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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30대 초반이던 시절의 일이다. 회사에 가면 또래인 팀원 4명, 그리고 40대 후반의 팀장과 항상 점심을 같이 먹었다. 과묵한 성격의 워커홀릭 팀장은 다른 점심 약속을 잘 잡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먹어야 생존한다는 것을 가끔 망각하거나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저기... 팀장님, 12시 20분이 넘었습니다."
"그래? 아이고 귀찮아. 어디 밥 대신 먹는 알약 같은 거 없나?"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문제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 식당은 동태탕과 비빔밥 2가지만 파는 곳이었다. 반찬도 정갈하고 아주머니 손맛도 좋았지만, 1년 내내 두 가지 메뉴만 먹어야 한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 팀에 속한 몇 년 동안은 퇴근 후나 주말에 동태탕과 비빔밥만큼은 일절 먹지 않았다.

팀장은 말없이 밥만 먹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점심마다 급체를 걱정해야 했다. 어떤 대화라도 이어가 보려고 꺼낸 주제는 결국 회사 이야기였다. 비비다 만 비빔밥처럼 우리들의 대화도 겉돌았다.

"오늘은 따로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오늘은 동태탕 말고 자장면 먹으러 가시죠."


해서는 안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었다. 6개월에 한 번이라도 점심시간에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어느 장소의 누구와도 잘 어울렸지만, 회사만 오면 사고와 행동이 경직되곤 했다.

"그거, 군필 남자들의 특징 아닐까? 군대에서의 경직된 사고와 기억이 회사에서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거지."

누군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인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나도 동의하고 있나 보다.

그렇게 쑥과 마늘이 아닌 비빔밥과 동태탕만 먹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우리는 세월과 함께 각기 다른 회사로 흩어졌다.

동태탕 말고 반미
 
 누군가는 밥 한 끼에 참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비웃을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이 한 시간이 참으로 즐겁고 소중하다.
 누군가는 밥 한 끼에 참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비웃을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이 한 시간이 참으로 즐겁고 소중하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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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는 빨리 점심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은 사람, 어딜 가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니 도보 3분 이내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싶은 사람, 하루 한 끼라도 맛있게 먹고 싶은 사람들이 공존한다. 각기 다른 업무 스타일만큼이나 다른 식성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한 식당으로 몰려간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한 달에 한 번, 나만의 미식회를 연다. 메뉴는 이런 식으로 정한다. 어느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백종원이 터키 골목을 누비며 현지 음식을 즐기는 모습이 나왔다.

"여보! 나 내일 점심은 터키 음식으로 결정했어."

반드시 SNS 맛집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잘 다려진 셔츠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구겨진 얼굴로, 김치찌개나 제육볶음을 향해 좀비처럼 걷지 않는 것만으로도 점심시간이 행복해지니까. 그렇게 날렵한 발걸음으로 터키 음식을 먹고 오면 오후 시간에 활력이 넘친다.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어떤 날은 책을 읽다가 미식회 메뉴를 결정하기도 한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읽은 책 내용 중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한국인 회사원의 이야기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20대의 끝자락일 무렵 베트남 현지 발령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회사에서 제시한 근무 조건은 1.5배의 월급과 명절 항공권 제공이었다.

"5년 바짝 고생하면 돈 모으기야 좋지. 그런데 맥주라도 한잔 하려면 오토바이 타고 한 시간은 나가야 해."

밀레니엄 버그 없이 새천년이 무사히 열린 당시에는 베트남으로 떠나기에는 내 마음이 담대하지 못했다. 결국 베트남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아내와 여름휴가로 방문하게 됐다. 이번 달에는 나만의 점심 미식회 메뉴로 반미를 먹으며 지난 세월을 곱씹어봤다.

누군가는 밥 한 끼에 참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비웃을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이 한 시간이 참으로 즐겁고 소중하다. 상사의 간섭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필요 없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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