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최종천
 최종천
ⓒ 이상옥

관련사진보기

  담쟁이 넝쿨이 그린 담쟁이 넝쿨이다
​  넝쿨이 넝쿨을 그렸을 뿐인데,
​  시멘트 벽에도 혈관이 흐른다
         - 최종천 디카시 <담쟁이 넝쿨>


이 작품은 최광임 시인의 <세상의 하나뿐인 디카시>(2016)에 게재된 디카시다.

디카시는 극순간 예술로서 서정적 비전을 확연히 드러낸다. 순간 포착, 순간 언술, 순간 소통을 정체성으로 하는 디카시는 존재와 자아와 사물이 동일성을 획득하는 순간을 섬광처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벽에 붙어서 벽과 한 몸이 된 담쟁이 넝쿨이 아닌가. 객체인 벽과 주체인 담쟁이 사이는 틈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한 몸이다. 그것은 담쟁이 넝쿨이 그린 담쟁이 넝쿨이고 시멘트벽과 한 몸이 되었으니 시멘트 벽에도 혈관이 흐르는 것이다.

담쟁이 넝쿨의 형상도 핏줄 모양이어서 이채롭다. 그보다 혈관이 흐르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피가 흐른다는 것은 생명 현상의 상징이다. 죽은 것 같은 시멘트 벽에 식물성의 담쟁이가 살아서 흐르니 당연 시멘트 벽과 한 몸이 된 담쟁이 넝쿨의 생명성은 곧바로 시멘트 벽의 그것이 된다.

시멘트 벽에 생명이 흐른다고 언술하는 이는 누군인가. 화자인 시인이 아닌가. 시인이 시멘트 벽에도 혈관이 흐른다고 언술하니 정말 그렇구나 동의하게 된다. 결국은 담쟁이 넝쿨과 시멘트 벽이 한 몸이 된 것은 이 둘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인식하는 화자인 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디카시는 시인과 담쟁이 넝쿨과 시멘트 벽이 완벽한 동일성을 이루고 있다. 현대시의 서정은 주로 자아와 세계가 분열하고 갈등하는 것을 표출한다. 전통적 서정이 지녔던 자와와 세계의 동일성은 현대시의 서정에서는 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탓이 아니라 세계가 그렇게 분열하고, 아니 시인 자신마저 자아 분열하고 해체되고 파편화된 오늘의 세태를 시인들도 반영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디카시는 서정시로서 태초의 세계를 꿈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카시는 서정시로서 태초의 세계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오늘 전통 서정이라고 내팽개쳐버린 잃어버린 원시인들이 탄성으로 흥얼거리던 그 서정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근원적 서정에의 그리움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정시는 원래 순간의 예술로 짧은 양식이었다. 언제부턴가 서정시가 길어지고 난삽해져 버린 것은 시인 탓이 아니라 오늘의 세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디카시는 오늘의 세태를 넘어 태초의 원형적 순수 서정 그 차체로 회기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입이 없어도 참 많이 말한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