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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울산 반구대 암각화 3D 계측
 울산 반구대 암각화 3D 계측
ⓒ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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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에 온 것들은 모두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 기록하지 못하면 바람과 돌, 물이 대신 기록한다. 흔적은 스스로 퇴적하여 역사가 되고, 그렇게 퇴적된 역사는 유산이 된다. 우리 주변의 무수한 자연유산, 문화유산 등은 오래 전 흔적이 보내는 일종의 타전이다. 표피만 보고 취하지 마라는, 겉멋에 취해 심층을 포기하지 마라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알아보기 위해 옛 기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래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岩刻畫)다. 반구대 암각화 제작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 3500년 전인 신석기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반구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몇몇 고래의 종류를 특정하기도 했다. 형태상으로 봤을 때 반구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와 범고래, 참돌고래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를 잡는 배와 고래를 쏠 때 쓰는 도구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捕鯨) 관련 기록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를 근거로 몇몇 연구자들은 우리 민족이 상고대(上古代)부터 포경을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 기록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여러 옛 문헌에는 고래잡이와 관련한 이렇다 할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선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에는 고래 관련 기록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고래가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고구려 민중왕(閔中王) 4년(서기 47년)이다.

"동해인(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왕에게 바칠 정도로 매우 귀한 선물로 고래눈이었던 것이다. 서기 288년에도 고래눈을 왕에게 바친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서천왕에게 "해곡(海谷)의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다"면서 "그 눈알은 밤이 되면 밝은 빛을 발한다"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고래는 귀한 선물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1419년 음력 8월 22일(세종 1년) 자는 "상왕이 내시 최한을 보내어, 황엄에게 흰 숫돌과 고래수염을 선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폭군의 기행을 빗댄 사례에 고래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에서다.

연산군 즉위 5년이었던 1499년 9월 2일(음력) 연산군은 "흰 고래수염을 대궐에 들이게" 했다. 세종대왕도 신하들에게 고래수염을 선물로 내린 적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이듬해인 1500년 3월 11일(음력)에 연산군은 "경기 감사에게 돌고래·바다·자라 등을 산 채로 잡아 올리게 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급기야 연산군은 1505년 8월 19일(음력) 전라도의 바다에 면한 고을들에 명하여 고래를 사로잡아 오라고 명한다. 산 고래를 잡아 진상하지 못하자 연산군은 "부안 현감 원근례는 잔약해서 잘 보살피지 못했다"며 그를 파직한다. 고래를 잡을 수 있는데 못 잡았다면 무능하다는 이유로 파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고래잡이를 하는 포경국가였을까?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권 표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권 표지.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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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기록은 조선이 고래잡이를 하는 포경국가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서유구가 순조 6년인 1806년부터 헌종 8년인 1842년까지 36년간 동안 집필한 조선의 백과사전 격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서유구는 이 책 '전어지(佃漁志)'편 '고래를 작살로 잡는 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나라 어부들 중에는 고래를 잡을 수 있는 자가 없다. 다만 고래가 스스로 죽어 해변에 떠오른 경우를 만나면 관아에서는 반드시 많은 장정들을 내어 칼, 도끼, 자귀를 가지고 고래의 지느러미와 껍질, 고기를 거두어 말에 싣고 사람이 날라 며칠이 되도록 다 없어지지 않는다.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그 가치가 무려 천금이다. 그러나 이익이 모두 관아로 들어가고 어부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래를 창으로 찔러 잡는 방법을 배우려 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조선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록에 예민한 나라였다. 포경이 한반도 근해에서 대대로 이어진 어로활동이었다면 이와 관련한 기록이 어디에든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여러 기록물 어디에도 일상적인 어로활동을 통해 고래를 잡았다(捕鯨)는 기록은 없다. 다만 고래의 눈이나 수염을 선물했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유구가 "우리나라 어부들 중에는 고래를 잡을 수 있는 자가 없다"라고 단언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포경을 어로활동으로 하는 '포경 국가'가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되레 조선에서 고래는, 떠밀려온 고래를 두고도 그 이익은 모두 관료들이 차지해버려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보다 못한 '민폐(民弊)'였을 뿐이다. 1850년대 오주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규경은 실학자였던 조부 이덕무(李德懋, 1741년~1793년)의 학문을 계승하여 그 영역을 넓힌 '백과전서파'로 평가받는 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이 조선과 청나라(1616년~1912년)의 여러 책들의 내용을 1400여 항목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고래가 잡히거나 표류하고 떠돌다 죽은 고래가 얻으면 관에서 이익을 독차지하고 주민에게는 오히려 민폐만 끼치므로 자기 마을에 고래가 떠밀려 오면 여럿이 힘을 모아 바다에 도로 밀어 넣어 버린다."

떠밀려 오면 바다에 도로 밀어 넣어버릴 정도로 '민폐' 취급당하던 고래. '민폐 고래'는 조선이 퇴락의 징후가 짙어지던 고종 즉위 시절에는 '간여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되기도 했다.
 
1887년 3월 3일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가 "죽은 고래가 바다에 떠다니는 일"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게 문서로 숙의한다. 동래감리서는 "우리 백성은 원래 고래잡이에 능하지 않아 죽어 떠다니는 것을 얻으면 먼저 선원(船民)이 나누어 취한 후 본영(本營)에 알리므로 체포하여 단속할 수 없다"라고 보고한다.

이에 수군절도사는 4일 "우리 백성(我民) 중에 포경(捕鯨)하는 자가 없고, 죽은 고래가 바다에 떠다니는 것이 있으면 본영(水營)에서 주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지금 도착한 보고에서 밝힌 관칙에 따라 이후에는 간여하지 않겠다"라고 응답한다.

조선이 포경국가가 아니었음은 수군절도사의 "우리 백성 중에 포경하는 자가 없다"라는 회신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즉 기록상으로 보면 최소한 19세기 후반까지 조선은 포경을 전업으로 하는 어민이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은 고래가 떠밀려 오면 수군절도사가 나서서 그 처리를 주관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미 보고 받았으니 더 이상 간여하지 않겠다고 사안을 정리해 버렸다는 것이다.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그 가치가 무려 천금"이라던 조선이, '바다의 로또처럼' 둥둥 떠다니는 고래를 보고도 귀찮은 듯 "간여하지 않겠다"고 하다니...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죽은 고래를 발견한 뱃사람들은 이미 고기 몇 점 얻었으니 고래가 남길 이윤 배분 구조에서는 제외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익을 독차지하던 관'의 이익배분 구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때는 조선 말엽이다. 내 땅이 내 땅이 아니고, 내 바다가 내 바다가 아닌 시절이었다. 한반도 근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흑산도 고래공원 가는 길에 사진. 1980년대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된 고래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흑산도 고래공원 가는 길에 사진. 1980년대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된 고래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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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기사 '흑산바다는 고래바다였다'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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