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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들라마 '녹두꽃' 한 장면 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 SBS들라마 "녹두꽃" 한 장면 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 추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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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폐정개혁을 요구하며 전주성을 점령하고 관군과 대치하고 있던 동학군 지휘부는 정세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원세개를 통해 청국에 출병청원의 소식이 속속 전해졌다.
 
동학농민군이나 새로 부임하여 삼례역에 머물고 있던 전라감사 김학진에게는 서로 상충되는 고충이 있었다.

동학군의 경우, 기대하던 북접의 호응이 없었고 완주싸움의 패배로 농민군의 동요가 일어났다.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성내의 양곡이 바닥나고, 지방 농민군의 호응도 없었다. 당시 동학교단은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2대교주 최시형의 북접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접은 이때까지도 남접의 무장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다.
 
남접 지도부는 전주성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외부와 차단됨으로써 오히려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또한 농번기가 되면서 농민들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데다, 청군의 출병소식에 이어 일본군도 출병한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농민군 진영은 크게 동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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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진의 경우는, 조정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거나 화해의 방도를 강구하여 해산조처하라는 압력이었다. 전주성은 조선왕조 선대의 본향이라 함부로 대포를 쏘아 댈 처지도 못되었다. 그래서 김학진은 동학농민군 지휘부에 밀사를 보내어 자신의 뜻을 전하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맞서 지휘부는 「소지문(訴志文)」을 보내어 자신들의 뜻을 전하였다.

소지문(訴志文)

저희도 이 나라 선왕의 유민(遺民)이라 어찌 옳지 못하게 위를 범할 마음으로 편안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저희의 이 거사는 비록 놀랄 만한 일인 줄 아오나 출병을 해서 마구 잡아 죽이는 것은 누가 먼저 한 것입니까?

전 도백(道伯)이 허다한 양민을 죽이고 도리어 저희들 죄라고 이르니 덕화(德化)를 펴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무고한 백성을 많이 죽인 것은 죄가 아니고 무엇이며 가짜 인부(印符)로 방목(榜目)을 붙이니 손가락으로 쓴 것도 인부가 될 수 있습니까?
 
대원군을 받들어 국정을 감역케 하자는 것은 이에 합당하거늘 어찌하여 반역이라고 말하며 잡아 죽입니까? 임금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선유하는 종사관이 임금님의 말씀은 보여주지 아니하고 다만 토벌한다, 잡아가둔다, 병정을 부른다 하는 문자만 보이니 만일 참인 것을 알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주 감영에 대포 놓은 것을 가지고 저희들 죄라고 하지마는 성주를 시켜 대포를 놓아 경기전(慶基殿)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

성에 들어가고 무기를 수집한 것은 신명을 방어하는 데 불과한 일입니다. 눈 한번 흘긴 것도 반드시 앙갚음을 한다는데 조상의 무덤을 파고 백성의 재물을 토색하는 것은 저희가 가장 미워하고 엄격히 금하는 바입니다.
 
탐관오리가 아무리 학정질을 해도 정부에서는 못 들은 척하고 내버려두어 백성들만 생명 재산을 보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탐관오리를 낱낱이 없애버리는 곳인데 봉산(封山)에 진을 친다거나 우물을 파는 것은 국법으로 금한 바 있거늘 각하께서 고의로 범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느끼고 깨달아서 죄를 속하게 하는 방법은 각하께서 선처해서 나라에 보고하는 것 인즉 모든 백성들이 한가지로 바라고 치하하는 일이 아닙니까? 말을 이만 그칠 뿐입니다.

제중생등의소(濟衆生等義所) (주석 5)

 
 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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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협상의 기운이 감돌았다.

은밀하게 양측의 밀사가 오갔다. 관군 측에서는 그 사이에도 거듭 「효유문」을 보내어 농민군 진영을 교란시키는 전략을 병행하였다. 「효유문」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앞뒤의 효유가 이렇게 곡진한 데도 너희들이 끝내 의혹을 풀지 않는도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에 의심을 두면서 망설이고 좇지 않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너희들이 살기를 도모하면 속히 성문을 열 것이요, 흩어진다면 결코 좇아가 잡지 않을 것이리라. 또 각 고을에 신칙(申飭) 해서 가로막거나 잡아들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금 이는 왕명을 받들어 거행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거짓말로 너희들을 속이겠는가. (주석 6)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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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은 또 앞의 「효유문」과 비슷한 내용의 「방문」을 곳곳에 내다 걸어 농민군의 투항을 재촉하였다.

전후해서 효유했는데도 너희들은 끝내 의심을 풀지 않고 있다. 아무런 의심이 없는 것을 의심하고 머뭇거리면서 좆지 않으니 어찌 그렇게 미혹하며 어찌 그렇게 어리석은가? 너희들이 목숨을 구하려거던 곧 성문을 열고 나가라. 결코 쫓아 잡지 않을 것이며 또 각 고을에 말하여 저해함이 없게 하리라. 이제, 이미 왕명을 받들었으니 내 어찌 너희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다시 효유하여도 오히려 의혹을 풀지 않고 개개인이 나와서 죽음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곧 성을 파괴하고 들어가서 남김없이 처없앨 터이니 모두 그렇게 알라. (주석 7)

 
 흥선대원군 효유문. 크기 가로 27cm×세로 117㎝
 흥선대원군 효유문. 크기 가로 27cm×세로 117㎝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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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관군측에서는 전봉준이 이미 죽었으므로 농민군은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라는 「화유문」을 보내어 농민군의 진영을 교란시키고자 하였다.

그간 여러 차례 효유하였는데도 귀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음을 선유(宣諭)하러 온 관원을 살해하였으니 어떠한 형벌로 다스려야 할 것인가. 그런데 괴수 전명숙(全明淑, 전봉준)이 이미 죽었다고 하니 특별히 관대한 처분으로 너희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줄 것이다.

각 고을의 폐정에 대하여는 가히 두어도 될 것은 그대로 두고, 가히 개혁해야 할 것은 개혁하겠다. 지금 여러가지 조목을 들었으나 어지럽고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켜 화를 일삼으려는 계략적인 것이니 어찌 개과천선의 뜻이 있다고 하겠는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군기를 모두 가져다 바치고 성문을 열어 관군을 맞아들여 정부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받도록 하여 주기 바란다. (주석 8)


주석
5> 『동학란기록』(上), 「양호초토등록」, 207쪽.
6> 『양호초등록』 부록, 5월 초 4일조.
7> 앞의 『양호초등록』.
8>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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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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