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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학교가 폭력으로 시끌시끌하다는 뜻, 시(詩)로 학교를 끌어당기거나 끌어준다는 뜻, 결국에는 좋은 의미에서 학교가 시끌시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이 학교폭력 예방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려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기자 말

"○까, ○발, ○랄."

쉬는 시간이면 여과 없이 들려오는 학생들의 말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은 학생들의 언어가 더욱 자극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중에는 성적인 것, 폭력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가끔은 듣기에 너무 거북스러운 표현들이 있어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빨간불 켜진 학생들의 언어생활

한 번은 남학생들끼리 낄낄거리면서 성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성인 남성들이 모여서 하는 음담패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했는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지만 여기에다 그대로 옮겨 적지 못할 정도다. 학생들은 나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이야기를 잠시 멈추었을 뿐 크게 신경 쓰질 않았다. 그들끼리 있을 때는 더 심각한 말들이 오갈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분식집에서 선생님 욕을 하느라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네 명의 여학생들을 만난 적도 있다. 학생들은 '담탱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특정 선생님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욕설이 뒤섞이기도 하고, 선생님에 대한 어떤 원망과 조롱이 심각하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야기가 가속되자 그중 한 학생이 학교 정규직과 계약직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새삼 놀랐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런 정보를 얻을 데도 없었거니와 선생님을 정규직과 계약직으로 구분한 일도 없었다. 학생들은 담탱이를 놓고 한없이 비난하다가, 그 담탱이가 계약직이라서 돈을 많이 못 벌 것이고 그래서 불쌍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학생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새로운 물꼬를 틀기 시작해서, 각 선생님의 경제적 사정을 추측하고 평가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 기준은 선생님들의 옷과 차였다.

"아, 그 선생님은 그렇게 돈이 있어 보이진 않았어."
"그 선생님은 집이 좀 사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로부터 그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말, 성적인 것으로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 요즘 학생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 한 사람의 언어습관은 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낸다. 어떤 언어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어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잘못된 언어습관은 학생들이 올바른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큰 방해요소가 되고 더욱이 학교생활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불러올 수 있다.

일상의 언어마저 기피하는 요즘의 학생들

학생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말 표현을 한데 모으는 비정형의 허브가 존재한다. 스마트폰이다. 의미로 가득 찬 것 같은 스마트폰의 세계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미의 부재다. 언어의 빈사 상태가 스마트폰 세계 속에 무수하다.

긴 글을 읽지 않는 학생들. 자기 생각을 언어화하지 않는 학생들. 책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학생들. 자극적인 이미지에만 반응하려 하고, 영상물이나 게임에만 푹 빠져 활자들을 천천히 헤아리지 못하는 학생들 그래서 의미의 지연을 참아내지 못하는 학생들. 공감하고 소통하기보다는 무지막지한 자극에만 자꾸 다가가고 싶은 학생들. 온라인 게임이 시작되면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학생들. 학교 종이 친 다음에도 눈이 멍한 학생들. 자신의 감정 상태를 올바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학생들. 눈앞의 현실보다 게임 속 캐릭터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 학생들. 언어는 없고 오로지 비속어와 욕설만 내뱉는 학생들. 온전한 일상어의 자리에 늘 신조어나 줄임말을 넣는 데 정신이 없는 학생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또래문화에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 자꾸 접속해야만 하는 학생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요즘의 학생들. 사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요즘의 학생들. 사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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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것은 학생들이 훈계처럼 딱딱한 말만 기피하는 게 아니라 따듯한 격려나 사려 깊은 말까지도 튕겨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상당수의 학생이 언어의 세부 맥락을 읽어내기보다는 언어를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데 익숙해져 있는 상태다. 올바르게 사용할 언어가 없으니 그 언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없다. 언어의 질감을 느낄 언어적인 촉각이 없다. 학생들의 마음을 지켜줄 최소한의 담장이 없다. '언어의 실종'이다.

학생들 사이에 언어의 구체성이 사라지면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 더 많이 발생할 것이다. 한 번은 강의하는데 전혀 의미전달이 되지 않는 학급을 만난 적이 있다. 앞으로 이런 학급들이 더 많아질까 봐 걱정이다.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서, 학생과 부모님 사이에서 언어의 부재가 발견된다. 그러니까 구체성이 사라진 언어 때문에 실망과 오해가 생겨나고 싸움이 일어나며 학교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학생들 간에 끊임없이 생성되는 심리적인 세부상황들을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소통하지 못하니 공감대가 사라지고 많은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폭력적인 대응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교 구성원들에게서도 섬세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

우리에겐 '문학적인 언어'가 절실해

주체적인 사고를 촉진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일 먼저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로써 '문학적인 언어'를 제시하고 싶다. 문학의 언어는 헤아림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다. 인간을 깊이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고 헤아리는 과정에 문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변해도 문학을 마음 가까이 두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적인 언어를 학생들 곁에 둘 수는 없을까. 그 문학적 언어의 우려낸 맛을 학생들이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없을까?

문학은 문학 교과서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는데 문학적으로 생각하고 문학적으로 화답하는 문화가 학교 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 속 활자들을 곱씹어보며 생각에 잠긴 학생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보기에 좋을까. 그런데 솔직히 말해 요즘 그런 학생을 만나기란 참 어렵다. 학교가 사용하는 언어가 평가의 언어요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언어인데, 어떻게 그 안에서 문학적인 언어를 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입시와 대학 보내기와 학교폭력으로 정신없는 요즘 학교의 언어. (꽃다발처럼) 섬세하게 감싼 말들을 보기 좋게 건네는 일보다 (망치나 칼 같은) 차갑고 무지막지하고 날카로운 말의 더미들을, 학생들의 주변에 쌓아놓고 있지는 않은가. 학교가 언제나 꽃밭일 수는 없겠으나, 차별과 혐오와 폭력과 서열화로 가득한 싸움터 같은 공간이어서야 되겠는가. 그런 공간에 있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에 상처를 내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말은 점점 더 잔인하게 무서워지기만 한다.

물고기가 물고기 떼를 따라가듯이 언어는 앞서 나오는 언어를 따라가는 습성을 지녔다. 앞서가는 언어의 방향에 따라서 뒤따라가는 언어의 향방이 결정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 속담은 진리에 가깝다. 말은 오고 가면서 어떤 느낌과 생각을 묻히고 간다. 꽃가루를 묻히고 날아다니는 벌 같다. 여기저기 느낌과 생각을 묻히고 다니는 말, 말, 말이다. 문학적인 언어는 날카롭기는 해도 해롭지는 않다. 문학적인 언어의 화살에 맞은 과녁은 꽃가루의 향기가 날 수밖에 없다. 그 향기를 가장 잘 맡을 수 있는 섬세함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그런 향기에 취해볼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을 사는 존재들이다. 그런 향기로 그득한 말의 다발을 학업에 지쳐 있고 스마트폰에 갇혀 있는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건네주고 싶다.

시인인 것이 부끄러워 숨기고 살아가는 존재
 
사람의 얼굴은 문학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는 우리 내부에서 우리도 모르는 조합으로 버무려진다. 금세 우리의 얼굴은 어떤 표정으로 가득 채워지고(아무리 무표정한 사람일지라도 어떤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언어가 없다는 가정하에서도 눈물이나 눈짓, 찡그림, 격하게는 침을 꿀꺽 삼키거나 뱉는 행위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하여 감정과 생각이 쌓이면, 사람은 더 참지 못하고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된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이 말이고, 그것을 더 다듬어서 하나의 온전한 세계로 만들면 비로소 글이나 시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의 얼굴(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발성 기관)은 정보의 입력과 출력이 완벽하게 조화된 구조다. 이런 구조로 되어 있는 인간은 글을 쓸 수밖에 없고 이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가 있다면 결국 '시'라는 것을 짓고 만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며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가득할 때가 있었다. 시인인 지금보다 더 시인 같은 그런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롭게 여겨지는 때가 학생의 시절이다. 그런 때 모두는 시인이 된다. 학생들은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 흔들리고 감동이 되어서, 하늘에 뚫린 "둥글고 환한 구멍"(이향지)을 그냥 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귀한 시절을 사는 학생들에게서 문학적인 언어를 빼앗아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스마트폰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 고등학생 작가가 말하는 문학교육의 현실

나는 여러 학교와 스포큰워드 교육센터, 그리고 지역의 청소년센터에서 학생들을 위한 문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일상 속에 문학의 언어를 깃들게 할까 늘 고민하고 있다. 실제로 대다수의 학생이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할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이미 문학 교과서 속의 문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왜 시인까지 나서서 학생들의 문학교육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그냥 현직 선생님들에게 문학교육의 전부를 맡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위험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교과서 속의 문학은 입시를 위한 문학이 아닐까? 조금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문학이 입시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가 본인이 쓴 작품이 시험문제의 지문으로 나왔는데, 작가 본인이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니만큼, 정답이란 것이 존재하기가 어렵다. 입시에 갇힌 학교에서 다양한 문학적 해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것은 문학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들의 열정이나 능력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입시 시스템 아래서는 많은 학생을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에 브런치북 대상을 받으며 우리 앞에 등장한 한 고등학생 작가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이런 문제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될 뿐만 아니라, 의표를 찌르는 문장들이어서 함께 공유하고 싶다.
 
"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인간으로서 갖출 기본적인 사유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전문 학자들이 특정 시를 분석한 내용을 외우는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문학을 평가하려 든다면 어느 누가 문학을 창작하려 하겠는가. 자신의 시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옳은지 그른지 심사받아야 한다면 아무도 시를 짓거나 글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즐기게 해야 한다"

"문학을 창작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성과 깊은 성찰이다. 이런 것들을 완전히 배제한 현재의 교육에서 문학의 이론적인 내용을 숙지한다고 해서 시를 쓸 수 있을까. (중략) 학생들이 시를 쓰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싫어하는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노정석, <학생들이 시를 쓰지 않는다> ,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 중에서
 
 학생들이 시를 읽은 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현재 고등학교 국어 문제를 통해서도 문학교육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학생들이 시를 읽은 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현재 고등학교 국어 문제를 통해서도 문학교육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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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라는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평가'라는 단어는 문학교육 논쟁의 핵심이다. 문학이 왜 평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문학은 인간의 여러 감정과 연결되어 있고, 문학을 향유하면서 얻게 된 각각의 감정들은 한 인간의 전반적인 정서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다. 그런데 그것을 해석하거나 느끼는 학생들의 개성을 평가해서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누가 문학을 좋아하겠느냐는 이야기다. 나는 이 부분에서 진심으로 공감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교육적 한계에 대한 명징한 의문들이 더 많은 학생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제기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나게 할, 진짜 문학의 언어

자기의 언어를 문학적으로 가꾸어나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한 고등학생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깊이 들여다봐야 할 우리 시대 문학교육의 필요들이 별자리처럼 빛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교육관계자와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쳐다보아야 할 그런 올바른 문학교육의 당위성들이 점선처럼 연결되곤 한다. 나는 이런 현장감 있는 의견과 문제의식들이 교육의 실제 대상자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나와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다음의 문장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온종일 닭장 같은 학교 건물과 독서실에서 종이 위에 써진 문제를 푸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지 생각하며 괴로웠다."

"점점 증가하는 사회 속 혐오와 배척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돌이켜볼 때, 어느새 우리에게 당연해져버린 것들에 대해 한 번쯤은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 신기루를 읽다  <죽은 시인의 사회> 독후평 중에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것을 자기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학생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올바른 해답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건져 올릴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문학적인 언어요, 자기 언어라고 명명하고 싶다. 결국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고, 나는 이런 언어가 우리 학교 사회에 필요하다고 앞으로도 거듭 주장할 것이다. 물론 문학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은 자신에게 당면한 현실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학교) 사회의 심층을 해석할 수 있는 어떤 '깊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본다.

누구나 문학적인 문장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않는가.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빛나는 문장들은 거의 다 문학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우리의 교육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이 시대의 어떤 한계들이 분명하게 보일 때, 거기서 문학적인 언어는 꽃을 피우게 된다. 노정석 작가와 같이 문학적으로 생각하고 문학적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출현했으면 좋겠다.
 
 한 고등학생 작가의 책 속에 수록된 시 한 편. 학생 시절의 삶을 '기린'의 특성에 비유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했다. 이렇듯 학생들이 자기의 언어를 문학적으로 가꾸어나간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한 고등학생 작가의 책 속에 수록된 시 한 편. 학생 시절의 삶을 "기린"의 특성에 비유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했다. 이렇듯 학생들이 자기의 언어를 문학적으로 가꾸어나간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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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문학적인 언어로 사고하는 학생들은 자기의 주변을 둘러본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자기 언어로 자기 현실을 해석·표현할 수 있는 학생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주변의 학생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문학을 사랑하게 된 학생 개인은, 그 주변의 학교 구성원들까지 모두 끌어안는, 사랑의 힘을 자기 내면에서 만들어낸다. 교과서에서 수동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기에, 그의 사랑은 능동적이고 더불어 주체적이다. 시를 쓰는 고등학생을 통해서, 시인인 내가 새롭게 배운 감동이다. 시인과 시인의 만남이다.
 
사람이란 단어에는 모난 받침이 하나 있다.
이 투박한 마음을 둥글게 깎아
사람에게 받치면 사랑이다.

(중략)

그러므로 사랑하며
이 둥글고 작은 행성 위에서
사, 라, 가는 것이다.

-시 <사람, 사랑> 중에서
 
위와 같은 시적인 의미들이 사람들 사이에 눈처럼 사랑처럼 쌓이고 쌓일 때, 우리들은 더는 사라져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갈 존재들이 된다고 믿는다. 창백한 푸른 점인, 이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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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없는 학교를 소망합니다. 제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학교에서 낭독합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들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