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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고을 광주’의 발원지 서석대. 백여 년 전에 서석대에 올랐던 육당 최남선은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 온 것 같다”라고 감상을 남겼다.
 ‘빛고을 광주’의 발원지 서석대. 백여 년 전에 서석대에 올랐던 육당 최남선은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 온 것 같다”라고 감상을 남겼다.
ⓒ 문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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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를 핑계로 대부분 도시의 삶은 계절의 순환을 실감하지 못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으로 계절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고개 들어 보면 손에 잡힐 듯 파아란 가을 하늘이 다가온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계절, 늦가을이다.

위대했던 지난 여름, 무성했던 잎새들은 어느새 노랗고 붉게 물들어가고 그다음은 보나마나 뻔하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추풍낙엽 되어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차가운 거리를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잎새의 '나고 멸함이 이렇듯 허무하고 쓸쓸하다'고 온몸으로 시위하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도 잎새의 일생과 다름 아니다. 만추절경(晩秋絶景)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진다. 짧아서 아름다운 계절,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이 저만치 가고 있다. 빡빡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있는 무등산의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산이 불탄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무등을 지나가고 있다. 저 멀리 원효사가 까마득히 보이고 골짜기 사이로 옛길은 이어진다.
 ‘산이 불탄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무등을 지나가고 있다. 저 멀리 원효사가 까마득히 보이고 골짜기 사이로 옛길은 이어진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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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에 나를 잊는 '무아지경 길'

무등산에는 수많은 길이 있고 그 길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하여 있다. 그 많은 길들 중에서 특별한 길이 있다. 광주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길, '무등산 옛길'이다.

무등산 옛길은 3개 구간으로 나뉜다. 1구간은 광주 도심에서 시작해 도로를 따라 원효사에 닿는 구간이다. 오르막이 거의 없는 편하게 걷는 길이다. 2구간은 원효사에서 무등산 정상, 서석대까지 이어지는 코스다.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길이다. 3구간은 장원봉 삼거리에서 환벽당까지 이어진다. 광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그중에서도 무등산의 속살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이 2구간이다. 신라 말기에 창건한 천년고찰, 원효사에서 다시 시작된 옛길 2구간은 초입부터 특별하다. 원래 군부대가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이 길은 자연 생태가 잘 보전되어 있다. 수백 년 넘게 아무도 손대지 않아 거목이 된 나무들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가을나무들이 토해내는 색들의 향연이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사실 나무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앓이가 붉다 못해 검붉다
 가을나무들이 토해내는 색들의 향연이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사실 나무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앓이가 붉다 못해 검붉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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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열고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에 마음을 내맡기고 걸으면 나를 잊는 경지에 이를 정도여서 '무아지경 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길 양옆 단풍 잎새 사이로 따스하게 쏟아지는 만추의 햇살은 추색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며 또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가을이 토해내는 색들의 향연이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속된 세상에서 선계로 들어선 느낌이다.
 
 성글어진 단풍 사이로 쏟아지는 만추의 햇살은 또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낸다
 성글어진 단풍 사이로 쏟아지는 만추의 햇살은 또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낸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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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하고 떨어지는 상수리 한 알이 고요한 숲 속에 우레와 같은 파장을 일으키며 긴 공명으로 다가온다. 무등산이 차려준 자연의 성찬에 경의를 표하며 길 이름대로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든다.

나라 위해 싸웠지만, 나라는 그를...

봄날의 숲이 연초록의 수채화라면 가을의 숲은 다채롭게 각자의 색깔이 드러나는 유화에 가깝다. 울긋불긋 짙은 가을빛으로 채색되어가는 무등의 가을은 어쩌자고 이리도 곱게 빚어지고 있는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무등을 관통하고 있다.
 
 봄날의 숲이 연초록의 수채화라면 가을의 숲은 다채롭게 각자의 색깔이 드러나는 유화에 가깝다.
 봄날의 숲이 연초록의 수채화라면 가을의 숲은 다채롭게 각자의 색깔이 드러나는 유화에 가깝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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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가을 속을 걷는 동안 길은 '제철유적지'와 '주검동'에 이른다. 여기에서는 잠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 장군이 무기를 만들고 의병들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무등산 장불동(長佛洞)에서 철이 생산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을 말한다. 지금도 유적지 곳곳에선 당시 무기 등을 제작하면서 나온 '쇠 찌꺼기'를 볼 수 있다.
 
 호남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었던 쇠 가마터, 제철 유적지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1호
 호남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었던 쇠 가마터, 제철 유적지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1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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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유적지를 조금 벗어나자 '만력계사(萬曆癸巳) 의병대장(義兵大將) 김충장공(金忠壯公) 주검동(鑄劍洞)'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큰 바위와 마주한다. 주검동은 김덕령 장군이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칼을 주조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 무등산 자락 충효동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호남 의병장 김덕령은 억울하게 죽었다. 김덕령은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성에서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 장군의 명을 받고 진압하러 가던 중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일로 반란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끝내 죽어야 했다.
 
 만력계사(萬曆癸巳) 의병대장(義兵大將) 김충장공(金忠壯公) 주검동(鑄劍洞) 김덕령 장군이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칼을 주조한 곳이다
 만력계사(萬曆癸巳) 의병대장(義兵大將) 김충장공(金忠壯公) 주검동(鑄劍洞) 김덕령 장군이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칼을 주조한 곳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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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류성룡은 김덕령의 죄를 신중히 따질 것을 간했으나, 이순신 장군의 탄핵에 앞장섰던 서인(西人)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김덕령은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 옥사했다. 향년 30세의 청년이었다. 나라 위해 싸웠지만 나라는 그를 죽였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된 김덕령 장군은 죽음을 직감하고 옥중에서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시조 한 수로 토해낸다. <춘산곡(春山曲)>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읊어 본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광주 도심 사직공원에 세워진 장군의 <춘산곡> 시비
 광주 도심 사직공원에 세워진 장군의 <춘산곡> 시비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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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도심 사직공원에는 장군의 <춘산곡> 시비가 세워져 있고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충장로(忠壯路)'는 그를 기리는 도로명이다. 옛길 1구간에 장군을 배향하는 충장사가 있다.

은빛 억새 일렁이는 '중봉'과 빛고을 광주의 발원지 '서석대'

길은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산죽 사이를 지나, 옛날 나무꾼들이 땔감과 숯을 구워 나르며 거친 숨을 잠시 골랐던 자연 쉼터로 길손을 안내한다. 나무꾼들과 60년대 군인들이 물품을 운반하면서 목을 축였던 물통거리의 옛 샘터는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다.

오르막길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앉아서 쉬기 딱 좋은 평평한 바위를 만난다. 김덕령 장군의 누이가 원효 계곡에서 치마로 감싸 안아 옮겨 놓았다는 '치마바위'다. 산행객들이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막걸리 이름이 '무등산 막걸리'다. 참 특별하다. 광주 사람들의 무등산 사랑은.
 
 무등산 중봉. 가을 억새가 압권이다. 억새밭 사이를 S자로 가로지르는 탐방로는 여러 매체에 소개되면서 아름다운 가을길로 회자되고 있다. ‘사랑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멀리 무등의 정상 서석대가 보인다.
 무등산 중봉. 가을 억새가 압권이다. 억새밭 사이를 S자로 가로지르는 탐방로는 여러 매체에 소개되면서 아름다운 가을길로 회자되고 있다. ‘사랑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멀리 무등의 정상 서석대가 보인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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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단풍 터널을 지나고 성글어진 나뭇잎새 사이로 파란 하늘이 다가온다. 여릿여릿 다가오더니 일순간 시야가 확 트이고 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무등산의 중심을 잡고 있는 봉우리, 중봉(中峯)이다. 90년대 후반까지 주둔했던 군부대가 이전하고 생태복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서석대, 입석대와 함께 무등산의 명소 중의 한 곳이다.

중봉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가을 억새가 압권이다. 억새밭 사이를 S자로 가로지르는 탐방로는 여러 매체에 소개되면서 아름다운 가을길로 회자되고 있다. '사랑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한낮에 늦가을의 햇살을 머금고 은빛으로 일렁이는 억새는 해 질녘이 되면 황금물결이 되어 장관을 이룬다.
 
 서석대 전망대 밑에 연분홍의 구절초가 청초하게 피어 있다. 늦가을에 잠깐 피었다가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이라니...
 서석대 전망대 밑에 연분홍의 구절초가 청초하게 피어 있다. 늦가을에 잠깐 피었다가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이라니...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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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억새 물결을 뒤로하고 길은 다시 가파른 돌계단으로 접어들어 무등의 정상 서석대로 이어진다. 아무리 무등(無等)이라도 비경을 쉽게 보여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예고편을 보는 듯 조그만 기암괴석들과 조우한다.

느릿느릿 한 걸음 한 걸음 돌계단을 오르는 순간, 팝업창처럼 툭 튀어나와 눈앞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 거대한 수정병풍이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다. 한눈에 담을 수가 없다. 파란 하늘에 매달려 있는 돌기둥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처럼 위태롭다. 돌기둥 사이사이 아스라하게 매달려 있는 단풍은 오히려 애처롭다.

일찍이 백여 년 전에 서석대에 올랐던 육당 최남선은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 온 것 같다"라고 감상을 남겼다.
 
 무등산 정상 서석대. 뒤로 보이는 세 봉우리 천·지·인왕봉이 실제적인 무등산 정상(1,187m)이지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금단의 땅이다. 일 년에 서너 번씩 인심 쓰듯 개방해주고 있지만, 이제는 전향적으로 상시 개방을 고려해볼 때이다.
 무등산 정상 서석대. 뒤로 보이는 세 봉우리 천·지·인왕봉이 실제적인 무등산 정상(1,187m)이지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금단의 땅이다. 일 년에 서너 번씩 인심 쓰듯 개방해주고 있지만, 이제는 전향적으로 상시 개방을 고려해볼 때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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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차마 떨치고 조금 더 오르니 "무등산 옛길 전구간 완주를 축하합니다"라는 표지판이 산객들을 반긴다. 사실상 무등산의 정상 서석대 위로 올라선다. 광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만 그만한 봉우리들은 올망졸망 나란히 서서 서석을 향하고 있다. 모두가 무등(無等)이요, 모두가 일등(一等)이다.
 
 무등산에 포근히 안겨있는 빛고을 광주광역시 전경. 모두가 무등(無等)이고, 모두가 일등(一等)이다
 무등산에 포근히 안겨있는 빛고을 광주광역시 전경. 모두가 무등(無等)이고, 모두가 일등(一等)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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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