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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28 14:27 수정 2020.01.28 14:27
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였다. 아버지는 아흔 살을 넘기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섯 살 차이로 뒤따르고 계신다. 걸음마를 배우는 증손자가 모임에 합류해 모두의 시선을 앗아갔다. 작은형의 손자인데, 손자를 보고 있는 형님의 눈빛이 한없이 고요하고 차분하게 깊어졌다.

세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 보다. 부모님이 계시니 나 또한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행복하다. 예산 추사고택의 주련에 적힌 "高會夫妻兒女孫(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가 함께하는 것이다)" 글귀와 어울리는 순간이다.

은퇴한 큰형은 시골에 살면서 빚은 맑은술을 내놨다. 쌀과 누룩으로 빚었는데 달콤하고 묵직했다. 끈적거리지도 쿰쿰하지도 않고, 과일 향도 옅게 배어 있었다. 옅은 취기에 행여 넘어지실까 봐 아버지께는 권하지는 못하고, 형제들끼리 잔을 마주 대며 올 한해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했다.

아버지가 형제 중 셋째이고 나도 셋째이다 보니, 집안일이고 문중 일이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자주 빠지는 편이다. 여행을 다니고 종가 음식을 취재했기에 다른 집안의 내력은 얼마간 알면서도, 내 집안의 내력은 잘 모르고 지냈다. 마치 고향에 대한 글을 한 편도 쓰지 않고, 타향의 멋진 풍광만 그리는 내력과 비슷하다고 할까.

좀 송구한 감도 있던 차였는데, 우연히 문중의 종친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명문가란 무엇인가?"라는 좀 원론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그 무렵 안동 국학연구원의 의뢰로 경상북도 명문가의 술과 주안상을 살피던 차라, 나는 이렇게 답했다.

"반가라 한다면 봉제사 접빈객이 가장 긴요했던 것인데, 그에 필요한 게 술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명문가라 한다면 문중의 술이 있어야지요."

51가지 술을 빚은 장계향
 

경북 영양 두들마을 풍경 ⓒ 막걸리학교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순천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양천 허씨 화수회(花樹會)의 요청으로 시제용 술을 빚게 됐다. 허영만 화백의 글씨를 받아, 양천 방문주라 이름했다. 방문주는 해방 전까지 해주 방문주가 이름이 높았는데, 처방문, 약방문처럼 일정한 제조법이 있는 명칭이니, 누구라도 편하게 쓰면 된다. 그렇게 시제용 술을 보내고, 뜻이 있다면 지역의 농산물과 연계시켜 문중의 술을 만들어 상품화해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집안에 전승되는 술이나 자신이 알거나 빚었던 술을 자녀들에게 남겨준 이들이 종종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1598~1680)이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살았던 장계향은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해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책 말미에 적어두었다.

<음식디미방>에는 51종의 술 제법이 담겨있다. 그런데 신기하면서도 궁금한 게 있다. 이 술을 집안에서 다 빚었을까? 같은 술을 빚더라도 계절마다 맛이 달라지니, 한두 가지 술만으로도 집안의 위신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51가지 술을 다 빚었을까? 어쨌든 장계향의 당부는 대대로 이어져 <음식디미방> 오늘까지 전해지고 두들마을은 음식디미방 마을이 됐다. 한옥이 새로 들어서고, 술빚기 체험 공간까지 조성됐다.
 

두들마을에 있는 장계향을 기리는 비석 ⓒ 막걸리학교

 

음식디미방에 적힌 글, 이 책을 잘 간수하라는 글. ⓒ 막걸리학교

 
장계향은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1627~1704)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나라로부터 정부인의 품계를 받았다. 아들 잘 키운 덕을 보았다. 하지만 이현일의 삶은 논쟁에 휘말려 순탄하지는 않았다. 관직이 복관됐다 환수되기를 거듭하다가, 사후 200년이 지난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됐고, 그의 방대한 문집 <갈암집>도 1908년에야 당당하게 세상 빛을 보았다.

이현일이 아버지 이시명(1590~1674년)을 대신해 1659년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가족들의 술자리에 대한 의견이 잘 담겨있다. 그 글이 잔잔하고 따뜻해 읽어본다.
 
"나는 성품이 강하고 재주가 졸렬하여 남들과 뜻이 맞지 않은 적이 많다. 그래서 애써 세상을 멀리하고 이 깊고 그윽한 곳에 와서 살다 보니, 너희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져 서로 소원하게 지내는 근심을 지니게 하고 말았구나. 너희들에 대한 그리움은 실로 마음에 있는데 세월은 흘러가서 옛일은 점점 멀어지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감회에 젖노라니 애통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나와 막내아우가 모두 희수(稀壽)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바라건대 이제 서로 만나 다정히 회포를 푸는 한편 너희 아들 손자들과 함께 집안의 복을 도타이 쌓고 서로 자주자주 만나 노년의 위안을 삼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옛사람은 '상체(常棣)'와 '행위(行葦)'의 시와 '화수위가(花樹韋家)'의 모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친족끼리 만나서 은근한 정을 나누는 것이다. 바라건대, 너희들은 모두 이러한 뜻을 따라서 매양 사시(四時)의 첫 달에 술자리를 베풀되 술은 굳이 좋은 것으로 마련할 필요는 없고 그저 즐겁게 마실 수 있으면 되며 안주는 꼭 풍성하게 장만할 필요는 없고 제철에 나는 과일과 나물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어떤 사람은 활을 쏘고 어떤 사람은 시를 읊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저마다 성정에 맞도록 유유자적 즐거이 노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다. 모쪼록 예법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요 기타 비루하고 깔보고 업신여기는 이야기나 다른 사람의 장단점, 주군(州郡)의 정치의 득실 따위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서, 우리 집안의 평소 가법을 더럽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 이시명의 의견이자, 아들 이현일의 의견일 것이다. 친족들의 화목을 위해서 사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첫 달에 술자리를 베풀라는 얘기가 흥미롭다. 또 술은 굳이 좋을 필요가 없고, 안주도 풍성할 필요가 없이 제철 과일이나 나물이면 된다고 한 마음이 소박하다.

꽃이 떨어지니 봄술이 향기롭다

'상체(常棣)'와 '행위(行葦)'는 <시경>에 등장하는 형제의 우애를 노래하는 편명(篇名)이고, 화수위가(花樹韋家)도 위씨 형제들이 꽃나무 아래서 모여 환담하며 술 마시는 자리를 그린 시다.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이 765년에 장안에 갔을 때 원외랑으로 있던 위씨 형제들이 꽃나무 아래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를 지었다.
 
그대의 집 형제들을 당할 수 없도다 君家兄弟不可當
어사와 상서랑의 벼슬이 즐비하고 列卿御使尙書郞
조회하고 돌아와서 늘 꽃나무 아래 모이니 朝回花底恒會客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롭도다 花撲玉缸春酒香
 

안동 하회마을을 갔을 때 받았던 소박한 주안상 ⓒ 막걸리학교

 
흔히 친족 간에 모이는 종친회를 화수회(花樹會)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이 이 시에서 유래했다. 꽃나무 아래에 형제들이 모이고, 술 항아리에 꽃이 떨어져 봄술 향기가 더하는 순간을 집안 어른들은 예나 이제나 부럽고 대견하게 바라봤는가 보다. 그 마음에 공감이 가니 나 또한 나이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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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