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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에 전국 3대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대구서문시장의 입구 야경
 조선 시대에 전국 3대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대구서문시장의 입구 야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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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 있으면 설이다. 근래 들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설은 여전히 우리 겨레 최대의 명절이다. 예전에는 설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장에 갔다. 설빔도 장만하고 제수용품도 샀다. 이때 장은 요즘 말로 시장이다.

시장(市場)은 시(市)와 장(場)이 결합된 말이다. 시는 상설 판매장, 즉 상가 건물들이 늘어선 곳이고, 장은 가게들 사이의 너른 마당이다. 그 마당을 장마당이라 불렀는데, 5일장·7일장 같은 장이 서는 마당이라는 뜻이다. 장마당을 줄이면 장터가 된다. 시터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상가 건물이 상존하는 까닭이다.

시장은 상가 건물들과 장터 모두를 가리키는 말

요즘은 시라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를 지칭하고, 읍(邑)은 군청이 있거나 인구 2만 이상의 작은 도시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물이 넷 이상 있는 곳을 읍이라 했다. 아득한 옛날에도 읍은 사람들이 제법 모여 살지만 현대의 시보다는 작은 고을을 가리켰던 셈이다. 옛날에는 시라는 행정 단위가 없었으니 대구읍성·청도읍성처럼 읍이 붙은 지명을 가진 고을은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다고 보면 되겠다.

시는 단군신화에도 등장한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3천 무리를 이끌고 지상으로 내려와 정착했는데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다. 머나 먼 상고 시대에 최소한 3천 명 이상이 한 곳에 거주했으니 읍 정도가 아니라 도시 수준이었다고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읍은 시보다 인구가 적은 곳

영어에서는 시를 시티(city)라 한다. 시와 시티는 발음이 거의 같다. 한자어 시에 해당되는 우리 고유어는 마실이다. 마을을 뜻하는 마실에도 '시'가 들어 있다. 우리말 어머니와 영어 마더(mother), 한자어 모(母)가 모두 발음이 닮았다. 언어의 자의성이 낳은 결과이다. 어떤 사물이 특정 이름을 가지게 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고 그저 우연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시장의 시와 city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는 마켓(market)의 성격이 강하다. 즉 서문시장은 대구읍성의 서문 밖에 있는 마켓이라는 뜻이다. 대구읍성의 서문인 달서문은 서문로와 서성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서문시장이 요즘처럼 대신동에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서문시장의 동산병원 쪽 입구
 서문시장의 동산병원 쪽 입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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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은 본래 이름이 '대구장'이었다. 대구장은 대구읍성 북쪽 성벽 중간쯤 지점의 공북문 밖에 있었다. 그 후 17세기 후반인 1679년(숙종 5년) 장이 점점 커지자 서문 밖으로 옮겨졌다. 대구장이 조선 시대 3대 시장으로 알려질 만큼 거대하게 발전하여 서문시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임진왜란이 크게 이바지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지금의 부산·대구 ·울산·경북·경남 전체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군사 요충지라는 점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도 대구에 장을 보러 왔다. '전라도에 풍년 들면 대구사람들 돈 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구 서문시장이 점점 더 커진 까닭

서문시장은 다시 지금의 대신동 위치로 옮겨진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날은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그 이후 일제는 서문시장만 보면 대구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여 참을 수 없었다. 일제는 1920년 12월부터 계성학교 옆의 큰 호수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비산동과 내당동의 우리 고분들을 마구 파헤쳐 그 흙으로 물을 덮었다. 결국 1922년 이래 서문시장은 현재 위치로 강제 이전되었다.
 
 대구약령시의 서문. 1910년대 최고의 무장항일운동단체 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은 이 문 인근에 상덕태상회라는 대규모 곡물상을 차려 독립운동 자금도 모으고, 독립지사의 연락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구약령시의 서문. 1910년대 최고의 무장항일운동단체 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은 이 문 인근에 상덕태상회라는 대규모 곡물상을 차려 독립운동 자금도 모으고, 독립지사의 연락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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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시장이라면 약령시도 빼놓을 수 없다. '대구 약령시'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큰 한약 도매시장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는 점에서 약령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약령시의 이름은 시(市)가 city보다 market과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약령시도 처음부터 현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령시는 17세기 중엽인 1658년(효종 9) 경상감영 옆인 지금의 중부경찰서 북쪽에 설치되었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인 1908년 지금의 약전골목으로 옮겨졌다. 이때는 일본인들의 청탁을 받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이 1906∽7년 대구읍성을 자기 마음대로 부순 뒤였다.

서문시장도 약령시도 일제가 강제로 이전

결국 약령시는 1941년에 폐쇄된다. 1910년대 최고의 무장항일운동단체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이 상덕태상회라는 큰 곡물상회를 약령서문 인근에 설립해놓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제가 약령시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약령시는 1978년에야 다시 설치되었다. 일제의 상처가 너무나 깊었던 까닭이다. 약령시의 부활은 해방 직후부터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칠성시장이나, 6 ‧ 25 이후 장이 성립되는 교동시장보다 늦었다. 교동시장은 전쟁통에 흘러나온 미군부대 물건들을 많이 다룬다고 해서 양키시장이라고도 불렀다.
 
 교동시장의 모습. 사진 오른쪽 앞 이정표에는 '교동시장-양키골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교동시장의 모습. 사진 오른쪽 앞 이정표에는 "교동시장-양키골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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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는 삶의 현장이다. 대구에는 약 148곳의 재래시장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많아? 듣는 이들이 대부분 공감하지 못하는 숫자이다. 그만큼 유명무실하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시장이 서양식 대형 마켓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서문시장과 약령시를 강제로 이전시키고 폐쇄했던 일제의 나라 일본에는 서양식 대형마켓이 별로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어느 정도만 되는 곳이면 빠짐없이 대형마켓이 자리를 잡지만 일본인들은 그런 시(市)를 설치하려는 정치인이 있으면 선거에서 반드시 낙선시킨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는 우리가 일본에게서 배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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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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