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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걷기에 아주 좋은 도시다. 어딜 가나 길이 곧고 평평하며 널찍한 인도가 따로 나 있다. 소르본대학 위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는 레스토랑 '와트(Watt)'의 차양 천막엔 "마시고, 먹고, 수다 떨고, 즐기고, 걷는다(boire, manger, bavarder, s'amuser, flâner)..."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플라네르(flâner)가 파리를 걷는 데 어울리는 단어다.

보통 '산책'으로 번역하지만 감정 중립적인 프롬나드(promenade)와 달리 플라네르는 영어의 스토롤(stroll)처럼 '한가로이 걷다', '어슬렁거리다'는 뜻으로 우리처럼 여기저기 구경하며 걷는 관광객에게 어울리는 단어다.

미술품 같고 유적 같은 파리의 건물들을 보면서 한가로이 걷고 있던 아빠가 '녹색길(La Coulée Verte)'을 한번 걸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이때 걷는 것은 '플라네르'가 아니라 '프롬나드'다. 그래서 '녹색길'의 원래 이름을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 즉 '초목(이 심어진) 산책로'로 붙였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아빠가 덧붙이셨다.

뉴욕 하이라인파크의 원조

'녹색길'의 풀 네임은 '쿨레 베르트 르네-뒤몽(Coulée verte René-Dumont)' 곧 '르네-뒤몽 녹색길'이다. 위치는 이미 가본 일이 있는 12구역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바스티유역에서 내린 뒤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도메닐가(Avenue Daumesnil)를 만나게 된다. 그 거리와 나란히 뻗은 고가 산책로가 바로 녹색길이다.
 
 녹색길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녹색길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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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바스티유 부근에서 시작되는 녹색길은 파리 동남쪽 외곽의 벵센느 숲(Bois de Vincennes)까지 총 4.5㎞인데, 도심의 건물들 사이로 놓인 고가 산책로 1.5㎞ 정도를 왕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세우고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입구에 파리 시청에서 세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개를 데리고 걸어도 안 되고, 롤러스케이트나 보드를 타도 안 되며, 자전거를 타도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오직 사람의 산책만 허용되는 길이다. 과연 여기저기 걷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책로의 모양은 다양했다. 장미덩굴이나 아칸서스 또는 라벤더가 심어진 꽃길 형태도 있고, 등나무나 담쟁이덩굴로 덮인 아치형 길도 있으며, 대나무, 단풍나무, 살구나무, 라임나무 등의 가로수가 심어진 길도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육교 위에 널빤지를 깐 길도 있으며, 잔디가 심어진 구름다리나 적교형 길 또는 터널 길도 있었다.
 
 뉴욕 하이라인이나 서울로의 원조격인 파리의 녹색길
 뉴욕 하이라인이나 서울로의 원조격인 파리의 녹색길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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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m 높이의 공중에 들어 올려진 녹색길은 본래 버려진 철도였다. 바스티유광장에서 파리 동남쪽에 있는 마렌느 셍모르까지 철도가 놓인 것은 1859년이었고, 이 노선이 폐쇄된 것은 1969년이었다.

그로부터 도심의 흉물로 남게 된 폐철도를 처리하기 위해 여러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수년간의 토론 끝에 얻은 결론은 버려진 철도를 고가공원으로 재생시키자는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고가 산책로였다. 그래서 초기 이름은 '초목 산책로' 곧 '프롬나드 플랑테'였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94년 완공했다.

말없이 걷고 계시던 아빠가 입을 여셨다.

"마르코 폴로라고 들어봤지?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17년 동안 관리생활을 했던 베네치아 사람. 그가 고향에 돌아올 때 가져온 물건 가운데는 국수가 있었다. 이 국수를 응용해서 만든 게 마카로니야."
"그래요?"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일단은 그렇게 보신다면서 아빠는 그 비슷한 사례로 화약을 드셨다. 원래는 악귀를 쫓기 위한 폭죽으로 사용되던 건데, 서양에 넘어가선 총과 대포가 되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녹색길을 보니 뉴욕의 '하이라인파크(High Line Park)'와 서울역 앞의 '서울로7017'이 생각난다고 하셨다.
 

"아, 알겠어요. 뉴욕 하이라인파크가 파리의 녹색길을 모방하고, 서울로7017이 뉴욕 하이라인파크를 모방했다는 얘기죠?"
"그래,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 서로 베끼고 모방하면서 발전하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문명은 전달이다."

  
  다양한 형태의 산책로로 구성된 파리의 녹색길
  다양한 형태의 산책로로 구성된 파리의 녹색길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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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려진 철도를 산책로로 만든 뉴욕의 하이라인을 보고 감탄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파리의 녹색길을 모방한 거였다는 사실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역시 파리는 만만치 않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녹색길을 걷던 아빠는 파리 시내 어디라도 블록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쓰레기통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쓰레기통이라기보다는 둥근 철사에 끼운 비닐봉투였다. 녹색길과 더불어 거리의 비닐 쓰레기통이 파리의 재치를 느끼게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던져 넣기도 쉽고 다 차면 청소부가 거둬가기도 쉽고.
  
 파리 시내 어디라도 매 블록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죽 설치되어 있는 간편한 쓰레기통
 파리 시내 어디라도 매 블록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죽 설치되어 있는 간편한 쓰레기통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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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파리의 재치를 느끼게 한 것이 또 하나 있어요. 화장실이요. 보통은 플러시를 누르는 지렛대나 버튼이 변기 뒤쪽에 달려 있는데 이곳은 플러쉬 버튼이 사람 허리 높이의 깨끗한 벽에 따로 설치되어 있어요. 팔만 뻗으면 편히 물을 내릴 수 있도록. 그것도 대소변 따로따로. 거리의 쓰레기통이나 화장실의 플러쉬 단추도 언젠간 서울에 전해지겠죠?"
"그러지 않을까? 문명의 전달이란 관점에서."

 
 플러쉬 버튼이 사람 허리 높이의 깨끗한 벽에 따로 설치되어 있는 파리의 변기
 플러쉬 버튼이 사람 허리 높이의 깨끗한 벽에 따로 설치되어 있는 파리의 변기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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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 파리 여행의 소감이 어떠세요?"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있어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살았었다면, 파리는 '이동축제일'이니까, 어디를 가든 남은 일생 파리는 당신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eable feast)'."

"무슨 뜻이에요?"
"파리에 대한 추억은 크리스마스 같은 '고정축제일(immoveable feast)'처럼 정기적으로 나타나진 않더라도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이동축제일(moveable feast)'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당신의 삶 속에 불쑥 나타나게 될 거라는 그런 얘기다."


"헤밍웨이가 쓴 책 < A Moveable Feast >를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고 번역한 책이 있어 좀 의아했어요. 어떻게 날마다 축제가 있을 수 있나 하고. 날마다는 아니지만 이동축제일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생각나는 파리..."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온 아빠가 요즘 와서 느끼는 것은 인생 자체도 한번 뿐이지만 사실은 매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깨달음이다. 같은 사건, 같은 인물, 같은 환경, 같은 느낌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더라. 그래서 너와의 이번 여행이 아빠의 남은 삶 속에서 이동축제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는 어떠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드는 도시에요. 전 꼭 한번 다시 올 거예요."
"어떤 점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하더냐?"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두었던 글을 클릭했다.
 
파리의 뒷골목, 예술, 문학, 요리... 아니 프랑스의 문화 전반에 대해 당신이 들어온 그 화려한 신화들은 어떤 형태로 전달되었든 모두 진실일 것이다. 한때는 '누구나의 제2 조국(le deuxième pays de tout le monde)'이라고도 불리던 프랑스. 그 수도인 파리는 오늘도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도시이며 또 보고 나면 누구나 저마다의 형용사를 간직한 채 돌아가게 되는 곳이다. 지성과 사랑과 자유의 도시라던 세계인의 파리.

얼마쯤 감동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 나이 어린 세대에 속하고 있을 것이다. 간접적이나마 파리의 명성을 알고 있는 세대에게 있어서, 한 줄기 노스탤지어가 없을 수 없음은 아마도 '도시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파리에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에 프랑스인이 처음 만들어 내었던 섬세하고도 현란한 도시적 문명. 파리는 그 본바닥이었다.
 
"이건 뭐냐?"

아빠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으셨다. 39년 전 아빠가 파리를 방문하시고 나서 언론 매체에 발표하고 책으로 출간하셨던 글의 일부다. 일주일 동안 파리를 여행한 총체적 소감은 아빠가 느끼셨던 당시의 소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여행이란
 
 지성과 사랑과 자유의 도시인 파리, 보주광장의 오후풍경
 지성과 사랑과 자유의 도시인 파리, 보주광장의 오후풍경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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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난 네가 느낀 소감을 듣고 싶은 거다."
"파리는 아름답죠. 하지만 그런 상투적 표현을 넘어서는 뭔가 묘한 매력 같은 게 있어요. 사실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머릿속에 자크 프레베르의 시가 자꾸 떠올랐어요."

 
수천 년 수만 년도 Des milliers et des milliers d'années
충분친 않을 거야 Ne sauraient suffire
그 영원의 짧은 순간을 Pour dire
말하기에는 La petite seconde d'éternité
네가 내게 입 맞춘 Où tu m'as embrassé
내가 네게 입 맞춘 Où je t'ai embrassèe
어느 눈부신 겨울날 아침 Un matin dans la lumière de l'hiver
파리 몽수리 공원에서 Au parc Montsouris à Paris
파리에서 A Paris
지상에서 Sur la terre
우주의 한 별 위에서 La terre qui est un astre.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어떤 시점부터는 그 영원의 짧은 순간을 포착한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포착한 순간이란 새로운 생각과의 입맞춤이다. "발견의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Le véritable voyage de découverte ne consiste pas à chercher de nouveaux paysages, mais à avoir de nouveaux yeux)"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새로운 생각을 공급해주는 샘(泉)이고 삶의 자신감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인생은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책인데, 나는 너무 띄엄띄엄 읽어왔다는 점이다. 이제부터라도 찬찬히 읽어보자.

그런 각오와 다짐은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실타래같이 뒤엉켜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를 스트레스와 공허감으로부터 빠져나올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강력한 충전이다. 우주의 별인 지구 위에서, 지상에서, 파리에서, 파리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속도감 있게 축소돼 진주처럼 영롱해진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날 오후, 공항으로 달리는 우버 안에서 옆자리를 보니 아빠는 연일 계속된 강행군으로 피로하셨던지 깜빡 잠이 들어 계셨다. 어릴 때 부모는 아이들의 우주다. 하지만 내 우주였던 아빠는 이미 연로하셨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핑 눈물이 돈다.

차가 흔들리면서 무릎에 놓였던 아빠의 손이 떨어졌다. 그 손을 붙들어 무릎에 다시 올려놓았는데 아빠는 눈을 감은 채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의외로 따스하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여행 중에 가장 만나고 싶었던 '아빠'를 이미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차창으로 보이는 파리의 하늘은 오늘도 도착하던 날처럼 맑고 푸르렀다. 나는 나를 발견하고 아빠를 만나게 해준 파리에 작별인사를 고했다.

"Au revoir Paris(안녕, 파리)!"

덧붙이는 글 | '아빠와 함께 쓰는 파리여행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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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