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실시간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가 정식기사로 채택하지 않은 글(또는 검토 전 글)입니다.
  • 오마이뉴스 에디터가 검토하지 않았거나, 채택되지 않은 글에 대한 책임은 글쓴이에 있습니다.
유시민, "진영논리가 왜 나쁜가?"
 
지난 10월 1일 JTBC에서 '조국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 적절성'을 주제로 토론회가 있었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그건 유 이사장이 보는 상황 판단이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고 반박하자, 유시민 이사장이 "국민들이 생각하는 거, 이렇게 말씀하지 마시라, 국민은 통째로 있는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유이사장은 "우리는 여기서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다. 진영논리가 왜 나쁜가? 주권자들보고, 시민들보고 진영논리에 빠지지 말라는 만큼 멍청한 말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현대 정치에 대해 "순수한 주권자의 행위 같은 건 없다. 승자가 패자를 죽이지 않고 권력만 잃는 문명화된 전쟁"이며, "진영으로 나눠서 서로 대립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고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당시 토론에 참석했던 주호영 한국당 의원이 진영논리의 위험성을 말했지만, 사실 한국당 또한 진영논리의 한 축에 서서 "조국 퇴진, 공수처 반대"라는 구호로 광화문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각자 진영논리에 충실하면서도 겉으로 진영논리를 비난하는 가식(假飾)을 유시민 이사장이 지적한 것이다. 한편 대립하는 진영 한쪽에 서서 첨예한 논객의 지위를 담당하는 박형준 교수가 어떤 방법론도 없이 "갈등을 넘어 통합하는 것 역시 정치의 본령"이라는 미사여구를 되뇌는 것 또한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진영논리'는 나쁘다
 
진영논리(陣營論理)는 사전적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 옳고, 다른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논리'를 뜻한다. 최근의 조국 사태가 진영논리에 빠진 이유는 '조국'이라는 정치엘리트의 진퇴, 그와 결부된 정치세력의 힘겨루기가 의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영논리는 개념적으로 각 진영의 정치적 견해가 변경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서 있다. 진영논리에 의하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지극히 타당한 인식론적 명제가 부정된다. 상대방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쓰러뜨려야 할 적(敵)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의 해소라는 정치의 목적은 사라지고, 오히려 정치가 갈등과 대립을 확대재생산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진영논리는 나쁘고, 위험하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인식론적 과정은 어떤 견해의 무오류성을 가정해서는 안 되며, 모든 견해는 합리적인 토론에 의해 탄핵되어야 한다. 특히나 자연과학적 주제가 아닌 사회적인 갈등이 문제라면 토론을 거친 다음 합의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즉 집단과 집단, 혹은 집단과 개인, 지역과 지역 등 각각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라면 합의를 해야 하고, 합의를 하려면 각 견해가 조금씩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진영논리에 따르는 순간, 즉 "쟤들은 언제나 저렇게 생각해"라고 치부하는 순간, 의견의 변경불가능성으로 인하여 토론과 합의의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유시민 이사장은 '정당의 경쟁가능성의 문제'를 진영논리의 정당화 논거로 오용(誤用)했다. 당연히 현대민주주의는 각 정당의 자유로운 경쟁을 그 플랫폼으로 한다. 각 정당의 정치엘리트는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이념을 자신의 이념과 동일시하며, 이러한 당파성(黨派性)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옳다. 문제는 일반적인 유권자가 특정 정당의 당파성을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이냐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보통의 유권자가 특정 정당 또는 정치적 영웅에 대해 자기동일시(自己同一視)를 하고 당파성을 가지게 되면, 만연히 정치적 영웅을 추종하게 되고, 급기야 그 부패와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공동체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층 30%'가 단적인 예이다. 박사모는 박근혜 전대통령이 최순실을 통해 삼성그룹의 승계과정에 협조하고 뇌물을 받은 사실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노사모도 마찬가지다. 노사모도 노무현 전대통령이 부인을 통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증거와 혐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단지 검찰에 의해 타살 당했다고 생각한다.
 
의견의 다름,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것을 진영이라는 이름으로 가두어버리면, 더 이상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더욱 증폭될 뿐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그러한 다름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정과 장치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있다.
 
진중권의 '중우정치 비판'은 정당한가?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지난 9월 27일 〈영남일보〉대강당에서 열린 특강 및 토론회에서, 작금의 조국 사태와 관련해서 "진영논리에 몰입돼 다른 목소리에 귀를 닫으면 올바른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국 수호, 검찰개혁'을 부르짖는 서초동 집회와 '조국 퇴진, 공수처 반대'를 외치는 광화문 집회를 겨냥해서, "한국 정치의 문제는 '중우정치'로 흘러간다는 것, 진보와 보수 모두 '민중의 독재'로 흘러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두 집회에서 보이는 감정적 대립과 진영논리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비판은 공감할 수 있지만, '중우정치'나 '민중의 독재'라는 비난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는 지금까지 쌓았던 민주주의적 성과를 퇴행시키고 엘리트주의적 귀족정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의 정치엘리트들이 높은 퀄리티의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매번 '각 진영과 영웅에 대한 찬반'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진중권 교수는 간과했다. '중우정치' 혹은 '민중의 독재'라고 이름 붙이려면 광장에 나온 그들이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어떤 독점적인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앞에 스피커를 든 이에게 박수를 치고, 집회개최자가 나누어준 피켓을 들고 함성을 지르는 것 외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초동 집회와 광화문 집회에 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사실상 동원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지 그 집회의 세(勢)를 과시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는 정치엘리트에 의해 동원된 것과 사실상 다르지 않다. 두 집회는 각 진영에 대해 당파성을 가진 적극적인 유권자들이 결집한 것에 불과하고, 이러한 대립이 초래된 이유는 당시 제시된 의제 자체가 천박하고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정치엘리트들이 매번 '박근혜 수호, 박근혜 퇴진', '조국 수호, 조국 퇴진'과 같이 어떤 정치적 영웅의 진퇴라는 의제만을 제시하고, 제도 개혁과 같은 의제를 제시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견(異見)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조국 장관이 사퇴하고 나서는 그나마 검찰개혁이라는 제도의 문제로 초점이 모아졌다. 민주당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개혁의 방향을 제시했고, 한국당은 그에 반대하고 있다. 서초동 집회는 '검찰개혁은 공수처'라는 구호를 외치고, 광화문 집회는 '공수처법은 좌파독재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설령 민주당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공수처를 반대하면 눈치가 보인다. 심지어 공수처에 이견을 제시한 금태섭 의원을 'X맨'이라고 부르면서 탈당하라는 댓글마저도 있다. 한편으로 '공수처법은 좌파독재법', '공수처는 정권연장용'이라는 한국당의 주장은 극악한 선동이다. 공수처법안의 최초 발의가 2012년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진영논리에 빠져 있다. 여전히 토론은 없고 선언만 있으며, 어느 한 진영에 가담할 것만을 요구하고, 이견(異見)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10월 1일 JTBC 토론회에서 "갈등을 넘어 통합하는 것 역시 정치의 본령"이라고 주장했던 박형준 교수에게 그 해법을 묻고 싶다. 하지만 그에게 갈등의 해결과 통합의 방법은 없다.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자유한국당의 집권이며, 자유한국당의 집권은 똑같은 갈등의 재현을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시민 이사장의 목표가 민주당의 재집권에 있고, 민주당의 재집권 또한 갈등의 연속일 뿐이라는 사실과 같다.
 
이와 같은 대립과 갈등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8년 11월 프랑스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유류세 인상 발표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시위가 있었고, 우리의 80년대에 있었던 백골단의 모습을 한 프랑스경찰이 시위를 진압했다. 2017년 1월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 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반 트럼프 시위가 있었고, 트럼프는 시민들의 시위를 공권력으로 해산시켰다. 어디에도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토론하거나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없었다. 결국 반정부 의지를 가지게 된 시민들은 다음 선거를 기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통치'라는 단어가 갖는 어떤 분명한 의미에서, 실제로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또 의미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자신들을 통치할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라는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의 지적은 민주주의에 대한 과장을 경계한다. 슘페터의 정의에 따른다면, 정치엘리트에 대한 찬반으로 귀결되는 현재의 진영논리는 애초부터 본질적인 구조의 문제였던 것이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평범한 시민으로 하여금 어느 정치적 영웅에 대한 찬성과 반대, 그 이상의 정치행위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집회 참여는 주권적 행위라기보다는 각 진영의 정치엘리트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권 획득을 정당화시키는 수동적, 도구적 행위에 가깝다. 왜냐하면 집회에 참여한 이름 없는 시민에 의해서 새로운 의제가 제시될 수 없으며, 정치엘리트가 제시한 종전의 의제에 대해 시민들이 수정을 제안할 수 있는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헌법이 유권자들에게 부여한 정치적 기본권이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대부분의 시민들은 모르고 있다. 제24조의 보통선거권, 제72조의 대통령이 발의한 중요정책에 관한 국민투표권 및 제130조의 국회가 부의한 헌법개정안 국민투표권이 전부이다. 제25조의 공무담임권은 소수 정치엘리트의 지위의 근거일 뿐 유권자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제2항은 주권의 근거를 밝히고 있을 뿐, 결국 주권의 행사는 정치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진다. 누군가를 뽑는 권리 외에는 우리에게 허용된 것이 없다. 결국 지금의 헌법적 구조 아래에서 어떤 정당 혹은 어떤 정치적 영웅에 대한 찬반으로 빠지는 것, 즉 진영논리에의 함몰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지도 모른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시민발의와 국민투표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얘기를 꺼낼라 치면, 어느 누구나 "거기는 나라가 작잖아" 또는 "우매한 대중들한테 정치를 맡길 수 있을까"라는 말들을 꺼낸다. 사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에 관한 지식이 고등학교 사회교과서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지금 우리와 같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상황이 스위스에서 벌어졌다면 스위스의 시민들은 어떻게 했을까? 서로 비난하고 욕하며, 서로를 제거되어야 할 '적폐'라고 불렀을까? 그렇지 않다. 정부법안의 반대자들은 스위스연방헌법 제141조에 따라 유권자 5만 명의 서명으로 국민투표에 붙여 연방의원이 아닌 시민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다시 물을 수 있다. 아니면 헌법 제139조에 따라 18개월 동안 유권자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정부법안을 대체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연방헌법의 일부개정을 요구하고 국민투표 및 주 투표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론지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의와 토론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수준의 의사소통 수단이 사용될 수 있어야 하고, 풍부한 토론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① 서명효력 발생기준(시민발의와 국민투표 요구인원수), ② 허용기간(서명받기, 정부 측 반응, 의회토론, 국민투표 캠페인 허용기간 등), ③ 서명을 모으는 방법, ④ 정부와 의회의 개입 여부, ⑤ 다수결요건과 최저 투표율 정족수, ⑥ 시민들을 위한 정보제공과 공개토론, ⑦ 제기될 수 없는 안건, ⑧ 법적 효과(유효한 시민발의의 법적 결과), ⑨ 전체 절차가 정부 또는 의회에 의해 교란되지 않을 만큼 체계를 갖추었는지 여부 등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충분한 토론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설령 투표에서 패배하더라도 결과에 불복하는 일이 없고, 설령 불복하더라도 다음번에 어떻게 시민들을 설득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적어도 이러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토론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 이 같은 과정이 반드시 옳은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오류가 발생했을 경우에 이를 수정하는 것 또한 여전히 토론의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권자가 진영으로 고착되는 경우, 그 사회는 변경가능경, 즉 더 이상의 발전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서로 다른 의견들의 장점과 단점을 공론화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그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토론의 기회를 가지며, 충분한 토론의 과정을 거친 후에 선택하고, 선택된 이후에 그 결과에 승복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지금의 갈등을 해결하는 길이다. 헌법의 개정으로 시민발의와 국민투표제도를 도입하게 된다면, 필요한 법안 혹은 잘못된 법안에 대해, 여의도에서 피켓을 들고 도와 달라고 읍소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시민들을 설득함으로써 관철시킬 수 있게 된다. "정치의 발전과 안정은 '정치제도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가에 달려 있다"는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지적을 깊이 새기길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