 27년이 지난 2019년. 16세의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전 세계를 다니면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역설했고, 미국 타임지에 의해 최연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 1월 9일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에서 김경수 경남지사는 "최근 젊은 세대하고 얘기를 나눠 보면 환경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커져 있다"는 말을 했다. 비로소 우리에게 지속가능성이라는 국가 비전을 세울 만한 여건이 생겨 있는 것이다. 혹은 산업 위기 속에 있는 도시들부터라도 녹색 전환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 볼 만한 때다. 물론 겉핥기식이 아니라, 청년·청소년을 포함해서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는 비전 선정 과정을 거친 다음에 말이다.

기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어쩌면 말뫼와 같은 전환 모델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혁신적 포용국가' 비전에 나오는 작은 과제 하나도 달성하지 못 해서 정말 2045년이 되도록 매년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 지금껏 우리가 큰 변화를 위한 정책 비전을 세우고 실행하지 못했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 복잡한 이해관계 속으로 뛰어들어서 난맥상을 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새로운 정치인이 드물게 나타나는 기회인 총선이 올해 치러진다. 이 때에라도 비전의 중요성을 아는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세번 스즈키의 1992년 UN 연설 중 한 대목을 전하고 싶다.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은 선거에서 떨어지는 일과는 다릅니다.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떨어지는 일과도 다릅니다. 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여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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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기자,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홍보팀장으로 일했고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에서 사회적경제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희망제작소 연구원으로 ‘좋은 일, 공정한 노동’ 기획 연구, 보드게임 ‘좋은 일을 찾아라!’ 개발을 담당했다. 현재 LAB2050 연구실장으로 지역 고용 위기 등 주제를 연구 중이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위원회 공익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