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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밤새 싸르륵싸르륵 눈이 내려 아침에 잠에서 깨니 온 세상이 순백으로 바뀌어 시야를 밝게 한다. 11월 말까지만 해도 날씨가 포근해 양지쪽에서는 몇몇 철쭉과 개나리, 벚꽃들이 철없이 꽃을 피워대더니, 12월에 들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듯 갑자기 겨울로 돌변해 기온이 급강하하고 눈발이 잦다.

어릴 적 무지개를 쫒던 소년처럼 설경에 이끌려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으로 승용차를 산장에 세워두고 아내와 함께 무등에 올랐다. 무등산국립공원 원효분소를 가로질러 줄지어 선 상가들은 엄동에 꽁꽁 언 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장 계곡의 경쾌한 물소리를 뒤로하고 꼬막재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산행길로 접어들었다.

진눈개비 흩날리는 숲 사이로 인적이 드물어 텅 빈 적막이 겨울의 고요에 잠겼다. 뽀드득뽀드득 발아래 밟히는 눈의 보드라움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듯 몸과 마음은 가볍고 상쾌하다. 간간이 숲속을 지나는 바람에 나무위에서 쏟아지는 눈 더미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깰 뿐 온 산은 계절 속에 침잠되어 있다.

눈 덮인 겨울 숲 잎을 떨군 채 얼기설기 엉켜있는 나뭇가지 위로 눈이 쌓여 겨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한다.
▲ 눈 덮인 겨울 숲 잎을 떨군 채 얼기설기 엉켜있는 나뭇가지 위로 눈이 쌓여 겨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한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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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의 풍요 혹은 불타는 사랑을 떠나보낸 채 가지마다 눈을 이고 비탈에 서서 삭풍을 견디며 이 겨울을 나는 나무들의 의연한 자태가 나그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2㎞남짓 걸어 꼬막제에 이르니 이마와 등에 땀이 밴다. 꼬막재를 넘으면 완만한 내리막이다. 오르고 내리는 길이 지나치게 굴곡지지 않아서 좋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원만하게 이어진다면 오즉 좋으련만,

돌이켜보면 올 한해도 개인적으로 많은 희로애락을 겪으며 쉬임없이 바쁘게 달려온 듯한데,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후회와 회한만이 마음 언저리에 동그란 멍으로 남는다. 연말이면 늘 새해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오간데 없고 빈털터리가 되어 인생에서 발견한 작은 만족감마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차츰 김이 빠지고 따분한 것이 되어간다.

내 삶 전체를 가늠해보면 어느덧 가을 깊숙이에 들어선듯한데, 어디에서 인생의 참 기쁨과 살아가는 근원을 찾아야 하는지…,

우리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들고 기쁨으로 넘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감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가. 하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분명한 이유는 사랑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임을 체득해 가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눈꽃나무 신선대 입구에 눈꽃을 피운 겨울나무들의 우아한 자태가 몽환적이다.
▲ 눈꽃나무 신선대 입구에 눈꽃을 피운 겨울나무들의 우아한 자태가 몽환적이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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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재에서 다시 2㎞정도를 더 가면 억새평전이다. 눈 덮인 억새밭 너머로 멀리 신선대가 홀로 외롭다. 무등산 북사면 가파른 능선에 펼쳐진 관목 숲에는 눈꽃이 피어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눈 속으로 끊긴 듯 이어지는 길은 숲 사이 눈길을 헤치고 규봉암에 닿는다. 가볍던 발걸음도 차츰 무거워지고 체내에 비축된 에너지가 소진될 즈음 무등산 동남쪽 해발 1100m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규봉암에 들어섰다.

암자 마당에 돌돌돌 여린 흐름을 이어가는 석간수로 갈증을 적신다. 폐부 깊숙이 싸늘한 기운이 전해져 지친 몸을 깨친다. 산 아래로 아스라이 화순 이서 영평들녘이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동복댐이 이서적벽을 안고 그림처럼 앉아있다. 실물인지 그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진경산수가 오래도록 눈길을 잡는다.

규봉암 요사 등산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규봉암 요사채가 꽁꽁언 채 겨울을 나고 있다.
▲ 규봉암 요사 등산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규봉암 요사채가 꽁꽁언 채 겨울을 나고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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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묻힌 너덜 등산로를 어렵게 밟아 장불재에 도착했을 때는 나도 아내도 굶주린 노루처럼 많이 지치고 허기져 있었다. 눈 덮인 산속을 7.3㎞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쉼터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우고 따뜻한 차까지 곁들이니 조금은 살 것 같다. 거친 바람에 중무장을 한 산객들이 오르고 혹은 내리느라 분주하다. 옷깃을 여미고 곧바로 군사도로 쪽으로 하산길을 택했다.

   일어서야겠다. 이젠,
   깨어있는 웃음으로
   도처에 몸부림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들의 고달픈 영토는
   골고다의 언덕이다

   눈물이었던 것
   고통이었던 것
   기쁨이 아닌 것들을
   언덕위에 묻어두고
   내게 소중한
   우리에게 소중한
   사랑을 가꾸자

자꾸 꺾이는 관절을 눈밭에서 풀어가며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내 인생의 후반부도 이렇게 눈길을 걷듯 주위를 살피고 작은 것에 사랑을 나누며 조심조심 걸어야 하리라. 갑오년 한해도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등 대형사고로 얼룩진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해다. 을미년 새해에는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며 약자를 배려하는 그런 사회이기를 기대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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