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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병 하나를 버렸다. 공동주택 앞에 비치되어 있는 분리수거함 중 페트병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알맞게 넣었다. 누군가가 플라스틱, 비닐, 종이 등을 마구잡이로 버린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약속 시간에 맞추느라 내 갈 길을 갔다. 

돌아서자마자 이웃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실 뿐 아니라 틈만 나면 그것을 강조하시는 분이다. 인사를 하고 가는데, 괜히 뒷통수가 따갑다. 설마 무분별하게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나로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 아주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신데도 어쩐지 개운치 못하다. 

사소한 오해도 신경이 쓰인다. 남이 한 실수를 고쳐 놓고 가는 좋은 사람도 못 되면서 실제의 나보다 더 나쁘게 보이고 싶진 않으니, 이것도 참 낯부끄러운 욕심이다. 작은 오해만 생겨도 억울함에 속이 답답해진다. 

이런 내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그 삶의 풍파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조총련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그 단체와 엮인 사람이 있다. 울릉도에 가본 적도 없는데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있다. 온 가족이 일가족 간첩단으로 묶여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억울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불공정한 일은 어째서 발생하는가.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폭군처럼 들이닥칠 때 일상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그 폐허 위에서 또 다가오는 하루를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힘은 무엇인가. '왜 하필 나일까'라는 물음의 도돌이표를 어떻게 안고 사는가, 그런 이야기를 담아냈다."(7-8p)
 
 <폭력과 존엄 사이> 책표지
 <폭력과 존엄 사이> 책표지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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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존엄 사이>는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에 관한 기록이다. 책을 기획한 '지금여기에'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진실을 밝히고 그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비영리단체라고 한다. 7인의 피해자를 인터뷰 하고 책을 쓴 은유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그 기억들을 충실히 기록했다.

저자는 이들의 삶이 노동, 여성, 빈곤, 노인 문제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도 맞물려 있음을 짚는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슬픔만으로 채워진 책은 아니다. 결코 작지 않은 승리가 담겼다. 기획의도를 통해 밝히듯, 이들이 무죄를 밝히고 존엄을 회복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할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해방둥이 김순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은 일찌감치 중단되었고, 부모님이 정한 곳에 시집을 갔다. 삼남매를 낳고 살다가 바람난 남편에 의해 반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살기 위해 식모살이도 하고, 김, 미역, 화장품 등을 보부상처럼 실어나르며 팔다가 보험 설계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11년 전 스쳐 지나간 일로 간첩으로 엮인다. 그녀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진술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일가족 간첩사건은 완성되어 있었다. 일가족 서른 명 중 열두 명이 졸지에 고정간첩단이 된다. 그녀가 살기 위해 택했던 생업은 간첩활동을 위한 자유로운 직업으로 매도된다. 

그녀는 5년을 복역하고 석방되지만, 아버지는 진작 사형이 집행되었다. 동생들은 무기 징역, 징역 10년, 징역 7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녀의 감옥살이도 끝이 아니다. 신원조회에 걸려 일을 구하기도 힘들고, 형사들은 그녀를 쫓아다닌다. 

무일푼에 자유도 없는 삶. 눈물이 쉴 새 없이 솟구치지만 김순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을 알게 되고, 외손녀를 업은 채 집회에 다니며,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린다. 간첩으로 몰린 지 삼십여 년 만인 2013년,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확정받는다. 

힘든 싸움 끝에 승리했으니 이제는 편히 쉴 법도 하지만, 오히려 할 일이 많아졌다고 하는 그녀다. 김순자는 말한다. 자신의 억울함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세상을 알게 되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그토록 큰 고통을 겪고도 자신의 아픔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명하는 그녀의 모습에, 명치가 아려온다.
 
"예전엔 우리 사건을 생각하고 맨날 눈물이 나서 울었는데 세월호를 생각하니 너무너무 불쌍하고. 울고 싶으면 세월호만 생각하면 눈물 나. (중략)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나요. 겉으로 보이게 생체 실험은 안 하지만 여전히 힘에 눌려 살고 있어요. 힘없는 약자들은 말없이 죽어가고 있어요. 세월호, 위안부, 간첩사건... 다 아픈 거예요. 방법이 달랐을 뿐이지."(p48)

어떻게 죄없는 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할 수 있었는지, 혼절한 그들이 죽지만은 않도록 살려둔 의사들은 어떤 심정이었는지, "모든 것이 애매합니다만 사형에 처해주십시오."(p147)라고 한 검사, 그들이 무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징역과 사형을 선고한 판사들은 꼭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절망스러운 일 투성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들의 삶을 뒤흔든 것도 사람이지만, 이들을 버티게 해준 것 또한 사람이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봉사를 감옥에서 하게 되고 사람들을 돕는 낙으로 징역살이를 버틴 이가 있다.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한국을 떠났다가, 귀국해 잡혀들어간 감옥에서 정 주고받을 벗을 사귀게 된 이도 있다.
 
"이는 감옥도 살 만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장소의 여건보다 관계의 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궁궐 같은 집이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결백함을 알아주는 동료가 있고, 말이 통하는 벗과 책이 있고, 내가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때 그들은 감옥이지만 살 만하다고 느꼈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 남을 돕기에 적당한 조건, 더불어 사는 이상적 관계가 따로 있지 않음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하나씩 시도하고 배워가는 게 삶의 기술임을 '보안수' 어르신들은 몸소 보여주었다."(16-17p)

'폭력과 존엄 사이'를 오간 이들은 국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승리자다. 그들이 지켜낸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박수를 보낸다.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 이들을 만난 독자가 삶에 기운을 낸다면, 이 또한 폭력에 저항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과정이 되리라 믿는다.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이들의 삶에 행여 조금의 누라도 될까 두려워, 리뷰를 망설였다. 이들의 아픔을 통해 내 삶에 용기를 얻는다면 그 또한 염치없는 일 같았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슴에 품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화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 부끄러운 글을 내놓는다.

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

은유 지음, 지금여기에 기획, 오월의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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