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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년만에 새 시집을 출간한 시인 허연.
 13년만에 새 시집을 출간한 시인 허연.
ⓒ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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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 3부 리그 수비수가 날 울릴 때가 있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MRI 찍는 통 속의 고독을 견디는 구순의 노인이 날 울릴 때가 있다. 쓰러지기 전 거품 문 투우의 마지막 진실 같은 거. 그게 날 울릴 때가 있다…
- '슬픈 빙하시대 5' 중 일부.

시(詩) 속에 드러나는 어두움과 염세에도 격조가 있다면 시인 허연(42)이 구사하는 시어는 세련된 어두움과 염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아픔이나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환멸을 말할 때도 날것의 드러냄이 아닌 곰삭은 은유를 사용하는 사람.

하지만, 시인이 사용하는 염세와 어두움의 포즈는 말 그대로 폼 잡기 혹은, 제스처에 그치기 쉽다.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했을 때 그렇다. 허나, 허연은 세련됨 위에 진실성까지 갖춘 시들을 독자 앞에 내놓음으로써 이런 우려를 불식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허접할수록 아픔답다. 고대의 동굴 속에서 등잔의 그을음을 발견했을 때. 아, 누군가 살려고 했었구나. 포기하지 않았었구나. 저잣거리를 도망친 누군가가 여기서 욕망을 접었구나. 외롭게… 흔적은 그렇게 오래간다. 동굴을 걸어나오며 생각했다. 자기 발로 동굴에 들어온 사람들을…
- '생태보고서 3' 중 일부.

위에 인용한 시들처럼 진실한 어두움과 염세를 노래하는 시 수십 여 편이 담긴 책이 출간돼 조용한 화제를 부르고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시인 허연이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 제목이다.

첫 시집 출간 후 10년 가까이 시를 쓰지 못했다는 허연은 어느 날 문득 '시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란 생각을 떠올렸고, 이번 시집은 바로 그 갑작스러우면서도 당연한 깨달음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1991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등단한 허 시인은 생의 기쁨보다는 슬픔, 삶의 희망보다는 절망을 노래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축축하지만 예민한 시의 촉수를 뻗어 세상과 인간의 상처와 아픔을 감지해낸 작가. 그런 생채기를 더듬으며 분명 그도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허연의 시는 어둡지만 어둡지만은 아니하고, 염세적이나 염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런 역설은 앞서 언급했듯 그가 누구보다 시를 진실한 태도로 대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출구 없는 캄캄한 세상 탓에 엎드려 통곡하지만, 그 울음이 그치면 한 조각 남아있을지 모를 빛을 찾아가는 사람. 맞다 그런 게 시인이다.

출근을 하면서 그날을 생각합니다. 낙타가 고래였고, 고래가 낙타였다는 시절을 생각합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바다로 걸어 들어갔던 그날을. 그들이 왜 헤어졌고 다시 만나지 못했는지. 수천만 년 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수천만 년 전' 중 일부.

무서운 속도로 닥쳐온 2008년 가을과 수천만 년 전 전설의 시대를 오가며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어두움과 염세를 탐구하고 있는 허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새 시집이 나온 것을 축하한다"고, "당신에게 시는 무엇이냐"고, "왜 밝고 환한 문장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래는 그가 보내온 답변이다. 더하거나 빼지 않고 모두 공개한다. 허 시인이 보내온 시처럼 말갛게 슬픈 문장을 다시 한번 읽으며 혼잣말로 이런 탄식을 했음도 고백한다.

'아, 언제쯤이면 세상이 시인에게도 웃음과 행복을 허락할까?'

시인의 반문, 인간이 찬양할만한 존재인가?

-정말 오랜만에 시를 통해 사람들을 만났다. 그간 시를 쓰지 못하거나, 쓰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는지? 그게 아니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쓰고 있었던 것인지.
"첫 시집을 내고 한 8년 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직장생활하면서 많이 바빠졌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에서 시를 쓸 수가 없었다. 모든 걸 투여하지 않은 시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시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는 거, 웃는 거, 우는 거, 싫어하고 좋아하는 거. 이런 거를 다 시에게서 배웠는데 시를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내 자신이 시정잡배라는 걸 깨달았다. 20대 때 나는 사실 내가 그래도 평범치 않은 인간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는 시정잡배였다. 그래서 시작했다. 시정잡배의 시를 쓰자. 시 쓰는 시정잡배가 되고 싶었다."


-늘상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신문사 기자)으로 산다. 시를 발상하고, 익혀내는 시간이 모자랄 듯도 하다. 언제 시를 쓰는 건가? 새벽잠 혹은, 점심시간을 줄이고 포기하면서 쓰는 것인지.

"원래 사람만나는 걸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시를 쓰면서 사람 만나는 시간이 더 줄었다.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할 때, 시인의 마음을 다시 찾는데 2년 정도 걸렸다. 시는 주로 밤에 쓴다. 물론 낮에도 시 생각을 많이 한다."

 허연의 두번째 시집.
 허연의 두번째 시집.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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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곳곳에서 보여지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볼 때 김수영의 몇몇 작품과 당신의 시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시를 시작하던 무렵 영향을 받거나 흠모한 작가가 있는지.
"김수영을 좋아했다. 에즈라 파운드도 좋아했고. 난 서울 태생이라 토속적인 시를 쓰지 못한다. 한국의 시인들은 대부분 토속적이다. 고향, 자연, 이런 거 난 잘 모른다. 그래서 김수영이 좋다. 도시적이면서 인간 객체를 중시하는. 김종삼은 타고난 예술지상주의자라 좋다. 인과관계 따지지 않는 예술 그 자체로 고혹적이었다.

사실 내가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건 그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모딜리아니, 일리야 레핀, 에드워드 호퍼, 권진규, 박길웅, 손상기… 뭐 이런 사람들의 그림이 내게는 한 편 한 편이 시였고 전범이었다."

-‘어두운 세계인식’이 당신 작품의 한 축이라 보여진다. 시인이 즐거이 볼 수 있을 만큼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뭘까?
"난 인간을 찬양하는 시를 싫어한다. 도대체 인간(나를 포함한)이 과연 찬양할 만한 존재인가. 과연 아름다운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입장과 욕심을 살 뿐이다. 그래서 내 시 속에서 세상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은 나약하고 나쁘다.

난 세계를 어둡게 본다기보다는 인간을 어둡게 본다. 인간은 하나의 짐승일 뿐이다. 다른 짐승과 차이가 있다면 겁이 더 많고,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뿐이다. 난 앞으로도 인간을 찬양하고 싶지는 않다." 

외마디처럼 차갑고, 무감각한 단순한 시를...

-작품을 쓸 때 단번에 일필휘지 하는 편인가, 그게 아니면 수십 번 퇴고하며 쓰는지. 당신의 스타일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쓰면서 고치지는 않는다. 머릿속에서 고친다. 천성적으로 메모나 정리를 못하는 성정이라 그렇다. 머릿속에서 모든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자신이 생기면 옮긴다. 써 놓은 시를 고친 경우는 거의 없다. 단번에 나오지 않으면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다."

-당신은 당신의 시를 통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세상과 인간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인지.
"사람들에게 섬뜩하고 싶다. 미친 듯이 달려가던 사람들이 문득 돌아다 봤을 때 섬뜩한 그런 사람, 그런 시이고 싶다. 시는 패배했다. 사람들은 시를 모르고 시를 읽지 않는다. 그래도 저 뒤에서 쓰는 놈이 있다. 다른 기차에 올라탔지만, 기차 밖에서 기차를 노려보는 놈이 있다. 그게 나이고 싶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통해 차창룡은 시인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허무를 일찌감치 알았지만, 어찌할 것인지 모르거나 관심 없는 자'라고.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시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시인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한마디를 찾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견자(見者)다. 사회적이지 못하고, 연민덩어리이고, 늘 밖에 있다. 시인은 밖에 있는 자다. 자기만의 공화국을 가진 밖에 있는 자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십수 년 전 첫 시집과 이번 시집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뭐라고 느끼는지. 시간이란 단순히 사람을 ‘늙게만’ 만드는 건 아니지 않은가.
"첫 시집은 '세상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는 심정으로 썼다' 이번 시집은 '내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는 심정으로 썼다'. 첫 시집이 분노라면, 이번 시집은 자백이다."

-우매한 질문이다. 아직도 시 혹은, 시인이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시인은 생산성 없는 일을 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 생산성 없음이 생산성에 목매어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는 것이다. 시는 태생적으로 자본과 유리되어 있다. 그래서 초라하고, 또 그래서 위대하다."

-내 경우 당신의 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를 ‘고독’과 ‘비관’ 그리고, ‘차가움’이라 포착했다. 당신 시에선 왜 '따스함'이나 '세상과의 화해'를 위한 제스처가 보이지 않는 건지.
"난 나에게 따뜻하지 않다. 난 원래 눈물도 많고, 연민도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다치기 싫어서 어느 날 따뜻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따뜻하지 않으려면 나에게 먼저 차가워야 했다. 도대체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 그때그때의 유희는 있겠지만… 세상은 모두가 모두를 괴롭히는 전쟁터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다. 서로 서로 잘 살겠다고 괴롭히는 데 행복한 놈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앞으로도 시를 쓸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왜냐, 시인이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므로. 앞으로 당신 시의 지향이나 색채가 바뀔 가능성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미래엔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더 단순한 시를 쓰고 싶다. 외마디 같이 차갑고 무감각한."


불온한 검은 피

허연 지음, 민음사(2014)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지음, 민음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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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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