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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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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주요 고비 때마다, 보수 언론의 왜곡 보도가 한국 사회의 발목을 붙드는 일이 많았다. 해방 직후에도 그랬다.

미국·소련·영국의 모스크바 3상 회의(3국 외교장관 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대형 오보를 냈다. 실제로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는데도 가짜 뉴스를 내보냈던 것이다.

이 보도는 신탁통치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8·15 광복으로 주춤했던 친일 보수 세력이 반탁운동을 매개로 힘을 추스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수 세력은 '반탁은 애국, 찬탁은 빨갱이'라는 논리로 국민을 분열시키며 한국 정치를 좌우 대결로 몰아갔다. 그러는 사이에 친일청산 같은 현안은 뒤로 밀려났다. 대형 오보 1건이 한국 사회의 발목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수 언론의 왜곡 보도가 항상 성공적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결정적 순간에 보수 언론이 왜곡 보도로 국면 전환을 시도했지만, 성과 없이 무위로 끝난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 최초 평화적 정권 교체가 있었던 1997년 12월 대선 당시 나온 '국제통화기금(IMF) 재협상론' 왜곡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김대중 후보의 문제 제기

당시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외환위기를 이용해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타격을 입힐 목적이었다. 보도가 나오게 된 계기는, 그해 12월 3일과 5일 발표된 한국 정부와 IMF의 협상 결과에 대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의 문제 제기였다. 그는 IMF 자금 지원을 받아들이는 전제 하에 세부 내용을 재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3일 발표된 IMF 의향서와 5일 발표된 IMF 대가성 차관협약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최대 550억 달러를 순차적으로 지원받는 대신, 긴축적인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또 기업에 대한 무역보조금도 폐지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정책도 포기해야 했다.

수입선 다변화는 국내산업을 보호하는 한편, 일본에 편중된 수입 패턴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550억 달러 중에서 100억 달러가 일본에서 나오다 보니, 이런 요구 조건도 들어간 듯하다. 한국 경제를 살리는 방향이 아니라, 자금을 지원하는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IMF 협상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위 의향서와 협약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도 올리고, 금융실명제도 완화하고, 은행 및 기업의 구조조정도 하고,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추가 조치도 실시해야 했다. 이 외에도 한국은 많은 의무를 떠안았다.

시중에 자금이 말라 연쇄 부도가 터지고 노동자들이 대거 실직하던 그 시점에, 위와 같이 IMF는 통화량 감소로 이어지는 긴축 정책과 대규모 해고를 양산하는 구조조정 등을 요구했다. 진정으로 한국 경제를 위한 일인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요구였다.

그해 12월 22일 <한겨레>가 "'IMF 처방 잘못' 목소리 커진다"라는 기사에서 IMF의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르몽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등의 비판을 인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외국에서 봤을 때도 IMF 협상 결과가 한국에 너무 불리하다는 점을 알릴 목적으로 외신을 인용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김대중 후보가 협상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누구라도 할 만하고, 또 당연한 문제 제기였다. 
 
"IMF와 맺은 대가성 차관협약 양해각서는 너무도 불평등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50퍼센트로 올리고, 은행과 증권 등 금융시장을 개방해야 했고, 수입선 다변화제도 앞당겨 이듬해 폐지해야 했다. 경제 신탁통치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물론 IMF 뒤에는 미국, 일본 등 보이지 않는 손들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관 제공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나는 대규모 실업 사태가 걱정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제1권

김대중에 대한 공격 주도한 <조선일보> 
 1997년 12월 11일 자 <조선일보>
 1997년 12월 11일 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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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기의식에 따라 김대중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재협상을 요구했다. 편지의 요점은 'IMF와의 협상 내용을 원칙적으로 이행하되, 이행 단계에서 세부적인 논의를 통해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재협상이란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기존 협상의 파기를 전제로 하는 게 아니었다. 기존 것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추가 협상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애초에 부정확한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 의장을 통해 자신의 요구 사항이 재협상이 아니라 추가 협상임을 명확히 했다. 이 해명을 언론이 알아들었다는 점은 12월 12일 자 <한겨레> 기사 'IMF 약속 지키며 추가 협상 뜻'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보수 언론들은 못 알아들은 척했다. 김대중의 진의를 왜곡하고 이를 빌미로 공세를 강화했다. 재협상론으로 인해 IMF와 국제사회의 불신이 가중되고 한국의 국제신인도가 떨어지며 외화난까지 가중되고 있다고 허위로 보도했다. 외환위기로 인한 국민들의 원성 속으로 김대중을 밀어 넣으려는 노력이었다.

이 같은 선전전은 즉각적인 효험으로 이어졌다. 12월 12일 자 <한겨레> 1면에 'IMF 재협상, 대선 치열 공방' 기사가 뜬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재협상론은 선거 막판에 최대 이슈로 급부상했다.

당시 김대중에 대한 공격을 주도한 곳은 <조선일보>였다. 이 신문은 12월 9일 자 사설 'IMF 재협상의 위험성'에서 "이제 와서 다시금 재협상(자신의 집권을 전제로)을 거론하는 것은 IMF 차관의 순조로운 도입에 결코 이롭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고 우리는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IMF 등 국제금융기구들이 우리 정치권의 재협상 운운을 의심해서 자금 지원을 줄인다면 외환위기는 극복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질 우려가 있고, 국가신용에 파탄이 나면 다음 정권도 견딜 재간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일보>는 이틀 후인 12월 11일에는 동종 기사를 1면 머리로 올렸다. IMF 협상을 비판하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더불어 재협상을 주장하는 김대중 후보의 입장이 IMF 자금 지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기사였다.

'정치권 IMF 재협상 발언'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IMF가 한국 정부의 경제개혁 약속이행 여부에 불안한 시각을 갖고 있는 데다가 정치권의 재협상 발언, 국내 언론의 감정적인 보도 등이 겹치면서 국제 금융계가 한국에 자금 지원을 꺼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작적 냄새가 상당히 짙다"

그런데 1면 톱기사치고는 근거가 너무 부실했다. '재협상 발언 때문에 자금 지원이 지체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A와 B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부가한 것이다).
 
"한 금융기관 국제금융팀장은 'IMF 지원 후 첫 1주일 분위기가 중요하다'며 'IMF 1차 지원액이 55억 달러에 불과해 해외 차입선이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고 걱정했다(A). 우리나라는 연말까지 도래하는 단기 외화차입 규모가 1백억 달러를 훨씬 웃돌고 있다. 시중은행 국제담당 데스크들은 '한국 언론들이 IMF 지원을 국치로 규정하고 대선 후보가 10일부터 '왜 IMF 재협상을 요구하는가'라는 신문광고를 실으면서 해외 금융기관들 간에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B)."
 
A 부분에서는 '한 금융기관 국제금융팀장'의 발언이 근거로 제시됐다. 당시 최대 쟁점인 IMF 문제와 관련된 기사라는 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라는 점, 대선의 최대 쟁점에 관한 기사라는 점, 당선이 유력시되는 김대중에 관한 기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한 금융기관 국제금융팀장의 발언을 근거로 '재협상 발언 때문에 IMF 자금 지원이 지체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팀장이 IMF 자금 지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거나 자금지원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기사 어디에도 그 점은 나타나지 않는다.

B에서는 두 개의 출처가 제시됐다. B 부분을 읽다 보면 재협상론에 대한 우려가 해외 금융계에서 확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출처는 그냥 '해외 금융기관들'일 뿐이다. 어느 금융기관인지 정확히 제시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기자가 '해외 금융기관들'의 발언을 직접 듣고 쓴 것도 아니었다. '시중은행 국제담당 데스크들'한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어느 시중은행 누구한테 들었다는 것도 아니고, 시중은행 국제담당 데스크라는 모호한 실체한테 들었다는 것이다. '시중은행'도 모호하고 '국제담당 데스크'도 모호하다. 온통 모호한 것들만으로 근거를 만들었던 것이다.

IMF 협상 다음 달 발행된 1998년 1월호 월간 <사회평론 길>에 실린 'IMF 재협상 파동 언론보도의 전말: 외신은 재협상 발언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었다'라는 기사는 "IMF 협상과 관련된 언론보도 대부분은 조작적 냄새가 상당히 짙다"면서 위의 <조선일보> 기사들을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도 명백한 조작 기사로 비쳤던 것이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한 금융기관 국제금융팀장', '시중은행 국제담당 데스크들', '해외 금융기관들'을 근거로 제시한 뒤, 이런 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바로 뒷부분에서 12월 10일 자 <워싱턴 포스트>를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했다. "대선이 끝난 후 당선자가 IMF 권고 이행 의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제2차 금융쇼크가 한국을 강타할지도 모른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고 <조선일보>는 말했다.

언론개혁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증거

하지만 위의 <사회평론 길> 기사에 인용된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이 미국 언론은 그런 식으로 보도한 적이 없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IMF 협상 결과에 대한 한국 내부의 논란을 소개하면서 "오는 18일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당선자가 IMF 권고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하지 않을 경우 제2차 금융쇼크가 한국을 강타할 것이라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기사에는 김대중의 재협상론이 제2차 금융쇼크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는 내용이 없다. <조선일보> 기사가 그렇게 연결했을 뿐이다.

IMF가 한국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IMF가 우려한 것은 김대중 후보가 아니라 한국 정부였다. <워싱턴 포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김대중 후보로 인해 한국이 위태해지고 있다고 보도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서 그것이 위험하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게 12월 12일 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다. 이 신문은 미국 정부 및 금융계의 우려를 보도하면서 "이들은 한국 정부가 IMF에 의해 요구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현금을 얻으려는 것은 위험한 계략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한국이 당장 쓸 수 있는 가용 외환보유고가 적은 반면, 당장 갚아야 할 단기 외채는 많은 점'이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외국에서 걱정하는 것은 김대중의 발언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IMF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한국 경제가 알려진 것 이상으로 열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불충분할 뿐 아니라 조작 냄새까지 풍기는 보도를 내보내면서 김대중에 대한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데 주력했다. 한국 현대사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런 왜곡 보도로 국면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이 사례는 그 위급한 순간에도 국민과 나라를 걱정하기는커녕 보수 세력의 대선 승리에만 집착한 보수 언론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론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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