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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그런데 어떤 진실이 나에게 진실로 보이는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정한다. 언론이나 제도에 의해서 가공된 진실이 나에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는 진실이 진짜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다.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위장된 가짜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진실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진실은 나에게 의도적으로 제공된다.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님에도 시선을 끄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진실이든 거짓이든 내가 알게 된 정보를 무슨 이유로도 믿지 않을 일말의 근거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계획을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은 우리 사회 내에 암약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목적을 충족하는 구실을 한다. '나는 이제 믿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한 번이라도 든 적이 있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일생에 한 번 마음에 담은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말이다.
 
 음모론의시대
 음모론의시대
ⓒ 전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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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부터 이야기해야 겠다.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의 '음모론의 시대'는 박근헤 정부 시기인 2014년에 쓰였다. 정부는 통합을 말했지만 정부와 야당 지지자가 공유하는 사실은 거의 없었고 음모론(혹은 음모론처럼 보이는 진실)이 횡행했다. 그중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자 사실로 드러난 것도 있었고, 별 반향없이 사라진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이 책에는 저자가 마주했던 당시의 혼란함과 막막함이 책에 잘 드러난다.

저자는 음모론을 어떤 사건이나 사고의 원인을 '권력 유지나 획득을 목적으로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집합행동'인 음모에서 '찾고 탐구하는 이론'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모르면 고통을 인내할 수가 없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큰 혼돈도 야기한다. 때문에 죄인을 쫓고 책임자를 색출하여 고통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이 때문에 음모론이 필요하게 된다.

음모론은 나쁘고, '음모론 믿지 맙시다!'하고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음모론을 믿을 '수밖에' 없다. 누구도 음모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음모들이 나중에 사실로 밝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책에는 시간적 한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비선실세의 국정개입론이 박근혜 정권 중기와 말기에 각각 어떻게 다뤄졌는지 검토해보면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하다. 여기에 비난 문화의 확산과 조직화된 무책임성의 존재도 음모론을 믿게 만든다.

책은 음모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소개한다. 병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견해는 음모론은 편집증적 정치 스타일의 정치이론이고, 음모론이 기반한 편집증은 정상적인 주류 사회를 위협한다고 바라본다.

정상성을 강조하는 견해는 병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제공하는 낙인과 통념이 의혹이나 비판을 억압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합리적 의심도 제기하지 못하게 봉하는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범위를 줄이기 위해 어떤 학자는 설명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공식적 설명과 충돌해야 한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음모론은 쓸모가 너무나도 많다. 음모론의 쓸모는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고 저자가 관심있는 분야다. 저자에 따르면 음모론은 간극의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신정론과 같은 문화적인 쓸모를 가지고 있다. 인지적, 감정적, 도덕적 쓸모다.
 
 기어츠의 도움을 받아 신정론의 문화적 쓸모를 세 가지, 즉 인지적, 감정적, 도덕적 기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지적 쓸모는 고통이 '왜' 자기에게 닥쳐왔는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감정적 쓸모는 고통에서 비롯한 불안감을 진정하거나 위안을 준다. 예를 들어 구원의 약속이 보장하는 복수와 보상이다. 도덕적 쓸모는 고통이 자신의 부도덕함에서 온 것이 아님을, 아니 오히려 도덕적이기에 고통을 겪는다는 점을 밝혀준다. (중략) 음모론 역시 마찬가지다. -84~85P
 
이런 문화적 쓸모를 제공하기 때문에 음모론은 정치적인 쓸모를 갖게 된다. 음모론이 고통에서 비롯하는 인지적 혼란을 제거하고, 감정적으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도록 가공하고,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음모론은 그 목적이 통치나 저항이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지닌다. 문제의 원인은 힘없는 집단일 수도 있고, 권력 엘리트가 원인일 수도 있다. 전문가는 객관적인 견해를 제공할 수도 있고,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도 있다.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지지자도 추정할 뿐인 설명일 수도 있다.

현상 유지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저항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문제의 원인 제공자들이 권력 행사자인 음모론은 권력 행사자들을 위험하게 만들지 못하는 반면, 문제의 원인이 힘없는 집단인 음모론은 원인 제공자들이 속절없이 당할 수 있다. 때문에 음모론은 약자의 무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억압의 망치가 된다.

이 무기이자 망치는 전략적으로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는데, 한국인들이 언론에서 매일 보는 것들이라 익숙할 것이다. 비판 면역 전략(낙인찍고 프레임 바꾸기), 희생자 되기(사실은 기득권자지만 비주류이며 박해받는 계급이라고 선전), 악마 만들기(나의 고통은 사악한 자들의 계략 때문이다.) 정말 음모론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여기까지 읽으면 '음모론 나쁘다'하는 얘길 듣고 살면서도 막상 음모론 구분이 얼마나 힘든지, 너도나도 음모론의 요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어 당황스러울 정도다. 또 이런 특징이 한때 지나가는 풍조라고 할 수도 없다는 점이 음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음모론의 시대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저자는 말미에서 음모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책임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 및 '우리'와 거리를 두자고 말한다. 물론 저자도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루고 개선할 수 있는 바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윤리의 교훈을 반영한, 좋은 뜻이 나쁜 결과를, 나쁜 뜻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며 고통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비극적 관점'이라는 것도 있다고 나지막하게 말한다.

다루기 어려운 주제를 설명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저자는 참 세심한 사람이다. 거칠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책은 지도가 아닌 나침반이 되어준다. 뭐 하나 믿을 것 없는 세상에서 관점이라도 재주껏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음모론의 시대

전상진 지음, 문학과지성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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