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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는 국내 역사문화 유산의 멋과 서사를 찾아 떠나는 답사기입니다.[편집자말]
(* 통일신라의 빛과 그림자 - 경주 삼랑사지, 노서동 석불입상 ①에서 이어집니다.)

살아 있는 고기를 넓적다리 사이에 끼지 말라
 
삼랑사는 통일신라 초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신문왕 때의 국사였던 경흥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사찰인데, 경흥 스님은 신문왕의 부왕인 문무왕이 직접 유언으로 "경흥을 반드시 국사로 삼아라"라고 명령을 내린 승려이다.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고 <삼국유사>가 기록할 정도면 그 명성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오늘날에 남은 삼랑사지는 경흥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그 영역이 결정되고 당간지주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것이다. 국왕이 부왕의 유언에 따라 스승으로 삼을 만한 스님이 주지로 있다면 그 사찰의 권위와 위세는 남달랐을 것이며, 이 기회에 사찰은 크게 부흥됐을 것이다.
  
초가을 삼랑사지 풍경 경흥 스님과 정수 스님의 이야기 무대가 된 삼랑사지는 당간지주가 있는 빈터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 좋다. 지금의 터는 경흥 스님 당대의 영역으로 추정된다. ⓒ 홍윤호
 
하지만 그 특별한 권위가 그에게 독이 됐을까.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처럼 왕궁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종하는 이들이 궁궐의 동문 밖에서 먼저 채비를 했는데, 말과 안장이 매우 화려하고 신발과 복장이 잘 갖추어져서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켰다. 거의 왕의 행차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때 행색이 남루한 한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보란 듯이 쉬고 있는데, 그 광주리 안에는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경흥 스님을 시종하던 이가 그를 나무랐다.
 
"어허! 너는 승려의 옷을 입고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그 승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자도 있는데, 시장의 마른 물고기를 등에 지고 있는 것이 어찌 더 혐오스럽단 말이냐?"
 
말을 마치고 그는 일어나 가버렸다. 경흥 스님이 막 문을 나오다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뒤쫓게 하였다. 그는 남산 문수사 문 앞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지팡이만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었다. 마른 물고기는 남산에 흔했던 소나무 껍질이었다. 쫓아간 사람이 돌아와 그에게 알려주니 경흥 스님은 탄식하였다.
 
"큰 성인이 오셔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셨구나."
 
그 후 경흥 스님은 죽을 때까지 말을 타지 않았다.
 
사실 행색이 남루한 승려는 경흥이 말 타는 것 자체보다는 화려한 복장과 채비를 한 말 위에 앉은 그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비난한 것이다. 현실 권력과 가까이 하는 와중에 중생 구제를 본의로 한 불교의 본질을 잊어버린 부분을 대놓고 비난한다.

이는 삼랑사에서 황룡사 가는 길에 만난 가난한 여인을 살리고 자신은 벌거숭이가 된 정수 스님의 이야기와 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중생 구제를 위해 자신의 속옷까지 벗어 던진 스님과 권력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자신이 타는 말까지도 화려한 치장을 한 스님, 그 대비가 너무 선명하다.
 
서쪽 선도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삼랑사 당간지주 사이를 비출 때 삼랑사와 관련이 있는 두 스님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가른다.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시대, 특히 중심지인 수도만 놓고 보면 단연 압도적으로 최고의 풍요와 문화적 전성기를 누린 시기가 통일신라 때다. 학자들은 인구 규모만 해도 조선의 한양보다 몇 배는 됐을 거라고 추정한다. 흔히 100만 인구를 이야기하고, 적어도 50만은 됐을 거라고 추측하니, 세계적으로도 동시대에 이런 대도시가 5~6개 이하였을 것이라는 일반적 추정에 비춰 보면 당시 왕경이었던 경주의 위상이 짐작이 간다.
 
그러나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풍요와 화려함 뒤에는 빈부격차라는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권위와 형식에 얽매여 본질과 초심을 잃어버리는 사례도 많다. 이것은 결국 시간이 흐르며 차차 국가와 사회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삼랑사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 시대에도 되새겨볼 만한 시사점이 많다.
 
노서동 석불입상 남항사의 석불로 추정된다. 얼굴이 파손되고 발목 아랫부분은 잘려 있지만, 이 석불이 존재함으로써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 좋다. ⓒ 홍윤호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삼랑사에서 강변을 따라 시외버스터미널 쪽으로 300m 가량 걷는 길은 겨울에는 그리 낭만적인 길이 아니다. 4월의 봄이라면 강 건너편의 벚꽃길이라도 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한겨울의 강변 길은 포항으로 이어지는 빠른 길이라 그런지 굉음을 내며 달리는 트럭과 다양한 차들이 속도 경쟁을 하느라 찬바람을 온통 뒤집어쓴다. 사실 한겨울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도 이 길만은 통일신라 때처럼 걸어가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이 매력 없는 길을 걷는 이유는 삼랑사지와 노서동 석불입상 때문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약 300m이며, 둘 다 강변도로에 붙어 있다.
 
노서동 석불입상이 있는 곳은 <삼국유사>에 기록이 나오는 남항사지로 추정된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남항사는 삼랑사 남쪽에 있다"라는 내용이 있을 뿐이고, 지금 노서동 석불입상이 삼랑사지 남쪽 약 300m 지점에 있어 이곳이 남항사였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므로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이 석불은 '남항사지 석불입상'이 아니라 현재 이 동네의 이름을 따서 '노서동 석불입상'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도로명 주소로 바뀌었다. 도로명에 따라 '강변로 석불입상'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씁쓸하다. 자기 집 이름을 잃어버린 불상의 운명이라 생각하기엔 많이 아쉽다.
 
남항사는 위에서 언급한 경흥 스님의 또 다른 이야기와 관련해 등장한다.

삼랑사에 주지로 온 경흥 스님이 한 달 동안 병을 앓았다. 그때 한 비구니가 찾아와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생긴 마음의 병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11가지 모습의 탈을 만들어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그 춤추는 모습이 아름답기보다는 우스꽝스러웠나 보다. 이 춤을 보고 모두 자지러지게 웃었고, 경흥 스님도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웃다가 자기도 모르게 병이 나았다. 그러자 비구니가 재빨리 문을 나가 남항사에 들어가 숨었는데, 사람은 사라지고 지팡이만 11면 관음상이 그려진 불화 앞에 있었다고 한다. 경흥 스님의 마음의 병을 고쳐준 관음보살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삼랑사와 남항사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일대의 주변 환경은 그다지 녹록지 않다. 일단 석불 자체가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많이 훼손됐다. 석불은 광배를 갖추고 있지만 얼굴이 완전히 파손되어 알아볼 수 없고, 발목 아랫부분은 잘려 있다. 높이는 약 1.1m.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이다.
 
문화재적 가치는 경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에 비해 한 수 떨어진다. 하지만 이 석불 하나로 인해 <삼국유사>의 기록을 반추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좋다. 한 비구니가 11개의 탈바가지로 막춤을 추어 사람들을 배꼽 빠지게 하고 슬며시 사라진 그 남항사가 과연 맞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 즐겁다. 어느 날 갑자기 국사가 돼 부담감을 느끼는 경흥에게 남항사 주지나 승려들(혹은 남항사로 대표되는 특정 불교계 종파)이 찾아와 힘을 실어 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제멋대로의 추측도 해본다.

이 석불이 없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문화재적·미술사적 가치는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이 석불이 무척 고맙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서동 석불입상의 현 상황 2009년에 보호각을 씌웠지만, 시내버스 차고지 옆이라 매일 주기적인 진동과 매연에 노출되어 있다. ⓒ 홍윤호
 
매연을 뒤집어쓰고 사는 석불
 
이곳에 올 때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 바로 위치다. 하필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옆이라니. 정확하게 말하면 시내버스 차고지 옆이다.

안 그래도 훼손이 심한 이 석불은 과거에는 1년 365일 노천에서 버스의 매연을 뒤집어쓰며 살았다. 결국 주민들의 계속된 민원에 따라 2009년 7월에 보호각을 씌웠으나 훼손은 계속되고 있다. 석불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는 걸까.

경주시청 문화재과 관계자 역시 매연으로 인해 석불이 장기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현재 위치가 석불이 원래 있던 곳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은 없다고 한다. 보호각을 씌우는 이상의 조치는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물망만 얼기설기 남아 있는 골프연습장 옆 삼랑사지, 시외버스터미널 옆에서 시내버스의 매연을 뒤집어쓰고 있는 노서동 석불입상, 1200년 전 <삼국유사>의 생생한 기록을 되짚어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들이 이렇게 훼손되고 있다.
 
뭔가 현실적인 대책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강변길의 역사가 되살아나길 바라며 그 길을 또 걷는다.
 
성동시장 한식뷔페집들 시내 성동시장의 한식뷔페집들은 30여 가지 반찬을 자유롭게 골라 먹을 수 있어 그 풍성함과 인심 때문에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찾는다. ⓒ 홍윤호
 
[답사 정보]

- 두 곳 다 주차장이 없다. 삼랑사지는 도로에서 골목길로 들어가 삼랑사지 옆에 대놓으면 된다.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 노서동 석불입상은 도로변에 있어 주차할 곳이 없으므로 강변 주차장이나 인근 골목 길가 혹은 웨딩홀에 적당히 대는 수밖에 없다.
 
- 경주 시내는 요즘 숙박할 곳이 다양해졌다. 특히, 게스트하우스가 활성화돼 저렴한 숙박도 가능해졌으니 이용해 볼 만하다. 2017년 초,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시설 좋은 찜질방이 생겼으니 이곳도 이용할 만하다.
 
- 경주 시내에서 먹을 만한 곳으로 추천하는 곳은 경주역 앞의 성동시장이다. 다양한 먹거리 외에 30여 가지 반찬을 자유롭게 골라 먹을 수 있는 명물 한식뷔페집들(1인 7000원)이 있어 들러갈 만하다. 반찬들이 보기만 해도 풍성하고 인심도 좋다.
 
[가는 길]

- 자가용으로는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을 찾아가 터미널 차고지 옆의 노서동 석불입상을 찾으면 된다. 이 강변길을 따라 300m 달리면 우측으로 삼랑사지가 보인다.
 
-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 가면 된다. 고속버스로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 간다면 버스 내려서 그 서쪽으로 3분만 걸어가면 바로 시외버스터미널이다. KTX 경주역에서는 경주고속버스터미널 앞으로 가서 내린 다음 역시 서쪽으로 3분만 걸어가면 시외버스터미널에 닿는다. 거의 모든 버스가 고속버스터미널 앞을 지나간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닿으면 강변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시내버스 차고지 옆에 보호각을 씌운 석불입상을 볼 수 있다. 여기서 300m 길 따라 걸어가면 우측으로 삼랑사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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