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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오부면 일물리 예전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다.
▲ 산청군 오부면 일물리 예전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다.
ⓒ 민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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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는 그 위의 할아버지 할아버지대부터 오부면 원방리에 살았다. 아버지가 중학생 때쯤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소년기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걸어서 문중행사나 성묘를 다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외면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들추고 싶지도 않은 기억의 파편에 불과하다.

올해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한 번은 늦가을 묘사를 지내러 간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증조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해야 된다고 해서 한여름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원방리에서 일물은 약 2km 되는 가파른 오르막 산길이다. 그 중간 왼편에 산소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까마득한 계곡 바닥에는 1960년대에 규산질 비료 원료를 캐내는 광산이 있어 좁은 시멘트 다리를 만들어 철 구루마로 실어냈다고 한다. 나의 기억에는 그 잔해만 남아있다. 지금은 여기에다 작은 댐을 만들려고 공사가 한창이다.

증조할아버지 산소는 수몰되지는 않지만 도로가 지나가게 되어 이장을 해야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며 일물 마을사람들이 모두 부역을 하여 길을 닦았다. 길이 넓혀졌지만 여전히 차량은 다니기 힘들었고, 오르막이라 쉽게 찾아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어제 일물을 다녀오고 아침을 먹으며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린다.

"일물이 예전에는 큰 마을이었지. 원래 일물 사람들은 부곡(오전리)으로 다녔어. 이쪽은 길이 없어서. 부곡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큰 바위 두 개가 서있는데 문바위라 불렀고, 그게 일물의 입구가 되는 거지."

일물은 천연의 요새다. 해발 450미터에 어느 쪽에서도 접근하는 길이 없었다. 지금은 원방에서 올라가는 길이 2015년에 포장되어 차량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다. 또한 부곡방향이나 차황면 궁소로도 임도가 나있다.

"일물은 피난처였지. 자의든 타의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6.25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빨치산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고."

지금은 20여 가구, 5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일물(一勿)'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왜, 일물이라 했을까? 한 가지가 없다는 말인지, 하나는 하지 말라는 말인지? "윗마을은 반달 모양이라 반월(半月), 아랫마을은 구름이 떠있는 것과 같아 운전(雲田)이라 했는데, 뒤에는 월륵(月勒)이라 부르다, 조선 말엽 어느 현감이 월(月)을 파자(破字)하여 일물(一勿)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으로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다.

옛날 사람들은 '얼리기'라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도 왜 얼리기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렀다고 기억하신다. 얼리기는 월륵-월르기-얼리기로 말의 변화를 대강 유추해볼 수는 있겠다.

심심산골에 세상과 단절된 피난처. 달과 구름만이 경계를 이룬다는 '월륵'이란 이름이 나는 좋은데, 이름도 모르는 그 현감은 왜 일물이라 바꿨을까 물어보고 싶어진다. 분명 무슨 뜻이 있었을 것인데... 깊은 산중이라 해가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여기서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
 
담배건조막 마을 입구에 상징처럼 우뚝 서있다.
▲ 담배건조막 마을 입구에 상징처럼 우뚝 서있다.
ⓒ 민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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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담배건조막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다. 돌과 흙으로 높이 담을 쌓고 나무로 불을 지펴 잎담배를 건조시켰던 곳이다.

궐련이 나오기 전까지는 바삭해진 이 잎담배를 곱게 가루를 내어 곰방대에 재어서 피우거나, 네모나게 자른 종이에 가루를 놓고 김밥 말듯이 말아서 피웠다. 나의 할머니는 곰방대로 피우셨고, 할아버지는 종이에 말아서 피셨는데, 종이 끝에는 침을 살짝 발라 떨어지지 않게 붙였다. 어린 나에게 그 담배 향은 지금과는 다른 오묘한 향이었던 것 같다.
 
마을 공동우물 여인들의 공간이자 마을 뉴스를 공유하는 곳
▲ 마을 공동우물 여인들의 공간이자 마을 뉴스를 공유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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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터 벽에 새긴 석각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가 없다.
▲ 우물터 벽에 새긴 석각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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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왼편에 우물이 있다. 지금은 지붕을 만들고 뚜껑도 덮었지만 바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사용하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아침, 저녁이면 아낙들이 물동이를 이고 나와 머리 위에 짚으로 만든 따바리(똬리의 경상도 방언)를 놓고 그 위에 물동이를 얹었다. 한 손으로는 물동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흐르는 물을 훔쳐가며 바삐 걸었다.

간혹 남자들이 물지게로 져다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우물은 여인들의 공간이다. 위쪽에서는 야채를 씻고 아래쪽에서는 빨래를 했다. 우물가에서는 밤새 일어난 동네 뉴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싸늘한 겨울날씨에 차가운 물 한 바가지 떠서 벌컥벌컥 마시니 냉기가 목 줄기를 타고 넘어가며 간밤의 숙취를 모두 해소시켜 주는 느낌이다.

한쪽 벽면 돌에다가는 '일물'이라는 글자를 새겨두었다.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조금은 허물어진 집들이 군데군데 보여 그냥 걷기만 해도 좋다. 동행한 김성애씨가 이 동네 이장님을 안다고 한다. 60세쯤 되어 보이는 박순희씨는 얼굴만 봐도 이 동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순박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이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한 집을 들렀다. 주인 없는 빈집이지만 박순희씨의 안내로 들어갔는데 일행들 모두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 집은 가히 농가박물관이라 해도 될 정도로 하나하나 기억을 되살려준다. 대문간에 있는 발로 딛는 홀깨(벼훓이의 경상도 방언), 아궁이와 벌꿀통, 외양간까지 이런 것들은 잘 보존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에 모두의 마음이 모였다.
 
작은방 아궁이 좌측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작은방의 '-'자 형 구조로 작은방 아궁이는 주로 겨울에는 쇠죽을 삶는 용도였다.
▲ 작은방 아궁이 좌측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작은방의 "-"자 형 구조로 작은방 아궁이는 주로 겨울에는 쇠죽을 삶는 용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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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행선지로 가야한다. 박순희씨께 추운 날씨에 안내까지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바로 안쪽이 자기 집이라고 들어가서 밥을 먹고 가란다. 반찬은 없지만 김장김치가 있으니 차려줄 수 있다고 하신다. 다음 일정을 핑계로 밥은 먹고 갈 수가 없다고 하니 마을에 찾아온 손님들께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대접해야 되는데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이것이 우리의 인심이고 일물의 정이 아닐까 싶다.

일물은 순박한 사람들만이 사는 곳이라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 나름 현대적 해석을 해보며 떠났다. 봄에 다시 찾아간다면 일물은 전혀 다른 색깔로 또 나를 반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길 위에서는 구도자가 된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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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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