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졸업생들이 경기 흥덕고에 기부한 페미니즘 관련 서적 졸업생들이 경기 흥덕고에 기부한 페미니즘 관련 서적
▲ 졸업생들이 경기 흥덕고에 기부한 페미니즘 관련 서적 졸업생들이 경기 흥덕고에 기부한 페미니즘 관련 서적
ⓒ 흥덕고 졸업생 제공

관련사진보기

 
경력단절 34살 전업주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누적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했다. 한국 소설이 100만부 넘게 팔린 것은 지난 2009년 이후 9년만의 일이다. '페미니즘 열풍'을 토대로 관련 서적이 많이 등장했지만, 이 책들이 도서관 문턱을 넘는 건 여전히 힘겹다. 공공도서관이나 중․고등학교․대학교 도서관에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 신청을 반려했다는 기사들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고등학교 후배들을 위해 페미니즘 책을 기부하는 선배들이 있다. 경기 용인 흥덕고를 졸업한 선채경(21)씨는 지난해 12월 21권의 페미니즘 서적을 동창들과 함께 모교에 기부했다. 선씨와 친구들의 기부로 학교 도서관에는 '이갈리아의 딸들',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 날 이후의 페미니즘', '그럼에도 페미니즘',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의 책들이 자리하게 됐다. 올해도 페미니즘 서적 기부를 준비 중인 선씨를 지난 5일 서울 종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적 좋은' 여학생들에 '기가 세서 그렇다' 꼬리표

선씨와 친구들이 가지고 있던 페미니즘 책 중 새 책에 가까운 책들을 모으니 7권이었다. 서점에서 새 책 14권을 구입했다. 27만 원이 들었다. 20대 초반 대학생들에게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기쁜 마음으로 다들 조금씩 보탰다. 그렇게 총 21권을 두 상자에 가득 담아 지난해 12월 학교로 들고 갔다. 학교에서 거부하면 어쩌나 우려도 됐지만 사서 선생님을 비롯해 학교 직원분들도 기쁘게 받아주셨다.

선채경씨가 모교에 페미니즘 도서를 기부하고자 마음먹은 건 '기가 세다'라고 소문난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선씨에 따르면 그의 모교는 여학생들이 남학생들 보다 많았다. 수행평가 등에서 여성들이 좋은 성적을 기록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는 학교 담장 밖에서 '여자애들이 기가 세서 그렇다'라는 이야기로 발전해, 떠돌았다. '우리 아들이 내신에 불리하다', '내신, 수행평가 비율을 줄이라'는 건의가 학교 담장을 넘어 들어오기도 했다.

선씨는 "2017년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남동생의 진학을 앞두고 어머니가 '여자애들이 기가 세서 남자애들이 불리하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시더라"라며 "우리에게 붙었던 그 꼬리표가 여전히 후배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기가 센 후배들이 페미니즘 책을 읽고 더 기가 세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기부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여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눈총, 비난에 대한 오기이며 여학생들을 향한 응원의 표시였다.

"내가 겪은 페미니즘 교육을 후배들에게도"

후배들도 자신처럼 '페미니즘 교육'을 받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선씨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알게 모르게 페미니즘 교육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자라고 차별 당하면 부드럽게 말 할 필요가 없다, 강하게 이야기하라'라는 말을 선생님들에게 자주 들었다. 남장을 하고 전장을 누비며 승승장구한 홍계월이 나중에 여성임이 탄로났지만 신망을 받았다는 내용의 고전 '홍계월전'을 고전문학시간에 다루며 선생님과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선씨는 "홍계월전 결말은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나는데 친구들이랑 경력단절여성 이야기를 하면서 토론했다"라며 "그 외에도 같은 반 남학생이 성범죄 해결하려면 성매매를 합법화 해야 한다고 말하자, 친구들이 다 같이 반박했던 기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 성평등에 어긋나는 발언에 문제제기를 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대학에 와보니 당연한 게 아니었다. 선씨는 "대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들이 '여자들은 로스쿨 가도 공무원밖에 못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셔도, 술자리에서 남자 선배들이 '자취하는 여자가 제일 좋다'라는 말을 해도 다들 웃으며 비슷한 농담들을 하더라"라며 "고등학교 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화낼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학에는 없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친구들도 공통적으로 비슷한 경험들을 대학교에서 하고 있다"라며 "고등학교 시절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대학교에 와보니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2월 '초중고등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에 21만 명이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 교육현장은 바뀌지 않았다.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선생님, 친구들을 '운 좋게' 만나야 학생들은 페미니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 운을 물려주고자 책을 기부한다.

"저에게 그랬듯 학교가 안전하게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기부한 책이 그런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활약하는 책들, 여성 서사가 나오는 책들을 읽고 여학생들이 '교대', '공무원' 등에 갇히지 않고 꿈을 크게 가졌으면 좋겠다. 사회가 10대 청소년들의 가능성을, 자존감을 낮추는 말들에 굴하지 않고 다양한 직업들을 가졌으면 좋겠다."

공격도 받았지만, 기부는 계속된다

기부한 뒤 흥덕고에 입학하는 학생으로부터 감사의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선배들이 기부한 책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는 학생들이 있다는 재학생의 제보도 있었다.

하지만 공격도 받았다. 책 기부목록과 함께 응원의 한 마디를 적어 놓은 게시판 사진이 한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왔는데 악플이 100개 넘게 달렸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 '삼일한(여자는 하루에 3번 맞아야 된다는 뜻으로 대표적인 혐오표현) 해야한다', '머리 반으로 쪼개고 싶다' 등 혐오표현이 줄을 이었다.

서씨는 "그들이 우리들의 신상을 캘까봐, 흥덕고 학생들에게 안 좋은 행위를 할까봐 무서웠다"라며 "악성댓글을 단 이들의 계정을 일일이 들어가서 혹시 동네 사람인가 확인해봤다"라고 했다.

혹여 기부한 책이 훼손됐을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책은 멀쩡하고 여학생들은 물론 남학생들도 빌려 읽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올해도 기부는 이어진다. 서씨는 5일 트위터에 '용인 흥덕고 도서관에 페미니즘 책을 선물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흥덕고 졸업생이 아니지만 '페미니즘 책을 기부하고 싶다'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오는 21일까지 기부할 도서를 받을 계획이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마이뉴스 사회경제부 신지수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