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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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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해마다 10월 말이면 팔순 노모와 함께 단풍 구경을 나선다. 그러다보니 여행 코스로는 쉼터가 많은 평지 산책길이나 들머리길이 평탄한 산사를 택하게 되고 주변에 온천장이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된다. 올 가을에는 홍천 수타사를 경유해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가서 척산온천에서 1박을 하고, 설악산과 권금성을 보고 한계령을 넘어 필례 약수터와 인제 백담사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공작산 수타사  
홍천 수타사 공작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사찰 수타사는 생태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 변영숙

홍천 수타사는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듯 공작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성덕왕(708)에 창건됐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린 후 40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터에 조선 인조 때(1636) 공잠스님이 중창했다. 수타사는 절이 크지 않고 관광 사찰도 아니어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수타교를 건너 사찰로 들어서면 칠이 다 벗겨져 그야말로 속살만 남아 있는 사천왕상이 반긴다. 화장기 없는 홍회루는 세상 풍파 다 겪은 노회한 현자의 모습 같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중심법당 대적광전의 닫집은 황룡, 풍령, 극락조, 악기 등으로 장식돼 보기 드물게 화려하고 장중해 눈여겨 볼 만하다. 인왕문 사천왕상의 배부분에서 나온 불교 대장경 월인석보 17~18권이 보관돼 있다. 

가을날 수타사 나들이가 좋은 이유는 주변에 잘 조성된 생태숲이 있어서다. 수타사 일대와 공작산의 163헥타 규모에 자생식물과 향토식물을 식재해 가꾼 생태숲은 유모차를 끌거나 아이의 손을 잡고 또 팔순 노모와 팔짱을 끼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한 나절 보내기에 더없이 적당한 곳이다. 넓은 암반과 작은 연못들이 어우러진 덕지천 계곡에도 어느새 붉은 단풍이 한창이다. 

수타사에서는 매월 셋째주 토요일 수타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국수 공양을 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도 가을 햇살 비치는 공양간 툇마루에 앉아 후루룩 잔치국수를 먹는 행운을 누렸다. 예쁜 단풍과 국수까지 얻어 먹었으니 최고의 단풍 유람이 아닐런지. 
 
설악산과 척산 온천
   
설악산 단풍서 권금성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설악산ⓒ 변영숙
          
수타사를 출발해 미시령을 넘어 속초 척산 온천으로 향했다. 인제와 속초를 연결하는 미시령은 1960년대 진부령에 이어 두 번째로 개설된 횡단로로 속초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였는데, 미시령 터널과 양양고속도로 개통 이후로는 통행량이 급격히 줄어 매우 한적했다. 미시령 계곡도 붉은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단풍 구경을 제대로 하려면 미시령 정상을 넘어야 해."

엄마 말대로 미시령으로 들어섰지만 옛길이 아닌 터널로 빠져 나오고 말았다. 엄마는 못내 아쉬워했고 나는 미시령 옛길을 알려주지 않은 네비게이션을 탓했다. 미시령 톨게이트를 나와 듬직한 모습의 설악산 울산바위와 눈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향했다.

척산 온천 휴양촌은 온천장과 찜질방 외에도 객실을 운영하고 있어 하룻밤 머물며 온천을 즐기기에 좋고,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6km남짓 거리여서 이른 아침 설악산에 가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서둘러 숙소에 짐을 풀어 놓고 은은한 솔향기를 맡으며 노천탕에 몸을 담그니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인근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시원한 두부 전골에 곁들인 강원도 더덕 막걸리 한 사발에 노골노골해진 몸은 이내 잠으로 곯아 떨어졌다.
  
설악산 단풍 설악산 입구쪽은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2019.10.20촬영)ⓒ 변영숙
 
설악산 입구가 막힐 것을 염려해 오전 6시 30분에 휴양촌을 나섰지만 설악산 2km 전방에서부터 차가 멈춰 서 있다. 이러다 또 지난해처럼 차를 돌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한 시간 정도 가다서다를 반복해 겨우 설악산으로 들어서니 오전 8시. 다시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2시간 후 케이블카 탑승권을 사니 오전 8시 30분. 이 정도면 완전 성공이다.

케이블카 탑승시각까지 시간이 남아 아침을 먹고 신흥사까지 다녀왔다. 설악산 아래쪽은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간혹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엄마, 권금성까지 올라갈 수 있겠어?"
"응, 한번 가보려고. 그래서 아침에 약까지 먹었다." 

         
팔십을 넘긴 엄마는 작년 다리 골절상을 입은 후 걷는 일에 자신없어 했다. 올 여름에는 어딜 가지고 해도 통 응하지 않던 엄마다. 그런 엄마가 권금성을 오른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어쩌면 엄마는 권금성을 올라보임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스스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기어히 권금성을 올랐다. 

"이게 마지막이지, 언제 내가 여길 또 올 수 있겠니?" 
"무슨 소리야 엄마, 내년에 또 와야지, 우리보다 훨씬 잘 걷는데."


우리 옆에는 아들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올라온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약을 먹고라도, 지팡이를 짚고라도 보고 싶은 곳이 설악산 단풍이다.

은비령 계곡(필례약수터)과 백담사
  
필례 약수터 단풍터널 한계령에서 갈라지는 은비령을 지나 필례 약수터 단풍ⓒ 변영숙
 
속초에서 한계령을 넘어 필례 약수터로 향한다. 고개마다 절경이다. 오, 설악의 아름다움이여. 봉우리마다 삐죽삐죽 올라온 기암절벽과 그 사이를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단풍의 오묘한 조화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내 차에 자동주행기능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갓길에는 자동차 행렬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가다가도 멈춰 설 수밖에 없고, 되돌아 볼 수밖에 없는 가을날 설악의 아름다움이여, 영원하길. 

한계령 정상 50m 전방에 '필례 약수터, 은비령'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은비령' 고갯길은 과거 보부상들이 영동지역에서 소금 봇짐을 지고 내륙의 인제나 양구쪽으로 넘어가는 '소금길'이었다. 한계령에 비해 유순하고 아기자기한 고갯길이지만 붉은 단풍이 기가 막힌 곳이다. 특히 필례 약수터 입구의 붉은 단풍 터널은 길지도 않건만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단풍길이다. 
 
"어, 내 눈이 왜 충혈됐지. 어, 아니네. 단풍 때문에 충혈된 것처럼 보이는 거였네?" 

이런 너스레가 통하는 곳이다. 약수터 근처에는 약 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게르마늄 온천이 유명하다. 
   
백담사 계곡 100개의 연못과 천불천탑을 거느린 백담사 ⓒ 변영숙
     
필례 약수터에서 한계령 휴게소를 지나 인제 백담사로 향한다. 백담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진 이래 수차례 불에 타 소실되고 다시 지어졌는데 그때마다 이름도 바뀌었다. 6.25 전쟁으로 완전 소실된 절을 1957년 11번째로 다시 지으면서 이름도 '백담사'라 고쳐 불렀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부터 연못의 개수를 세어보라 하여 세어보니 100개의 연못이 있어 '백담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며 집필 활동을 했던 곳으로 뒷편에는 만해가 팠다는 우물이 보존돼 있고 만해 박물관이 있다. 
 
백담사 풍경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며 집필을 했던 백담사, 뒤편에 만해가 직접 판 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만해 기념관이 있다. ⓒ 변영숙
 
엄마에게 백담사는 '전두환의 절'이었다. 길도 없어 일반인은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백담사는 1988년 전두환이 머물면서부터 유명해졌다. 그때부터 산을 깎고 길을 놓고 봉고차 운행이 시작됐다. 
 
"전두환이가 백담사에 있다고 해서 **산악회 따라 처음 가봤지. 그땐 다리도 없었고. 작은 봉고차 하나가 실어나르고 실어 오고 했었어." 

엄마가 오래 전 백담사에 관한 기억을 풀어 놓으신다. 

"전두환이도 봤어?"
"그럼, 전두환이 하고 부인하고 둘이 거기서 살았지. 사람들 모아놓고 인사도 하고 연설도 하고 그랬지. 전두환이 땜에 유명해졌지,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셔틀버스 창 밖으로 펼쳐지는 구비구비 아찔한 고갯길은 아무리 봐도 현실의 풍경같지 않다. 백담사 계곡에 눈부시게 펼쳐지는 하얀색 돌탑들과 황금빛 은행나무 역시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엄마, 그때도 계곡에 돌탑들이 있었어?"
"탑은 무슨 탑, 돌 징검다리 밖에 없었어..." 

 
사람들이 하나씩 쌓아 올린 돌이 천불천탑이 되어 백담사 계곡을 뒤덮고 있다. 계곡물이 불어나면 탑들은 모두 휩쓸려 떠내려 가지만, 그 자리에는 감쪽같이 새로운 천불천탑이 들어서는 것이다. 계곡을 따라 울긋불긋한 나무들은 가로수처럼 줄지어 서 있다. 연못에도 붉은 단풍이 가득하다. 

우리는 해마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백담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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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행작가협회준회원, NGPA회원 저서: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