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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가 통찰력 있게 그려낸 여성 서사를 통해 여성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여성에게 의미 있는,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여성 서사가 우리 삶에 스며들길 기대합니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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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82년생 김지영> 관련 기사 댓글창엔 늘 비난이 가득했다. 가장 빈번한 비난은 이런 류.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다 겪었을 리 없다. 이런 거짓말을 읽고 공감하는 여자들이 한심하다.' 그렇다면 난 한심한 것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었다. 소설을 읽지도 않고 김지영에 공감하고 있었으니.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소설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는 알고 있었다. 수기 또는 르포 같은 소설. 소설의 주인공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82년생 김지영.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한국 여성인 김지영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여러 사건들, 그리고 경험들.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나는 김지영의 삶이 스르륵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치 지난 내 삶이 그려지듯. 1980년대에 태어난 나와 수많은 김지영들의 공통 과거, 그리고 그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전해지는 공통 감각.

그렇기에 일부 댓글러들이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겪었을 리 없다"며 소설을 폄훼할 때, 나는 그 한 사람이 겪은 일들을 자연스레 떠올리며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을 지금껏 읽지 않고 있었다. 굳이 소설로 읽지 않아도 김지영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다 알 것 같았기에.

영화가 개봉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끝내 읽지 않았을 소설을 이번에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는 것을. 나는 김지영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놀랐다. 한 여성이 자신의 평범한 삶을 이야기한 소설에 분노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다는 사실에. 그들은 여자의 삶에 얼마나 무지했던 걸까. 

일부 댓글러들은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소설 속 김지영의 삶(정확히 말하면 김지영이 보고, 듣고, 겪은 삶)은 우리 시대 여성들에겐 평범한 것이었다. 내가 겪지 않았더라도 내 친구가, 내 친구의 친구가 겪은 평범한 이야기들.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내 삶과 김지영 삶의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다. 이를테면, 김지영 친할머니의 손자와 손녀의 차별. 우리 집엔 딸만 둘이라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나에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조부모의 외면. 내가 태어났을 때 친할아버지는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대체로 비슷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의 성추행, 길에서의 성추행, 학교에서의 성추행, 바바리맨, 남자 선생님들의 브래지어 끈 감시. 여자가 어쩌고저쩌고, 몸가짐이 어쩌고저쩌고. 

김지영은 대학에서 선배 차승연을 만난다. 차승연이 보여준 에피소드 역시 익숙하다. 차승연은 "특별 대우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여학생들도 똑같이 일 시키고 기회도 똑같이 달라고, 점심 메뉴 선택 같은 것 말고 회장을 시켜 달라고 말"하는 선배였다. 여자들은 때때로 '꽃'이 되기 싫은데도 얼떨결에 '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알다시피 '꽃'엔 목소리가 없다. 목소리가 없는 '꽃'에 남자들은 목소리를 내야 할 자리를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내가 대학에서 만난 남자 선배들은 거의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평범하게 선량했다. 아마 우리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이렇듯 선량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선량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미묘한 차별을 담아 하는 발언들.

여중, 여고를 나온 나는 공대 여자가 되자마자 두 개의 정체성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선배들은 농담 투로 내게 말했다. 남자가 될래, 공주(꽃)가 될래. 나는 남자가 될 마음도 공주가 될 마음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만약 뭐 하나라도 되어야 한다면 남자가 되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분주했고(나는 그때 '미소지니'라는 말은 몰랐지만, '공주'라는 말에 여성을 경멸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한편 너무 남자 같아지면 '남자답다'는 주의를 들을까봐 마음이 불편했다.

대학 생활 4년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지난 4년을 미묘한 혼란 속에서 지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늘 나의 행동과 태도를 점검했는데, 그것의 일부는 남자 쪽에 가까웠기에 주의해야 했고, 또 다른 일부는 공주 쪽에 가까웠기에 역시 주의해야 했다.

그저 생긴 대로 살다가 대학을 마친 남자 동기들과 달리, 나는 지난 4년간 내가 어떻게 생긴 애였던 건지 거의 다 잊어버릴 뻔했다. 그렇더라도 불필요한 혼란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혼란을 겪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금 감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남자도 공주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그렇기에 회사에 입사하고부터 나와 김지영은 사실상 많은 부분 달라진다. 우리는 성격도, 또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 해야 할 때도 말을 하지 않는 김지영과 달리, 나는 적어도 쌓이고 쌓인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이십대 중반 이후의 나는 김지영이 아닌 김은영(영화 속 김지영의 언니)과 더 닮아갔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서 묘한 거리감을 느끼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꼼짝없이 당하고 말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주변 여성들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딱히 섬세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여자들이 내게 소곤소곤 (때론 울분에 차서, 때론 유머러스하게)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곤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소설 속 김지영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그녀들은 커피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나에게 고발하듯 말해온 것이다.

소설 속 김지영이 결혼 후 겪은 이야기들은 내 지인들이 내게 고발해온 이야기들과 같거나 비슷하다. 결혼 1년 만에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 그녀, 시가에서 하녀 취급받은 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 아이가 생기자 어쩔 수 없이 경력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던 그녀, 반대로 경력이 단절될까봐 일에 매달리느라 아이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힘듦을 겪어내고 있었지만, 그녀들 대부분은 결혼과 동시에 신분이 하락한 상황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나 역시 놀랐다. 세상이 변한 줄 알았는데 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소설에서 김지영은 생각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저마다의 의미로 이 소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내게 이 소설은 그간 여자들이 서로에게만 소곤대던 이야기를 세상을 향해 건넨 하나의 시도다. 김지영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그녀들.

소설 속 김지영은 많은 순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을 '씹던 껌' 취급하던 선배와 마주쳐도 입을 닫았고, 아이를 갖게 돼 출근 시간이 늦어지자 "와, 좋겠다"고 말하는 남자 동료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겉으로는 말하지 못했다". 배가 부른 채 지하철에 탔다가 욕을 먹은 뒤에 눈물을 쏟으며 도망치듯 내려버리는 사람이, '맘충'이란 소리에 대거리 한 번 못하고 자리를 뜨는 사람이 김지영이었다.

수많은 김지영들은 침묵하길 종용받거나, 선택했다. 침묵의 결과, 세상은 김지영들을 함부로 대하며 마음껏 조롱할 수 있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녀가 있었나. 세상은 김지영들을 편의대로 다루기도 했다. 어떨 때는 맘충이랬다가, 어떨 때는 고귀한 모성애 운운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김지영이 참고 참다 말이라도 한마디 할라치면 온갖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82년생 김지영>에 쏟아진 악의 가득한 말들, 이 소설을 읽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저주 섞인 말들처럼.

그래서 김지영들은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요즘 김지영들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자주, 크게 들리는가. 그건, 작가이자 행동가 오드리 로드가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말했듯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 주지 않는다"는 걸 그녀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부 댓글러들은 이런 불만을 쏟아내기도 한다. 왜 김지영만 힘들 거라 생각하냐, 왜 김지영 남편은 안 힘들 거라 생각하냐. 남자도 힘들다. 왜 남자들의 고됨, 고통은 무시하냐. 소설에서 그려지지 않았다고 그들의 고됨과 고통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단지 이 소설이 집중적으로 그려낸 삶이 김지영이란 여성의 삶이기에 남성들의 삶이 잘 보이지 않는 것뿐. 

그래도 남자를 깊이 다루지 않은 소설에 괜히 화가 난다면, 잠시 잠깐 당신이 아는 소설가들의 이름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아마 높은 확률로 당신이 떠올린 그 소설가는 남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성 소설가가 쓴 소설을 한번 찾아보자. 아마 높은 확률로 그 소설들의 주인공은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그 남자가 소설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살펴보자. 십중팔구 고된 삶일 것이다. 그는 세상과 싸우는 혁명가일지도, 아무 힘없는 소시민일지도 모른다. 뛰어난 소설가는 그 남자의 내면을 유려한 문장으로 공들여 그려냈을 것이다. 그간 수많은 소설이 그려낸 '삶'은 '남자의 삶'이었다.

소설 속 남자들의 삶이 다양한 층위에서 고려될 때, 여자들은 그 남자들의 곁에서 종이 인형처럼 납작해져 있곤 했다. 주인공 남자가 세상을 모험하는 사이 그녀들은 집 내부에 정물처럼 고여 있었다.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의 형태가 이것뿐이라는 듯이, 때론 희생과 헌신의 천사가 되어, 때론 맥락없는 악처가 되어, 내면 없는 사물처럼.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컷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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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를 보며 자주 울컥했다. 카메라가 김지영을 조용하고도 깊게 응시하는 시선 때문이었다. 김지영은 가사 노동, 육아 노동을 하는 사이사이 멍하니 앉아 있거나 서 있는다. 그 모습을 우리는 지켜본다. 김지영의 내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궁금해 한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그간 소설과 영화에서 수없이 납작해져 왔던 수많은 김지영들이 이 소설과 영화에선 내면이 있는 인물이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 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다고. 당신들이 보기엔 괜찮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도 괜찮은 줄 알았지만, 실은 나, 당신들처럼 삶이 너무 버겁고, 그래서 지쳤고, 그래서 아프다고.

앞으로의 김지영들 

영화는 소설과 여러모로 다른 길을 가지만 특히 마지막이 다르다. 영화는 희망을 말하고, 소설은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김지영은 사려 깊은 조력자들에 힘입어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 내디딘다. 김지영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 속 김지영은 한 발 내디딜 수는 있었다. 

소설에서 김지영은 여전히 "미로 한가운데 선" 채다. 김지영의 이야기를 다 들은 40대 남성 정신과 의사는 그녀에게 공감하며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그보다 공부도 잘했던 전문의 아내는 경력을 포기하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다.

40대 남성 의사는 "아내가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김지영씨도 그랬으면 좋겠다"까지 생각을 진전시킨다. 하지만 만약 김지영 같은 경력 단절 기혼녀가 그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면? 그는 그녀를 뽑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두 문장은 이렇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일부 댓글러들이 분노하는 포인트엔 '왜 고생 한번 안 해 본 젊은 여자들이 김지영에 공감하며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느냐'도 있었다. 위의 두 문장이 의미하는 바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보다 젊은 김지영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이 목소리 내기를 멈춘다면, 침묵한다면, 그녀들 또한 82년생 김지영처럼 언젠가, 미로 같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발도 내딛지 못한 채 망연히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 (인터파크 리커버 특별판)

조남주 지음, 민음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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