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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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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이 밝았다. 날씨는 화창하였다. 이날 동학농민혁명군은 예상과는 달리 별로 힘 안들이고 호남의 심장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홍계훈이 모든 병졸을 거두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주성은 텅 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김문현은 전날에 감사의 감투가 날아간 처지이고 후임자는 아직 부임하지 않아서 지휘체계도 공백상태에 빠져 있었다.

농민군은 물밀듯이 전주성을 차지했다. 그리고 전봉준과 김개남 등 지도부는 선화당에 자리잡고 호령했다. 전주성 안에 있던 관노ㆍ사령들은 춤을 추며 좋아하였다. 그들은 지도부의 지침을 들뜬 마음으로 듣고, 이어 농민군들을 이끌고 신바람이 나서 전주의 관아들을 안내했다.

농민군은 민활하게 움직여 모든 공공건물을 접수했다. 그들은 무기고에 들이닥쳐 무기를 꺼내왔고, 창고를 헐어 곡식을 실어 내왔고, 감옥을 부수어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그들은 또 지도부의 강력한 지시에도 아랑곳없이 횡포를 부리던 양반ㆍ부호와 그 하수인인 영리(營吏)들은 농민군과 관노ㆍ사령들에게 곤욕을 당했다.

농민군들은 곧바로 전주 전보국으로 달려갔으나 전보국원과 시설은 이미 철거된 상태여서 기물만 부수고 돌아왔다. 이로 인해 관변에서는 뒷날 김제의 전보국 시설을 이용하여 겨우 중앙에 보고할 수 있었다. (주석 8)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 전주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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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전주성이 함락당한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이 사실을 보고받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광경을 『전주부사(全州府史)』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일 (음력 4월 27일) 적도(賊徒)는 나아가 전주 삼천에 둔하고 다시 전주성으로 몰려와, 정오경 먼저 부서(府西)의 완산을 점거, 나팔을 불고 부내(府內)를 향하여 소총을 난사함으로써 시장부근은 형용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서민들은 앞을 다투어 피난하였다.

경기전 전의에는 도도군(道徒軍)의 포성이 우뢰와 같이 진동하고 완산 정산에 이른 도도군은 무려 수만 명이 일자로 진을 펴고 서문으로 몰려들어, 성안의 부민들과 충돌, 호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당시 신임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해 오지 않았고, 전 감사 김문현이 감영에서 군령을 발하여 부민과 더불어 4문을 수비하였다.

모인 자들 중에는 혹은 궁시를 가지고, 혹은 성벽 위에 많은 돌을 옮겨 이를 던져 몰려오는 적(동학농민군)을 막으려 하였고, 또 남문 밖 성벽에 연해 있는 20~30호의 민가를 방해가 된다고 하여 성병(城兵)이 스스로 이를 소각하는 등 방어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부 관속 가운데는 몰래 적과 내응하는 자가 나와 마침내 강적을 지탱할 방법이 없어 겨우 포 일발을 응사했을 뿐, 힘없이 궤주하여 적도 3천여 명이 조수와 같이 남문으로부터 성내로 쇄도하였다.

한 일본인 연구가는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황토현의 싸움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둔 동학군은 다시 백산에 집합하였는데, 여기에서 군대의 위용은 정리되었고 사방에서 동지를 많이 불러 모았다.

큰 승리의 보고가 일단 사방에 전해지자, 무장에서 군대를 일으켜 태인과 부안 지방을 횡행하였다. 손화중은 손천민과 함께 와서 합쳤으며 이상옥은 보은에서 봉기하였다. 최경인은 태인에서 참가하였으며 김개남은 남원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정종혁은 고부에서, 허공집은 공주에서, 임정학은 정읍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김봉년은 김제에서, 오하영은 고창에서 동지를 모아서 합쳤으며, 배규인은 무안에서, 진우범은 만경에서, 김덕명은 금구에서 일제히 호응하였다. (주석 9)


전봉준의 군대는 4월 15일 삼삼오오의 대오를 정리하여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의 5색 깃발과 경천안민(敬天安民)의 깃발을 세우고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마치 십자군의 행진, 성스러운 교도들의 행진과도 같았으며, 태인, 장성 등 여러 고을을 지날 때마다 동지를 모아 전주로 전진하였다.

행군하는 길가에는 남녀 모두 축복하며 이들을 맞이하였고, 장성을 지나 전주에 가까울 무렵에는 전체 군사가 약 1만 명에 도달하였다. 술을 싣고 역머리에 마중나온 사람도 있었고, 처자와 친척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참가하는 동지를 배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인의(仁義)로운 왕자(王者)가 군사를 일으킨 것과 같이 길가 곳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주석 10)


주석
8>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②, 투쟁-반봉건 변혁운동과 집강소」, 『역사비평』, 계간8호, 316쪽, 1990.
9> 문순태, 앞의 책, 131~132쪽, 재인용.
10> 『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1)』, 176~17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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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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