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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사방 어디로든 통해 있었다.
ⓒ 김종휘
길을 떠났다. 날마다 집을 나서듯 길 나선다고 해도 그만인 것을 가슴 한쪽에는 굳이 길 떠난다는 말을 박아두고 있었다.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휑함과 일상에서 떨어져나간다는 뒤숭숭함. 그만큼 나의 지금 이곳에 대한 집착은 끈질겼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어느 한구석에 나는 너무 오래 웅크리고 살았다.

길은 떠났지만 어떻게 해야 떠난다는 말이 삶을 정돈하는 쓰임새에 이르고 마침내 죽음조차 홀가분한 여행처럼 다가올 수 있는지 나는 몰랐다. 그만큼 나는 막살았다. 닥치는 대로 허우적댔고 몸부림쳤다. 손놓으면 죽는 줄 알고 일에 매달렸다. 그런 기분은 서울에서 동해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뒤엉킨 잡초처럼 무성했다.

속초에 도착해서 땅에 발 딛고 주섬주섬 걷기 시작했다. 아내와 고미와 나는 바다를 보며 걸었다. 평일의 바닷가는 적막했다.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셌으며 파도는 사나웠고 공기는 차가웠다. 조금 전에 떠나온 4월의 서울이 갑자기 아득한 비현실처럼 멀리 가 있었다. 북적거리고 흐느적거리던 그때 그곳과 딴판인 지금 이곳이 따로 있었다.

걷고 보니 떠났다는 의식은 흐려지고 대신 길과 길에 연이어 들어서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무렵 서울의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라는 존재감과 분리된 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디로부터 무엇과 결별하며 떠나온 것인지 서서히 잊어먹고 있었다. 삶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을 듯 굴었던 그것들이 별것 아니게 떠나고 있었다.

두 시간가량 지나고 나자 배낭 속의 지도를 꺼내들고 틈틈이 거리와 속도를 확인하는 일이 성가셨다. 서너 시간이 흘렀어도 지도에서는 한 점 다음의 한 점이었다. 그새 여러 길을 거쳤고 많은 풍경을 만났지만 지도에 의존하는 감성은 참으로 빈약했다. 몇 시야? 얼마나 왔어? 아내와 나는 그렇게 서로에게 묻는 일이 한심해졌다.

퀵 서비스 배달 가?

아내와 바바 여행을 궁리했을 때 계획 같은 것은 포기하기로 했었다. 날마다 몇 킬로미터를 가고 얼마만큼 빠르기로 걷고 아침 몇 시에 출발해야 한다는 식의 기준이나 목표를 정하지 말자고 했다. 그냥 걷기로 했다. 하나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나는 어느새 다시 바삐 걷고 있었다. 열심히 걷고 뒤처진 아내 보고 다시 걸었다.

주변은 끝없는 바다와 첩첩산중과 허허벌판이었다. 그곳에 일하러 간 것도 아닌데 나는 몰랐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한잠 자면 바다 건너 훌쩍 다른 땅에 가 있듯, 지하철에 몸을 맡기면 땅속을 관통하다 때맞춰 출구로 총총 빠져나오듯, 승용차로 밤새 달려가서 내리면 그뿐인 듯 행동하는 것. 출발하고 도착하면 끝나는 도로인 줄 알았다.

▲ 길 위에서 쉴 때마다 내가 도망친 길들이 보였다
ⓒ 김종휘
그럴 때면 아내는 내 뒤통수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그랬다. 나는 내 인생을 퀵서비스 하는 배달부처럼 살았다. 인생이란 나를 나에게 보내는 길인데, 나는 내 자신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길을 휙휙 스쳐 보냈다. 덕분에 매번 서둘러 당도한 어딘가에서 다음에는 또 어디로 갈지 두리번거리는 더듬이만 키웠다. 지나온 길과 가지 않은 길은 상관없었다.

그렇듯 목적의식과 속도감에 포박당한 삶을 느슨하게 풀어주려고 바바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돌진하는 삶이 벅차서 고삐 풀린 삶의 길은 어디로 가는지 그냥 따라가 보자고 떠난 것이다. 어느덧 중년의 문턱에 서고 보니, 지나온 길 곳곳에서 사방 어디로든 갈 수 있었는데 한사코 회피하고 지나쳤던 그 길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었다.

돌아갈 수 없다.

젊은 날에는 일단 그리로 가면 돌이킬 수 없었던 길이 왜 그리 많았을까. 1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해방신학을 접한 나는 목회의 길을 가는 '착실한' 형과 '경건한' 신에게 마음의 작별을 고했다. 마르크스ㆍ레닌주의 그룹에 가담하고는 해방신학을 알려준 '개량주의' 교회 선배들을 떠났다. 같은 그룹에서도 '결정적인' 노선 때문에 수시로 갈라섰다.

갈림길마다 나를 둘로 나누고 하나를 택했다. 돌아가려는 나와 떠나가려는 나. 그 무렵 나는 늘 떠나가는 자리에 있었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속적이고 혁명적이며 근본적인 자리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길들이 늘어나면서 20대 10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서른이 되던 그해 어머니가 쓰러졌다.

▲ 어머니가 나에게 왔던 그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 김종휘
임종까지 그 6개월 동안 나는 종일 어머니와 같이 지냈다. 병 수발과 조직 활동을 두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당시에 막 교회 목사가 된 형과 사모 일로 바빴을 형수를 얼씬도 못하게 단속한 어머니는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그 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담도암 말기. 두 번의 수술. 첫 두 달간 희망을 품었다가 포기한 어머니는 퇴원을 자청하고 집에 누웠다. 날마다 바짝바짝 메말라갔다. 통증이 오면 내가 주사를 놨다. 어머니 머리맡에서 하루 세 번 성경을 낭송했다. 가끔 찬송가도 불렀다. 사나흘에 한 번 목욕을 시켰다. 머리카락부터, 온몸을, 젖가슴과 성기와 항문으로, 발가락까지 구석구석 닦았다.

늙고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는 한 여성의 몸을 씻기면서, 그 작은 몸이 하루하루 쪼그라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의 길은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궁금했고 그런 나 때문에 놀랐다. 어머니를 떠나온 그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여긴 그 길에, 나에게 오려고 날마다 길 떠나고 돌아선 어머니의 길이 있었다. 그 길을 어렴풋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번도 동행한 적 없었던 길, 나를 낳고 매일 집과 교회를 오간 어머니의 새벽 기도 길. 나는 마중도 배웅도 할 수 없었던 길, 구속된 자식 보러 경찰소와 구치소로 달려왔다가 혼자 돌아가야 했던 길. 눈감기 전날 어머니는 모기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썼다." 나에게 왔던 어머니의 길을 나는 얼마나 오래 잃어버리고 살았던 걸까.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만큼 길에 대한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때도 없었다. 대도시 도로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 길을 잃는다는 느낌은 꽤나 관념적이었다. 곳곳에 표지판과 노선표이고 차에는 내비게이션이 있다. 하나 해안도로를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나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 같은 당혹감을 맛보았다.

숲 속에서 흙길은 점점 좁아지다가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 자리마다 나는 꼼짝달싹 못하고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앞에서 길이 없어졌다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순식간의 두려움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기분.

숲에서 길의 향방은 수수께끼였다. 우거진 잎사귀가 앞을 가리고 잡풀이 발을 뒤덮고 우렁찬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는 숲 속에서 길은 있다가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그럴 때면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했다. 전진과 후퇴의 잣대가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가고 오고 물러서고 기다리고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길이었다.

길은 꼭 그런 다음에 나타났다. 그 길로 가면 종종 왔던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왔던 길 고스란히 돌아갔어도 이미 같은 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왔던 길, 이제는 그 길로 돌아가도 어머니를 만날 순 없지만, 그 길은 잃어버렸다가 나타난 길이고 새로운 길이었다. 나에게 왔으나 맞이할 줄 몰랐던 그 길로 나는 좀 더 그냥 걸어야 했다.

같이 가.

나는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앞서 걸었다. 얼마 뒤에 아내가 말했다. 좀 빨리 갈래. 사진을 찍느라 주춤했던 내 걸음이 거슬렸나 보다. 한참 뒤에 아내는 말했다. 여기서 놀다 가자. 놀이터를 발견한 아내는 그네를 타며 혼자 놀았고 나는 다시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말했다. 이것 봐. 나는 힐끗 보다 말았다. 아내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안았던 고미를 내려놓았다. 고미가 힘들어하는데 좀 더 안아주라고 아내는 말했다. 나는 그냥 끌고 갔다. 아내는 고미를 가로채더니 품에 안고 저만치 앞서 갔다. 나는 좀 더 가서 쉬자고 하면 아내는 지금 쉬자고 했다. 내가 더 쉬려고 하면 아내는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여기서 자자고 하면 아내는 딴 숙소를 찾아보자고 갔다.

길에서 우리는 앞서거나 뒤처졌고 티격태격 어긋나게 걸었다. 나란히 걷기보다 홀로 길 위에 있는 모습을 서로 자주 보여주었다. 토라지고 다툴 때마다 아내와 나 사이에 길이 벌어졌다. 같은 길을 걸었지만 아내는 아내의 리듬대로 나는 나의 호흡대로 각자 갔다. 내가 아내에게 가는 길과 아내가 나에게 오는 길은 시시때때로 달랐다.

놀듯이 걷자고 떠난 길에서 동행인을 대하는 마음은 수시로 불편했다. 아내가 배고플 때 나는 배고프지 않았고, 내가 눈길 주는 풍경에 아내는 심드렁했으며, 아내가 초롱초롱 빛날 때 나는 기운이 빠져있었다. 나와 아내는 사사건건 간발의 차이로 미묘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번은 숙소를 잡아둔 다음 따로 저녁밥을 먹기도 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아내 없이 혼자 바바 여행을 하는 동안이었다. 같은 길에서도 내가 보는 길과 다른 길을 보았던 아내가 그렇게나 다른 나를 지켜보느라 유지되었던 그 거리. 같이 걷는 동안 아내와 나 사이로 느슨하게 또는 팽팽하게 오갔던 거리. 따로 또 같이 걷는 내내 번번이 부대꼈던 그 거리가 그리웠고 고마웠다.

동반자에게 소중한 것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는 열망이 아니라 서로를 견뎌야 하는 그 거리를 끝끝내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생각은 혼자 바바 여행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덤덤하나 편안하게 나를 안아주는 아내의 품 안에서 분명해졌다. 내가 아내와 다르게 걸었다고 느꼈던 그 길이 실은 우리가 같이 걸어온 길이 맞았다.

고미처럼 걸어봐.

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었다. 길은 한 걸음씩 그 모양대로 움직였다. 그 한 걸음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소중했다. 예컨대 오래 걷다 보면 발부터 얼얼해지다가 종아리와 허벅지의 통증도 둔감해진다. 그 어느 순간 배낭에 눌린 어깨와 허리를 펴면 뿌드득 뼈 소리와 함께 길은 두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시원하게 들어왔다.

그렇듯 길의 정취는 어떻게 걷느냐가 좌우했다. 안 그래도 내 걸음걸이는 직립과 직진 프로그램밖에 입력된 것이 없는 로봇처럼 뻑뻑했다. 반면 아내는 무규칙 이종 걷기의 대가였다. 뛰어가다가 느릿느릿 걷고 게처럼 옆으로 걷다가 거꾸로 걸었다. 소풍가는 길에 틈만 나면 딴 짓 하는 아이 같았다. 그런 아내가 고미와 함께 걸으면 보기 좋았다.

▲ 고미처럼 아내처럼 나는 걸을 줄 몰랐다.
ⓒ 김종휘
고미는 누가 줄을 잡느냐에 따라 모습이 딴판이었다. 내가 줄을 잡고 가면 종종 끌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곧잘 멈췄고 딴 데 가려고 용도 썼다. 그럼 나는 더 바짝 잡아당겼다. 그러던 고미가 아내와 갈 때는 코를 땅에 처박고 머리와 몸통과 엉덩이를 사방으로 흔들면서 걸었다. 덩달아 아내도 전후좌우 불규칙하게 끌려가며 신나했다.

아내의 말이 옳았다. 나는 자세를 바꿨다. 긴장을 풀고 다리의 힘을 뺐다. 걸음 따라 몸이 흔들리게 놔두었다. 눈은 길의 끝점에서 거둬들여 사방으로 내버려두었다. 그런 다음에서야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직선 도로에 길들여져 속도감밖에 모르던 온몸의 감각이 하나 둘 깨어났다. 살짝 휘감아 도는 길만 만나도 얼른 생기를 빨아들였다.

바닷가 마을에서 본 아이들은 아무도 똑바로 걷지 않았다. 왔다갔다 제멋대로 걸었다. 살아있는 제 몸에 맞게 움직이는 길을 걸을 줄 알았다. 그런 아이를 데려다가 줄 맞추게 하고 일렬로 걷게 훈련시키는 학교를 오래 다녀선지, 또는 운전을 시작한 다음부턴지, 나는 직진의 대로를 직선 코스로 가는 것만이 길인 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뭣 하러 돌아서 가노?

해안가의 길도 대부분 곧고 넓게 뻗어간 길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을 뒷산의 비포장 시골길을 빠져나와 밭일하는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따라 걷는 마을 길은 어디에 있느냐고. 그러자 노인은 힘들게 돌아가려는 까닭을 모르겠다는 듯 주름 자글자글한 미소로 되물었다. 소박한 배려의 마음도 빠른 직선의 대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닷가 모양 따라 구불구불 휘어진 구 해안도로는 그나마 괜찮았다. 새로 생기는 바닷가 인근 도로는 더할 나위 없이 직진의 대로였고 오르내리는 고갯길도 싫어서 아예 막힘없이 허공을 수평으로 날고 있었다. 비좁고 삐뚤거리고 낮은 길은 헌 길이고 쭉쭉 크게 높이 뻗은 길은 새 길이었다. 길을 물으면 어디서나 새 길이 좋은 길로 통했다.

차로 내질러야 맞는 기나긴 일직선 도로 앞에 서면 두 눈은 차를 탄 것처럼 소실점 너머로 달려갔다. 특히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굽은 길을 걷다 보면 직진의 대로를 만나야 무의식적으로 안심했다. 그 직선 도로를 반복해서 걷자 몸이 먼저 싫증을 냈다. 따분했고 무엇보다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뻔한 길이 나오면 무조건 옆으로 샜다.

▲ 조금만 돌고 굽어도 길은 생기를 머금는다.
ⓒ 김종휘
어느 곳에서든 에돌아가는 길로 들어서면 잎을 피우듯 걸음걸음 생기가 일어났다. 저리로 빠지면 보성 녹차 밭이라는데 갔다 올까, 여기까지 왔는데 김남주 시인 생가엔 들려야지, 좀 더 가면 고정희 시인 생가도 있다는데 갔다 오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지 뭐. 그렇게 소소하게 죽이 맞아 옆길로 빠지는 날마다 아내와 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실 삼면 바다를 끼고 걷는 일은 어느 길로 들어서도 통했다.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든 바다를 향해 서로 빠짐없이 이어져 있었다. 방향 잃을 걱정이 없었다. 직진의 최단 코스가 아닌 다양한 길을 한사코 배제하고 생략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었다. 빙 둘러가든 옆으로 새든 왔던 길을 돌아나가든 다 괜찮았다.

형, 나 이렇게 살아.

조직 활동에 몰입했던 20대 시절 나는 세 명의 후배를 특별히 아꼈다. 그중 노동현장에 갔던 한 후배가 요절했다. 그 아픔 때문에 우리는 서로 상처를 남기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 한 후배는 중견 기업에 들어갔다. 다른 후배는 출판사 영업 사원이 되었다. 나는 음반을 기획하고 잡지 제작을 하면서 신문 잡지에 글을 쓰거나 방송 일을 했다.

그날 밤 나는 매일 자정에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때문에 방송국에 있었다. 막 오프닝 멘트를 하는데 스튜디오 유리창 너머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양복 차림의 두 사내가 있었다. 녀석들이었다. 몇 년 만에 갑자기 한꺼번에 등장한 두 후배는 이미 한 잔 한 것 같았다. 방송이 끝나자 스튜디오로 들어오더니 나를 끌고 나갔다.

택시를 타고 새벽 두 시를 넘겨 도착한 그곳은 룸살롱이었다. 앉자마자 중견 기업에 다니는 후배가 호기 있게 말했다. 형, 여기 나 단골이야. 거래처랑 여기 자주 와. 저 아가씨가 내 담당이야. 인사해라. 우리 형 이런 데 안 오는 사람이니까 잘해라. 자 내가 제조합니다. 자, 형 마셔. 근데 뭐로 건배하지? 아 맞아, 오비 베어즈를 위해!

한때 우리 모두 오비 베어즈를 좋아했고 같이 경기장에 간 적도 있었다. 녀석들은 연거푸 폭탄주를 돌리고 아가씨들은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경직된 나 때문에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한 아가씨가 말했다. 우리 왜 불렀어요? 그때 출판사에 다니는 후배가 말했다. 요즘 오비 베어즈 왜 그래? 옛날엔 잘했잖아! 아가씨들은 모두 나가버렸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후배는 조직을 해체한 뒤에도 혼자 동료들을 돌보고 있었다. 결혼과 돌잔치 등 경조사를 챙겼고 해마다 송년회를 열었다. 나만 가지 않고 있었다. 후배는 술에 취해 자꾸 같은 말을 했다. 형, 형은 어떻게 살아?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 다른 후배가 그를 향해, 넌 어떻게 사는데? 하고 주정을 부리더니 다시 오비 베어즈 타령을 했다.

난 모르겠어. 형은 살기 좋아? 형, 우리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야, 넌 책 팔아 좋냐? 좋다, 너무 좋다, 임마! 두 후배는 옥신각신하다가 또 건배를 했다. 나가자고 말하자 후배는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울며 말했다. "형, 나 이렇게 살아." 그날 밤, 아니 그 전이나 그 후에도 나는 말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든, 어느 길 위에 있든, 나도, 너희도, 지금 사는 이 모습, 다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

▲ 길은 달라도 너와 나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
ⓒ 김종휘
바바 여행을 마치고 얼마 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공모' 결과가 발표되었다. 대상은 경남 사천시와 남해군을 잇는 삼천포대교. 나는 그 길로 걷지 않았지만 사진을 보니 육지에서 섬과 섬으로 이어진 다리는 굽고 또 굽어서 아름다웠다. 직선으로 갔다면 건너뛰었을 작은 섬들을 빠짐없이 잇고 이은 것이 삼천포대교의 미덕이었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후배와 출판 영업을 하는 후배에게, 그리고 일찍 저 세계로 떠난 후배에게도, 삼천포대교처럼 여기로 돌고 저기로 돌아서 모두 잇닿게 되기를 빌었다. 더는 같은 길을 가지 않아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그러느라 굽고 휘어 아름다운 길을 통해 언제든 서로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 길은 바바 여행 동안 끊임없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갔다. 지치고 힘겨워서 생각은 줄어들고 몸의 감각이 커지는 순간마다 나에게로 왔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착한 형의 얼굴, 때마다 바뀌는 신의 얼굴, 해방신학을 알려준 교회 선배의 얼굴,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얼굴, 아내의 얼굴, 조직 활동을 같이했던 후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들과 만났던 길 위에서 나는 어떻게 등을 돌렸고 혼자 어디로 내뺐는지, 그때 그 얼굴은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 지나온 길, 가지 않았던 길, 잃어버렸던 길로 차례차례 돌아가는 것 같았다. 뒤엉키고 갈라서고 겹치고 쪼개졌던 그 복잡다단한 길목에서 어느 길을 봐도 나를 지켜보는 얼굴이 있었다. 나의 길은 그들의 길과 다 연결되어 있었다.

끝내고 보니 바바 여행은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 들었던 것처럼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자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여행'의 리허설이었다. 이외수 선생의 산문에 쓰인 대로 '마음 밖에 있는 어리석은 길'에서 '마음 안에 있는 너그러운 길'로 접어드는 예고편이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언제든 돌아가야 할 그 길이었다.

돌아갈까? 그래.

우리는 바바 여행을 하다가 아무 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 손 놓아둘 수 없는 밥벌이 때문에,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여행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키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해서 늘 새로 길 떠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같은 길에 다시 돌아와 섰다. 같은 곳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가면 과거를 통해 미래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그 길은 며칠 전에 멈춘 그때 그곳이었고 오늘 다시 출발하는 지금 이곳이었다. 마치 길을 내 안으로 겹겹 말아서 포개두었다가 필요하면 활짝 펼쳐놓고 그 길에 발 내딛는 이상한 체험이었다. 그 길은 내 나이만큼, 내가 살아온 이력대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의 유형별로 하나씩 열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더 내가 되어가면서 길을 걸었다.

▲ 조용히 혼자 다녀오는 그 길에 모든 것이 있다.
ⓒ 김종휘
혼자 걷기 시작한 4차 바바 여행이 서남해안의 어느 섬에 이른 날이었다. 새로 길을 내느라 파헤쳐놓은 흙길이었고 평일 점심 무렵이었다. 길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인부도 주민도 개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버스가 하루에 한 번 돈다는 섬 마을의 흙길을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황량하게 방치된 낡은 버스 정류소 안에 들어가 앉았다.

30대를 마감하고 40대를 시작하는 나이. 이제 어떤 길을 가게 될까. 바다는 말이 없었다. 무수한 파도가 무수한 물결을 일으키며 왔다 갔다. 더 이상 젊지 않고 아직 다 늙지 않은 나. 온전히 살아야 할 때였다. 시원한 합리와 따듯한 불합리, 관대한 오른손과 지혜로운 왼손, 차분한 만남과 성숙한 이별 등. 그런 것들이 가만가만 하나 되는 길을 가고 싶었다.

그 길을 흔적 남기지 않고 조용히 다녀오려는 이에게, 인생의 어느 날 문득 그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에게, 그 길은 세상 어디에서 어디로도 다 연결되어 있다고, 아무 때고 각자 훌쩍 다녀오면 되는 길이라고 전해주고 싶었다. 그 길손들에게 아내와 나의 길 체험을 참고하시라고 십계명을 덧붙인다.

1. 최대한 한 눈 팔고 걸을 것. 앞만 보고 걷다가는 어느 순간 땅만 보게 되니 조심할 것.
2. 보행 자세를 수시로 바꿀 것. 지그재그 걷고 옆으로 걷고 거꾸로 걷고 다양하게 걸을 것.
3. 30분 이상 직선 코스를 걸었다면, 망설이지 말고 아무 데로든 당장 길옆으로 샐 것.
4. 목적지 정하고 걷지 말 것. 지루해지면 행선지 바꾸거나 딴 길로 빠질 것.
5. 걷는 도중엔 지도 보지 말 것. 지도는 하루를 마감할 때 한번 살펴볼 것.
6. 따분해지면 숨찰 때까지 뛰어볼 것. 그리고 헐레벌떡 숨 많이 쉬고 다시 걸을 것.
7. 동행인과 마음 안 맞을 땐 나란히 걷지 말 것. 적당히 거리 두다가 심심할 때 같이 걸을 것.
8. 동행인과 말다툼했다면 입 다물 것. 배고픈 사람이 밥 먹자고 말 걸 때까지 침묵할 것.
9. 길 가다 사람 만나면 웃을 것. 눈 마주칠 때 기다렸다가 꾸벅 고개 숙여 먼저 인사할 것.
10. 바위나 나무에 이름 같은 것 남기지 말 것. 정 하고 싶으면 바닷가 모래 위에 쓸 것.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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