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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조경되어 관리되고 있는 조문국 사적지는 잃어버린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만하다.(2016년 2월) 돔형의 건물이 고분전시관이다.
 잘 조경되어 관리되고 있는 조문국 사적지는 잃어버린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만하다.(2016년 2월) 돔형의 건물이 고분전시관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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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금성산 고분군 역사 관광지'가 한국관광공사가 11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한 '토박이 추천 명소'에 선정됐다. 함께 선정된 관광지는 ▲ 충남 서산 웅도  ▲ 대전 대동하늘공원 ▲ 충북 충주 오대호 아트팩토리 ▲ 광주 광주호 호수생태원 ▲ 울산 울산대교 전망대 등 모두 6곳이다.

토박이가 추천한 '숨은 여행지'라고 하지만 여전히 금성산 고분군은 경상북도 안에서도 낯선 곳이다. 한때 대읍(大邑)으로 알려진 의성은 오지는 아니지만, '태어나는 아이는 없고 노인만 늘어나' '소멸 대상 지자체 1순위'로 꼽히면서 잊힌 고을이 된 까닭이다. 

'조문국 사적지'는 잃어버린 왕국의 '입구'

금성산 고분군(古墳群)은 금성면 대리리 일대에 흩어져 있는 조문국(召文國) 사적지다. 조문국은 삼한 시대 의성 지역을 지배한,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한 고대 성읍(城邑) 국가다. 조문국은 신라 9대 임금 벌휴왕 2년(185년)에 신라에 복속됐는데 이는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 단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벌휴이사금(泥師今) 2년, 1월에 왕이 친히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2월에 파진찬(波珍飡) 구도와 일길찬(一吉飡) 구수혜로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軍主)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오르는 완만한 곡선의 길과 울타리, 가끔 밋밋한 고분의 행렬에 악센트를 찍는 소나무가 사적지 풍경의 특징이다.(2017년 11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오르는 완만한 곡선의 길과 울타리, 가끔 밋밋한 고분의 행렬에 악센트를 찍는 소나무가 사적지 풍경의 특징이다.(2017년 11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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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문국은 금성면 일대에 규모가 매우 큰 100여 기 등 모두 374기(2015.4. 의성 금성산 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군 등 최소한 몇 세기에 걸친 국가의 자취를 남겨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조문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고고학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분군은 금성면 탑리리를 중심으로 대리리·학미리 일대뿐 아니라 단촌면과 점곡면 일대 400여 기 등 모두 900여 기에 이른다. 삼한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과거 강성했던 정치세력이 이 일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방증한다. 

특히 경상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된 금성면 일대 고분군에는 경주 왕릉에 비교할 만한 대형 고분들이 즐비하다.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름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른다. 

의성군 금성면으로 귀촌한 벗에게 가는 길목에 있는 조문국 사적지를 나는 늘 사진 몇 장에 담고 스쳐 지나기만 했다. 빈약한 문헌 기록에 기댄 지자체의 '역사관광 상품' 개발이 썩 미덥지 않아서였다. 연고(緣故)만 보이면 쿵쾅쿵쾅 세워낸 '아무 기념관'의 내용이 쭉정이라는 걸 확인하는 예가 좀 많은가 말이다. 

금성산 고분군, 봉분 지름 20m 이상이 16기

그러다가 이태 전 늦가을에 사적지를 한 바퀴 돌아 고분전시관까지 둘러보고 나서야 나는 2천여 년 전의 이 잃어버린 왕국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갈피에 적지 않은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문헌 기록을 남기지 못해도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좋은 역사'란 없다는 것도 알았다.

탑리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날개 모양을 한 3개의 장식이 있는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조문국의 유력 지배층의 분묘임이 확인됐다. 5세기께 축조된 이 고분은 신라의 전형적인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탑리리 고분군을 만든 세력은 이미 신라화한 지방 토착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탑리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탑리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 조문국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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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고분 발굴 작업이 이뤄진 결과 학계에서는 조문국이 기원전 1세기쯤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조문국 정벌에 나선 것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을 정벌함으로써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의성군은 '조문국의 영광'을 알리기 위해 금성면 초전리 옛 조문초등학교 자리에 '조문국 박물관'을 건립(2013년)해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대리리 고분군 사적지에 고분전시관을 세워 대형 봉토분인 2호분 발굴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조문국 사적지가 조성된 대리리 일대는 10년 전만 해도 비석을 갖춘 경덕왕릉이 눈에 띄었을 뿐 잡초가 우거진 고분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대를 사적지로 정비하고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사적지는 '잃어버린 고대 왕국'으로 들어가는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적지 한가운데에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봉분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정면에는 높이 1.6m의 비석이 서 있다. 영조 원년(1725년) 의성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다고 한다. 
 
 고분전시관에 재현된 대리리 2호분 순장묘. 순장자의 머리 방향이 피장자와 반대다.
 고분전시관에 재현된 대리리 2호분 순장묘. 순장자의 머리 방향이 피장자와 반대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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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릉 앞에 세운 돔형의 고분전시관은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2호분의 유구(遺構)와 출토 유물, 순장 문화 등을 전시해 당시의 매장 풍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이 순장묘 전시관에는 금동관을 쓴 인골과 함께 한 사람의 인골이 더 있으니 바로 순장자다.

조문국의 '순장묘', 고분전시관

순장(殉葬)은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 죽었을 때 그를 따라 강제로, 혹은 자발적으로 죽은 사람을 함께 묻는 장법(葬法)이다. 가부장제가 확립된 고대 신분 사회에 존재했던 이 잔혹한 제도의 폐해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502년(지증왕 3)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 그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을 죽여서 순장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이를 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순장 습속은 신라 초기부터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순장은 묘곽 안에 1구 이상의 인골이 확인되는 경우인데 의성 지역의 순장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까지 대형 고분에서 확인된다. 대리리 2호분에서도 순장이 확인되고 있으니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도 순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문국 사적지의 여름(2013년 8월). 잔디밭 유지가 쉽지 않은데도 조문국 사적지는 잘 관리되고 있었다.
 조문국 사적지의 여름(2013년 8월). 잔디밭 유지가 쉽지 않은데도 조문국 사적지는 잘 관리되고 있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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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오르막길을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들면 고분과 소나무의 앙상블과 함께 공제선 저편으로 뿌옇게 멀어지는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2013년 8월)
 가끔 오르막길을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들면 고분과 소나무의 앙상블과 함께 공제선 저편으로 뿌옇게 멀어지는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2013년 8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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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반문명적인 순장의 자취를 확인하는 기분은 좀 끔찍하지만, 그것은 이 지역에 강성했던 성읍 국가의 존재를 반증하는 것이다. 사학자들이,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토착세력에 의한 지배체제가 계속됐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역사 살피기가 어려우면 풍경을 즐기라

별로 가늠도 되지 않는 고대사의 갈피를 살피는 일이 머리가 아프다면 잊어버리고 사적지를 천천히 돌아보아도 좋다. 탐방로로 돌 때마다 조경과 관리가 매우 성공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지 않은 면적의 사적지 유지 관리에 들이는 의성군의 공력이 만만찮은 것이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오르는 완만한 곡선의 길과 울타리, 가끔 밋밋한 고분의 행렬에 악센트를 찍는 소나무… 드문드문 서 있는 고분을 이어주는 탐방로는 모두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휘도는 형태다. 이 길을 설계한 사람은 누구였나, 그는 풍경의 묘미를 아는 이임이 틀림없다. 

고분과 고분 사이에, 혹은 휘돌아가는 탐방로를 구획하는 울타리 근처에는 소나무를 두세 그루씩 심어 놓았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각기 키가 다르다. 의좋게 어깨를 나란히 한 소나무의 실루엣은 이 잃어버린 왕국의 희미한 기억처럼 보인다. 

가끔 오르막길을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들면 고분과 소나무의 앙상블과 함께 공제선 저편으로 뿌옇게 멀어지는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것은 이 야트막한 언덕바지에서 명멸했던 왕국의 성쇠를 환기해 준다. 

사적지의 풍경은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봄 풍경은 따로 찍지 못했지만, 나머지 계절 풍경은 담을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사적지의 설경을 만나지 못한 점, 그러나 누구에게든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 조문국 사적지의 겨울(2016년 2월). 사적지의 사계가 제각기 다르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 조문국 사적지의 겨울(2016년 2월). 사적지의 사계가 제각기 다르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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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문국 사적지의 겨울은 차분하다. 시린 하늘 저쪽으로 잃어버린 고대 왕국의 영화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조문국 사적지의 겨울은 차분하다. 시린 하늘 저쪽으로 잃어버린 고대 왕국의 영화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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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지 중앙광장의 작약꽃밭(2018년 5월). 내년 봄에도 여기엔 작약이 조문국의 영광처럼 흐드러질 것이다.
 사적지 중앙광장의 작약꽃밭(2018년 5월). 내년 봄에도 여기엔 작약이 조문국의 영광처럼 흐드러질 것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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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 중앙광장에는 1600여 평에 이르는 작약밭이 조성돼 있다. 작약은 고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 흐드러진 5월의 꽃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음으로써 이 사적지를 기억의 갈피에 갈무리한다. 

숨은 관광지로 소개됐다고 이 고분군 사적지가 북적댈 일은 전혀 없다. 기사마다 핑크 뮬리를 찍은 사진이 감초처럼 등장하지만, 그리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벗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아니라도 아름다운 풍경을 생뚱맞은 외래종 화초로 칠갑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금성 고분군을 찾으면 잃어버린 왕국 조문국은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이 당기지 않으면 고분전시관은 빼먹어도 무방하다. 다만, 저물어가는 가을, 아름다운 사적지의 풍경을 마음에 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혹 천년의 침묵을 이어온 금성산 고분군을 떠나면서 저 번성했던 고대 왕국의 영화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여행의 '쏠쏠한 덤'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주변 관광·유적지]

사적지 주차장 옆에는 문익점 선생의 '면작 기념비'가 있다. 여기서 그의 손자 승로가 목화를 재배했다. 또, 사적지에서 3km 거리의 탑리에 국보 제77호 탑리리 오층석탑이 있다. 이 통일신라 시대의 돌탑은 몇 해 동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완전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안동 방향으로 35km, 40여 분을 달리면 최치원의 호를 딴 고찰 고운사(孤雲寺)가 있다. 이 무렵의 고운사 단풍은 단연 최고다. 만약 금성산 고분군이 성에 차지 않으면 고운사에서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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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기사 포함, 모두 1천여 편의 글을 썼다. 2019년 5월,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에 연재한 '친일문학 이야기'를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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