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매일 같이 죽고 싶다고 호소하던 친구가 있었다. 제 의사와 무관하게, 아무런 잘못 하나 없이 직장을 잃게 되어 경제적인 힘듬과 심적인 고통을 동시에 맞닥뜨린 것이다. 당장의 생활비도 숨통을 조였고 풀 길 없는 억울함과 분노에 견딜 수 없어 했다. 이제 한참 지난 일이니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당시 우리는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났다. 웃으며 그녀와 헤어지고 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혼자가 된 그녀가 우울함을 호소하면, 나는 쉽게 절망했다. 애초부터 웃지 못할 때도 있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도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 앞에서, 내 위로의 무력함만을 깨달았다. 

다행히 일은 잘 풀렸고, 그녀는 곁에 있어준 내게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자문하곤 했다. 고백하건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 결심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는 자에게 나의 위로가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 또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이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우울에 잠식되고 있었다. 일상은 무너져버렸다. 내 생활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을 돌보기 전에 나를 먼저 돌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야 남도 돌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의 고통도, 내 절망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나는 너무도 뒤늦게, 나 역시 고마움을 표해야 할 사람이 퍽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의 내가 결국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이 고마움은 어찌 갚아야 할까.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책표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책표지
ⓒ 나무연필

관련사진보기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특별한 책이다. 순진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할 거라고, 우리 모두 노력하면 고통은 나눌 수 있다는 말을 할 거라고 예상하면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저자는 고통 그 자체의 원인이나 과정,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염려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 세계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어떤 말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혹은 소통하지 못하면서 누구와 세계를 짓고 또 누구와의 세계는 부수고 있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쓸 수 있는 언어로는 어떤 세계를 짓는 것이 가능한가. 혹 그 언어로 주변 세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수는 것만 가능한 것은 아닌가?"(p11)

저자의 표현 그대로, 고통에서는 고통을 겪는 이가 아닌, 고통이 주체다.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처음에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던 사람들도 그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지 않으면,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이상의 고통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지는 것이다.

결국 고통을 겪는 이는 자기에게 함몰되기 쉽다. 저자는 자기에게 함몰된 이가 잃어버리는 것이 응답으로서의 말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응답을 간절히 바라지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딜레마라는 것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내뱉게 된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p13)

이때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 있는 사람은 함께 위태로워진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말을 들어야 하고, 응답하더라도 그에 대한 상대의 응답은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통하지 못함으로써 파국을 맞기도 한다. 고통은 '곁'의 세계를 함께 파괴하는 것이다. 

고통을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다룰 때도 고통을 겪는 당사자의 실존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들은 신을 찾기도 하고, 동식물에 기대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더욱 고립시킬 뿐이다. 타인과 소통할 언어를 잃을수록 고통을 겪는 이는 더욱 깊은 우울과 외로움을 절감한다.  

고통에 직면해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차원의 집은 파괴된다. 사회적 차원의 집, '곁'과 함께 하는 집,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은 이 모든 세계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말할 수 없는 그 불가능에 맞서야 한다"(p99)고 말한다. 
 
"(이렇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에게는 무엇보다 언어가 필요하다. 끝이 보이지 않고 해봤자 아무 쓸모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 생각들을 견디고 버틸 수 있게 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분별해내어 자기를 탓하지 않되 자기의 힘을 기르고, 고통의 보편성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외로운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pp131-132)

그러나 고통에 잠식된 자,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울부짖을 '소리'만이 남은 자에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고통의 당사자로서는 말하기 위해 그 당사자의 '위치'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자신의 곁에 서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할 수 있고, 타인의 외로움을 알아볼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 내게 깊이 다가온 부분은, '고통의 곁에도 곁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곁의 곁'이 있을 때, 고통의 곁은 붕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가 파괴되는 자리가 아니라,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질 수 있는 자리는 바로 이 자리라고 한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에게 곁이 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는 이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관건은 고통의 곁, 그 곁에 곁을 구축하는 것이다."(p249)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p297)는 저자의 말에, 커다란 비밀이 폭로된 것만 같았다. 그는 말한다. 고통을 통한 연대는 오로지 '우회'만을 통해 가능하다고.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연대를 통해서, 혹은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그렇게 우리는 동행할 수 있다고. 

국가적 재난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고통 앞에선 부끄럽지만, 죽음만을 생각한다는 친구의 곁을 지킨다는 것이 내 그릇으로는 퍽 버거운 일이었다. 돌아보니, 그와 함께 무너질 것만 같던 나를 추스르느라 정작 나의 곁이 되어준 사람들의 고마움을 놓쳤던 것이 보인다. 천천히 갚아나가야겠다.

야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제 고통만을 말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보길 거부하는 이의 곁에는 서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내겐 그를 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벗 역시 내가 함께 구렁텅이 속으로 돌진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제 고통의 곁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의 곁이, 기꺼이 되고 싶다. 

저자는 고통을 통한 직접적 연대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고통에 연대가 가능함을 주장한다. 말장난 같을지 몰라도 우리는 이렇게 곁, 곁의 곁, 곁의 곁의 곁이 되는 것으로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고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 그렇게 믿는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나무연필(2018)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