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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 김진국 선생이 옛 단바망간광산 현장식당(함바)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유족 김진국 선생이 옛 단바망간광산 현장식당(함바)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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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그들은 왜 가깝지만 먼 이웃이 됐을까(http://omn.kr/1ll6r)

2019년 11월 4일, 답사 둘째 날이다. 예사 때처럼 새벽녘에 잠이 깼다. 간밤에 고단하여 밀쳐둔 여행용 가방을 그제야 열고는 노트북을 꺼낸 뒤 첫날 행적을 정리했다. 그 정리가 끝난 뒤 시계를 보니까 오전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구내식당 아침은 6시부터 연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간밤 저녁식사를 할 때 음식을 담은 그릇이 매우 작은 것을 보고 '작은 것이 강하다'는 주제로 글을 썼다. 그런데 그때 카메라를 지참하지 않았기에 촬영을 하지 못했따. 그래서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뒤 플래시를 장착한 다음 2층 구내식당으로 갔다. 식당 직원이 아주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일본열도에 넘쳐흐르는 말이다. 일본말을 거의 모르는 나는 손짓으로 식당 내부를 촬영해도 괜찮은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토, 김 그리고 장난감과 같은 작은 접시와 그릇을 촬영했다. 그런데 간밤에 봤던 우동그릇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침 메뉴에는 우동은 없나 보다. 간밤에 찍어두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사실 나는 손 전화를 갖고 있었지만, 그걸로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왠지 사진을 모독하는 것 같아 무겁고도 번거롭지만 취재할 때는 꼭 DSLR 카메라로 촬영한다.

사진 촬영을 끝낸 뒤 식탁에서 아침을 드는데 바로 옆자리에 동행한 유족 두 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명함을 건네면서 내 또래의 유족에게 인사를 청하자 당신은 경기도 포천에서 온 김진국(79·시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분은 1945년 8월 24일, 아버지 김시형(사고당시 24세) 씨를 우키시마 침몰사고로 잃었다고 했다. 원래 고향은 경북 예천으로 아버지는 서울(당시 경성)에서 학교를 다녔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조선의 젊은이들을 학병이나 노무자로 잡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귀향하게 해 이웃 외가로 피신시켰다.

그런데 그 마을 구장이 주재소 순사에게 아버지를 밀고해서 1940년대 초에 일본에 끌려갔다. 2년 남짓 일본 탄광에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선 우키시마호를 탔다. 하지만 그 배가 침몰해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아픈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일본은 당신 아버지를 세 번이 죽인,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라라고 분개했다. 내가 "이제는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조심스럽게 묻자, 자기도 "'용서'가 좋은 줄은 잘 안다"라면서도 "가해자가 그들의 만행을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할 때에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는 단호한 말이었다.
 
 단바망간광산 갱도 어귀.
 단바망간광산 갱도 어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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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망간기념관 답사

둘쨋날 일정은 오전 단바망간기념관 답사, 곧 강제동원 현장인 현지 광산답사, 오후는 주 행사인 우키시마 호 순난(殉難) 현장 추도제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온 추도제 참석 관계자 일행은 오전 8시 50분 전세 버스를 타고 교토시 외곽 단바지역에 있는 단바망간기념관으로 떠났다. 버스는 오사카시와 교토시 외곽도로를 지났다.

이번 3박 4일의 추도제 모임 일정은 일체의 현지 관광은 배제됐다. 나는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간혹 보도에 따르면, 공직자들이 해외 연수나 무슨 무슨 이름의 해외 행사에 본래의 목적보다 관광이나 쇼핑으로 물의를 빚는 것을 자주 봐왔다. 이런 거룩하고도 엄숙한 추도제를 핑계로 유족들이나 관계자들이 그런 관광이나 쇼핑에 마음을 판다면 아마도 순난자 영령들이 하늘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일본의 농촌 풍경.
 일본의 농촌 풍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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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망간기념관(옛 단바망간광산)은 교토시 외곽 산간에 있어 가는 길에 일본의 농촌을 실컷 돌아볼 수 있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농사력과 비슷해 이미 추수를 끝낸 들판이 고즈넉했다.

일본 농촌도 뭔지 쓸쓸한 게 빈집들이 드문드문 내 눈에 띄었다. 출산율 감소와 이농현상은 우리나라도 심각하지만 일본은 더 심각하다고 한다. 텅 빈 들판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갱도 어귀의 노동자상.
 갱도 어귀의 노동자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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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강제동원이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히틀러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 전운이 점차 세계 전 지역으로 옮아갔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은 일본상품의 소비처로, 군수물자를 생산 조달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1937년 7월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부족한 자원을 메우고자 수많은 조선인을 군인으로, 노동자로, 심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로 침략전쟁에 동원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국민징용령 공포하여 조선의 청장년들을 지원병, 징용, 보국대, 근로동원,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내몰았다.

 
 단바망간기념관 자료실 게시 및 전시물들 1.
 단바망간기념관 자료실 게시 및 전시물들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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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는 150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은 탄광이었고, 다음은 금속광산, 토목공사장, 군수공장 순이었다.

일본은 강제 동원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군대식으로 편성하여 통제했다. 작업장이 군사시설 공사인 경우에는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공사장 주변에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둘러치기도 했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군사기밀 누설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하기도 했다. -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발간 <일제강점기> 562쪽

 
 단바망간기념관 자료실 게시 및 전시물들 2.
 단바망간기념관 자료실 게시 및 전시물들 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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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 후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기업과 군인‧군속을 동원한 일본 정부에는 조선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미수금이 남아있었습니다. 열악한 강제노동 현장을 견디지 못하고 조선인 노무자들이 도주할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10엔 정도의 용돈 외에는 모두 저금'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기업의 미지급금은 정부에 의해 법무성에 공탁되었는데 그 총액이 2억 엔에 이릅니다. 패전 후 작성된 일본 대장성의 <경제협력-한국 105호 노동성 조사 조선인에 대한 임금미불채무조>와 노동성의 <조선인의 재일자산조사보고서철>에 미지급금의 실태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이 실태를 감추고 오히려 한국 측에 미수금 내역과 총액을 대라는 식으로 한국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정부는 '가해의 기록'을 협상카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정치적 타결로 매듭지어지면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수금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엮음 <강제동원> 29쪽
 
 
 우키시마호 유족 및 관계자들이 단바망간기념관 이용식 관장의 설명을 듣고 있따.
 우키시마호 유족 및 관계자들이 단바망간기념관 이용식 관장의 설명을 듣고 있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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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역사를 후세에게 바로 가르쳐야

이런저런 참고자료를 들춰보는 사이 오전 11시 30분 무렵 우키시마호 유족과 관계자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단바망간기념관(옛 단바망간광산)에 도착했다.

이 기념관은 재일동포 고 이정호 선생이 일본의 강제동원 역사를 실증하기 위해 복원한,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유일한 '역사의 장'이다. 이곳을 지키는 이용식 관장은 눈물어린 설명을 이어갔다. 일제시대 일본 국내에는 약 2만 개의 광산이 있었다는데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강제동원 조선인들이었고, 일부는 중국인이었다.

이 광산에서 나오는 망간은 무기 제작에 필수품으로, 이것이 들어가야 형질이 단단해 진다고 한다. 이 기념관을 만든 목적은 일본을 위해 만든 것인데, 되레 일본 우익단체로부터 많은 방해를 받고 있단다.
 
 단바망간기념관 어귀.
 단바망간기념관 어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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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장의 설명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광산 어귀에 있는 현장식당(함바, 飯場)이었다. 마침 그 현장식당을 둘러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김진국 선생에게 소감을 물었다.

"일본정부는 정말로 깊이 반성하고 강제동원자와 그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이제 각오를 새로이 다짐해야 합니다. 어금니를 꽉 악물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하여 다시는 우리 국민이 남의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이런 치욕을 받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런 치욕의 역사를 후세에게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함바 내부, 광산 노동자들의 밥상.
 함바 내부, 광산 노동자들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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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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