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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정관헌
 덕수궁 정관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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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옆 덕수궁에 정관헌(靜觀軒)이란 이색적인 건물이 있다. 덕수궁 내에서 약간 높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덕수궁 뒷마당에 있는 정관헌은 일종의 정자다.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정자는 아니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옥과 양옥의 형식을 절충해 만든 일종의 퓨전식 건물이다.

여기서 고종 황제가 즐긴 일이 있다. 커피 마시는 일이었다. 외교사절을 이곳으로 데려가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와 커피의 인연에 대해 한의사 이상곤의 <왕의 한의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고종이 언제부터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부터라고 한다. 당시 러시아 공사였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면서 커피를 즐기게 되었고, 그때 커피 시중을 들던 안토니트 존탁(우리말 이름 손탁)에게 덕수궁 근처 황실 소유 부지와 건물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밤낮이 바뀐 삶을 살던 고종의 생활 습관에 커피 역시 일조를 했을 것이다."
     
당시 커피는 '가배'(咖啡)로 불렸다. 이 글자는 오늘날의 중국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카페이(kafei)'로 발음한다.

서양인 고위층이나 지식인들로부터 '가배'를 처음 배웠을 고종은 가배의 용도를 휴식이나 사교 모임 때 애용하는 음료 정도로 생각했을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다가 1883년 사망한 어느 서양 철학자의 책에 소개된 가배의 또 다른 용도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883년 세상을 떠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에 이런 대목이 있다.
 
"1863년 6월의 마지막 주에 런던의 모든 일간신문은 '순전히 과도 노동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제목을 붙인 기사를 게재했다. 그것은 명성이 자자한 어느 부인복 재봉소에서 일하고 있던 20세의 워클리라는 여공의 사망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여공은 엘리스라는 얌전한 이름을 가진 귀부인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던 오래된 이야기가 이제 새로 폭로된 것이다."
 
커피와 포도주 제공하며 장시간 노동 강요한 자본가들
 
 중국 베이징에서 찍은 어느 커피점의 간판. 가배(커피)란 글자가 적혀 있다. '가배' 앞에 상호가 있지만,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
 중국 베이징에서 찍은 어느 커피점의 간판. 가배(커피)란 글자가 적혀 있다. "가배" 앞에 상호가 있지만,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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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워클리의 사망으로 인해 재조명된 오래된 이야기라는 것은 고종이 즐겨 마시던 커피와 관련된 것이다. 위 책의 이어지는 대목에 커피가 언급된다. 아랫글 속의 '사교 계절'은 영국 귀족이나 상류층이 해마다 두 차례 정도 파티에 빠져 지내는 기간을 지칭한다.
 
"여기서 일하는 소녀들은 하루 평균 16시간 반을, 그리고 사교 계절에는 가끔 30시간을 중간에 쉬는 일도 없이 계속 노동하며, 그녀들의 노동력이 지칠 대로 지쳐 제대로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게 되면 때때로 세리(sherry)주·포도주 또는 커피를 공급함으로써 기운을 차리게 했다."
 
장시간 노동으로 사망한 워클리는 하루 16시간 혹은 연속 30시간의 중노동을 견디고자 커피를 마셔가며 버티던 노동자였다. 그의 커피 섭취는 자발적인 게 아니었다. 자본가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노동자가 장시간 각성된 상태로 일할 수 있도록 자본가들이 커피를 제공했다. 노동자들이 의식의 '각성'을 이루는 것은 두려웠겠지만, 그런 류의 각성은 자본가들이 적극 권장했다. 고종은 즐겨 마시는 커피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은 짐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커피는 물론 포도주까지 제공하면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가들에 맞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개시했다. 그 투쟁의 선두에 미국 노동자들도 있었다.

1800년대 전반기에 미국 노동자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2~14시간이었다. 봉급이 충분히 지급된다 해도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만한 노동시간이었다. 그런데 적절한 봉급도 지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시간 노동이 강요됐으니, 저항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88년 <호서 사학> 제16집에 실린 이홍모의 '1860년대 미국의 8시간 노동운동'은 미국 노동자들의 불만을 이렇게 소개한다.
 
"당시의 장시간 노동에 대하여 노동 지도자들은 '이 같은 노동시간이야말로 노동자들의 정신을 향상시키고 문명의 혜택을 즐길 만한 시간적 여유를 없앨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820년대부터 노동시간 단축 투쟁 전개한 미국 노동자들

장시간 노동으로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미국 노동자들은 1820년대부터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는 1일 10시간 투쟁을 벌였다. "1825년 뉴욕을 선두로 대서양 연안의 도시에서 건축 노동자들과 선박 노동자들이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이래, 다른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여러 번 동일한 요구를 가지고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1840년, 그런 투쟁 끝에 부분적 성과가 있었다. 반 뷰렌 대통령이 그해 3월 31일 연방정부 직할 기업체에 한해 1일 10시간 노동제를 명령했다. 이 조치에 힘입어 10시간 노동제가 확산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9시간제에 이어 8시간제를 주장하는 방법으로 투쟁 강도를 높여갔다.

이 와중에 터진 게 1886년 5월 1일의 그 유명한 사건이다. 이날 미국 전역에서 34만 명 이상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자 자본과 국가권력은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5월 3일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6명이 사망했고, 5월 4일에는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2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헤이마켓 사건
 헤이마켓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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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마켓 사건의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폭탄이 폭발했고, 이 때문에 양측이 흥분해 난투극을 벌이던 중에 경찰의 발포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다. 7년 뒤 열린 재조사에 따르면, 시위대와 경찰의 우연한 충돌은 사실은 자본가들의 시나리오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1886년 5월 1일부터 발생한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 7월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를 개최한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고 확산시킬 목적으로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5월 1일 제1회 노동절 대회가 개최됐다.

미국 노동자들의 5·1 투쟁을 계기로 벌어진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가 법제화되는 수확으로 이어졌다. 뒤이어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가 1일 8시간 및 주 48시간 노동을 국제 기준으로 제안하는 성과로도 이어졌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8시간 노동제가 문명사회의 표준적 노동시간으로 정립될 수 있었다.

1890년대 덕수궁에서 아들 순종과 함께 '가배'를 즐겨 마셨던 고종은 그 음료가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몰랐을 수 있다. 자본가들이 커피를 각성제로 활용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에 맞서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생각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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