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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 흉상및 공적비. 사진=양북면발전협의회 김재동 회장 제공.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 흉상및 공적비. 사진=양북면발전협의회 김재동 회장 제공.
ⓒ 경주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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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유일한 의열단원으로 전해지는 김종철 선생의 공적비가 고향 양북면에 건립됐다.

선생의 출생지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450번지. 공적비는 고향 양북면 복지회관에 세웠다. 경주시 예산 5000만원을 들였다. 장손 김영만씨는 각종 기록을 찾아내 가장 큰 역할을 했고, 양북면 발전협의회(회장 김재동)도 힘을 보탰다. 15일 주낙영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갖는다.

김종철 선생이 1920년 국내에서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함께 하고 망명했다가 국내 잠입 후 체포된 감포읍 나정리 김봉규 선생(2018년), 또한 김봉규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감포읍 팔조리 정래영 선생의 공적비(2017년)에 이어 감포, 양북 출신 독립운동가 3명의 공적비가 차례로 세워지는 것이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 사료관에 등록된 경주와 월성이 본적인 독립운동가는 53명. 이 가운데 일제에 가장 비타협적인 투쟁활동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경주 출신 독립운동가는 김종철 선생이 유일하다.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터는 현재 다른 사람 소유의 주택이 있다고 한다. 

선생은 어떤 인물일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1888년 12월12일 태어나 1941년3월10일 사망.

출생지는 경북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 450번지. 마지막 주소는 중국 봉천성.

공훈록에 김종철 선생은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돼 있다.

경주 월성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만주 봉천(奉天)으로 가서 동지 송두환(宋斗煥)·최해규(崔海奎) 등과 의용단(義勇團)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금차 국내로 돌아왔다.

1920년 12월 6일 동지 김봉규(金鳳奎)와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며 합천(陜川)의 부호 정달락(鄭達洛), 의령(宜寧)의 부호 남정구(南廷九)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던 중 남정구의 계략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러나 연행 도중 일본인 순사 갑비(甲斐)를 사살하고 조선인 순사 손기수(孫騏秀)에게 중상을 입히고 만주로 탈출하였다.

이어 상해로 가서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岩) 등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상해·만주 등지를 왕래하면서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게 전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몇가지는 알수 있다.

공훈록으로만 보면, 3.1운동 이후 만주로 가서 활동하다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활동 중에 경주 감포 출신의 김봉규 선생과 일본인 순사 갑비를 사살한 뒤 만주로 탈출했으며 의열단원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국했다.

유족들이 일제 고등경찰 요사, 국외용의조선인명부 등 각종 기록을 통해 확인한 선생의 활동은 경이롭다.

선생은 1914년 경주사립학교 남명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휘문의숙(현재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던 당시 선생이 선택한 것은 일신의 안일 대신 가시밭길 독립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 직후 중국으로 간 선생은 상해, 만주 봉천을 왕래하며 송두환, 최해규등과 독립의용단에 가입하고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0년 6월 서울에서 사회혁명당 창당에 가입했다.

그해 선생은 송두환, 정두희, 최윤동 등과 군사주비단을 조직한뒤 경주 출신의 김봉규, 정내영 선생 등을 규합하여 국내에서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그해 12월 6일부터 8일까지 감포읍 나정리 출신인 김봉규 선생과 경남 합천, 경남 의령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도중 순사부장 갑비(甲斐)와 한국인 손기수에게 체포돼 의령경찰서 신촌주재소로 연행되던 도중 김봉규 선생과 함께 갑비를 사살하고, 손기수에게는 부상을 입히고 만주로 피신했다.

그후 김봉규 선생은 1924년 임시정부의 밀서를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했으며, 임무를 마치고 고향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일경에 체포돼 그해 11월6일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옥살이를 했지만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상해로 이동한뒤 1921년 의열단에 입단한뒤 1935년 의열단이 공식 해체될 때까지 상해, 만주를 왕래하며 의열단 단원이자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조파 계열의 윤기섭, 김상덕 등 청년동지 60여명과 함께 대한청년동맹회를 결성해 일제 요인 암살, 임시정부 후원활동을 전개했고, 1924년에는 임시정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후 의열단원 김규산이라는 별명을 사용하며 1924년 11월 상해 임시정부 의무금 징수원으로 길림성에 파견돼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7년 남경에서 영남 유림대표인 김창숙, 의열단 간부 양건호, 이덕생 선생등과 함께 남경촉성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각종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1935년 의열단이 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재미대한독립당·뉴욕대한민단·미주국민회·하와이국민회·국민동지회 등 민족주의 단체가 총망라된 조선민족혁명당 출범으로 해산할때 까지는 의열단원으로, 그후에는 순국할 때까지 사회주의계열의 항일운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35년 일제 경찰이 요사시찰인물, 1936년 요 수배인물로 지목했지만 중국 각지를 누비며 활약했고, 그후 국내로 잠입해 함경북도 등에서 농민조합운동을 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가장 비타협적인 항일 투쟁을 벌인 것으로 전해지는 의열단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까지 지낸 경주 출신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 그러나 자세한 사망경위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35년부터 1941년 호적정리로 행방불명될 때까지의 활동, 사망경위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찾아내야 할 몫이다.

15일 그의 흉상과 공적비 제막은 경주 출신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의 치열한 삶을 기리는 동시에 아직도 전모가 드러자지 않는 선생의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 활동 전부를 복원하는 일의 시작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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