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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림산에 있는 선교사 묘역. 110여 년 전 광주의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온 푸른 눈의 선교사들은 죽어서도 양림산에 묻혔다
 양림산에 있는 선교사 묘역. 110여 년 전 광주의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온 푸른 눈의 선교사들은 죽어서도 양림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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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거세게 일던 동학농민운동이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잦아들면서 미국 장로교회는 본격적으로 조선 선교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남장로교회는 7명의 선교사를 호남지역에 파송하여 선교를 담당하게 한다.

7인의 선교사 선발대는 전주, 군산, 목포에 선교부를 잇달아 열고 호남의 중심도시인 나주에 선교부를 열려고 시도하였으나, 외세에 대한 강한 배척과 전통적인 유림 세력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광주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온 '성자(聖者)'들
 

7인의 선교사에 뒤이어 제2진으로 파견된 유진 벨과(Dr. 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 선교사는 나주의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지금의 광주광역시 양림동 양림산 기슭에 교회를 세운다. 1904년 때의 일이다. 이 교회가 올해로 115주년 맞는 광주의 최초 교회, '양림교회'다.
 
 올해로 115주년을 맞는 광주의 최초 교회인 양림교회. 유진벨(Dr. 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 목사가 1904년 12월에 창립했다.
 올해로 115주년을 맞는 광주의 최초 교회인 양림교회. 유진벨(Dr. 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 목사가 1904년 12월에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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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웬 기념각. 1909년 순교한 미국인 선교사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William)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지었다. 양림교회 옆에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26호
 오웬 기념각. 1909년 순교한 미국인 선교사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William)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지었다. 양림교회 옆에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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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종교를 믿는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광주 도심에 자리를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병들고 가난한 이들이 사는 가장 낮은 곳에 터를 잡았다. 양림동은 병들어 죽은 이들이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신을 내다 버리는 풍장터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들은 한국 이름으로 살았고, 죽어서도 양림산에 묻혔다. 이들은 선교에 앞서 사랑을 먼저 실천했다. 개인 사재와 본국의 후원금을 모아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웠다.

이들이 지은 병원에서는 현대 의료가 시작되었고, 학교는 근대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올해로 114년 동안 광주시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광주기독병원(옛 제중원)과 개교 111주년을 맞는 수피아 여자 중·고등학교는 그들이 남겨놓은 소중한 유산이다.

학교와 병원, 선교사들의 생활 터전은 오늘날 '양림동 근대역사문화마을'의 모태가 되었다. 광주는 이곳을 중심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양림동은 초기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산실이 되었다. '광주의 예루살렘'이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주민들의 약 6할 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윌슨(한국명: 우일선) 선교사 사택.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다. 1908년 제2대 제중원(현 기독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현대식 의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15호
 윌슨(한국명: 우일선) 선교사 사택.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다. 1908년 제2대 제중원(현 기독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현대식 의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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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광주 3·1 만세 운동이 이곳 양림동에서 태동하였고, 6·25 한국동란 중에 전쟁 고아들을 돌보았던 충현원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외국인들이 모두 광주를 떠났지만 끝까지 시민들과 함께 남아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하고, 훗날 이를 증언한 피터슨 선교사의 사택도 있다. 3·1 운동에서 6·25를 거쳐 5·18 민주화운동까지 광주의 근현대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또한 양림동은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광주의 서양촌'이라 불리며 많은 예술인들을 키워 냈다. 중국의 아리랑, '옌안송'과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혁명음악가 정율성, '고독의 시인' 다형(茶兄) 김현승, 영화감독 임권택과 소설가 황석영, 문순태도 양림동에서 살았다.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예향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광주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수피아 여학교
 

양림동에 수피아 여학교가 들어선 것은 1908년 4월의 일이다. 학교를 세운 사람은 양림교회를 창립한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 (Dr. Eugene Bell), 한국 이름 배유지 선교사다.

최초의 학교는 그의 사택에서 시작되었다. 남학생들의 선교부는 '숭일 학교'가 되었고, 여학생들의 선교부는 '수피아 여학교'가 되었다. 현재 사직도서관 근처로 '선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선교 기념비. 광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수파아 여학교는 이곳에 있었던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시작되었다
 선교 기념비. 광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수파아 여학교는 이곳에 있었던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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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티스메모리얼홀. 수피아 여학교를 설립한 유진벨 목사를 추모하기 위해 1925년에 건립되어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예배당으로 이용되었다. 수피아여고 교정에 있다. 등록문화재 159호
 커티스메모리얼홀. 수피아 여학교를 설립한 유진벨 목사를 추모하기 위해 1925년에 건립되어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예배당으로 이용되었다. 수피아여고 교정에 있다. 등록문화재 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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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 본국에 있는 스턴스 부인(M.L.Sterns)으로부터 5천 달러를 기부받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서양식 3층 건물을 짓고, 건물 이름을 일찍 세상을 떠난 부인의 여동생 제니 수피아(Jennie Speer)를 추념하는 뜻으로 '수피아홀(Speer Hall)'이라고 불렀다. 학교명 '수피아'는 여기서 유래한다.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지금은 '수피아 역사관'으로 쓰고 있다.

일제 강점기 치하, 가난과 차별로 배움이 어렵던 시절, 수피아 여학교는 근대 교육의 모태가 되었고, 광주지역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1911년에 건립된 수피아 홀. 광주만세운동 하루 전인 3월 9일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거사를 준비했다. 학교명, 수피아는 이 건물에서 유래했다. 등록문화재 158호
 1911년에 건립된 수피아 홀. 광주만세운동 하루 전인 3월 9일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거사를 준비했다. 학교명, 수피아는 이 건물에서 유래했다. 등록문화재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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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광주의 3·1 만세운동은 양림교회 남궁혁 장로의 집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식민지 종주국 일본 도쿄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 전 수피아여고 교사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대구, 부산을 거쳐 언니인 김함라(남궁혁 장로의 부인)에게 전달했다.

서울에서 거족적인 만세운동의 물결이 일어나고 닷새 뒤인 3월 6일 광주 양림동 남궁혁 장로 집에서는 수피아 여학교 교사 박애순을 비롯하여 광주 애국청년들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광주의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거사 일을 광주천변에 서는 부동 장날인 3월 10일 오후 두 시로 정했다.

3월 9일 저녁,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수피아 여학교 기숙사가 있는 수피아 홀에 교사 박애순과 진신애, 그리고 약 6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하얀 옥양목 치마를 찢어 밤새워 태극기를 만들고 내일의 거사를 위해 시민들에게 나누어줄 독립선언문과 각종 격문을 만들었다.

3월 10일 오후 두 시가 되었다. 교인들과 수피아 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은 양림교회 언덕길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행진을 시작했다. 광주천을 따라 부동교를 거쳐 밀물처럼 장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총과 커다란 일본도(日本刀)로 무장하고 말을 탄 일본군 기마 헌병대가 이들 앞을 막아섰다.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광주만세운동길’에 있는 벽화에는 만세운동 선봉에 섰던 윤형숙 열사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광주만세운동길’에 있는 벽화에는 만세운동 선봉에 섰던 윤형숙 열사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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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굴하지 않고 선봉에서 유난히 큰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던 소녀가 있었다. 수피아 여학교 2학년 윤형숙(1900~1950)이었다. 윤형숙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문과 격문들이 광주 시내 거리에 흩날렸다.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를 향하자 만세 행렬을 저지하던 일본군 헌병대는 돌변했다. 선봉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윤형숙의 왼쪽 팔을 커다란 일본도로 내리쳤다. 순간, 윤형숙의 팔이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떨어진 손에는 여전히 태극기가 쥐어져 있었다.
 
 조선의 혈녀(血女),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 열사(1900~1950)
 조선의 혈녀(血女),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 열사(1900~1950)
ⓒ 여수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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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과 소녀들의 치마저고리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윤형숙은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이내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고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을 목도한 군중들의 만세 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며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연행되었고 일본 경찰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일본 헌병의 물음에 윤형숙은 "보다시피 나는 피 흘리는 조선의 혈녀(血女)다"라며 일본 군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윤형숙은 징역 4개월에 4년 연금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면서 심한 고문으로 오른쪽 눈까지 실명했다.
 
 광주만세운동을 계획했던 남궁혁 장로의 집터. 민족 대표 33인의 묵비석이 놓여 있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낡은 태극기가 찬바람에 휘날리고 잡초가 무성하다
 광주만세운동을 계획했던 남궁혁 장로의 집터. 민족 대표 33인의 묵비석이 놓여 있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낡은 태극기가 찬바람에 휘날리고 잡초가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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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수피아 여학교에서 시작된 만세 행렬이 아리랑을 부르며 남궁혁 장로의 집으로 향하던 이 길을 '아리랑 고개와 3.1만세운동길'이라고 부른다. 벽화에는 윤형숙 열사가 만세를 부르며 피 흘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남궁혁 장로의 집터는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새겨진 '묵비석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광주3.1만세운동길. 수피아 여학교에서 시작된 만세 행렬은 오웬기념각을 거쳐 부동장터로 향하던 중 남궁혁 장로의 집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길을 ‘아리랑 고개’라 불렀고 ‘광주 만세운동길’로 명명되었다
 광주3.1만세운동길. 수피아 여학교에서 시작된 만세 행렬은 오웬기념각을 거쳐 부동장터로 향하던 중 남궁혁 장로의 집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길을 ‘아리랑 고개’라 불렀고 ‘광주 만세운동길’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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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의 숭고한 독립 정신은 사후 54년이 지난 뒤에야 인정받았다. 정부는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열사의 고향인 전남 여수의 이순신공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는 팔이 잘린 열사의 부조물이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수피아 여학교의 3·1 만세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됐으며 1937년 '신사 참배 거부'로 이어져 폐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여수 이순신공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팔이 잘린 윤형숙 열사의 부조물이 그날의 참상을 증언 하고 있다
 여수 이순신공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팔이 잘린 윤형숙 열사의 부조물이 그날의 참상을 증언 하고 있다
ⓒ 여수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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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독립운동 잊지 말아야
 

수피아 여고 교정에 들어서면 맨 먼저 높이 7m의 거대한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세 명의 여학생이 치마저고리 차림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의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동상'이다.

1919년 3월 10일 3·1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피아 애국지사 23인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에 건립하였다. 동상의 좌대에는 당시 광주 3·1 만세운동에 참가한 수피아 여학교 출신 2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으며, 옆면에는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헌정되어 있다.
 
 수피아 여고 대강당 앞에 세워진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 동상.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23명의 명단과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수피아 여고 대강당 앞에 세워진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 동상.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23명의 명단과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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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에 이름 석자 누구나 남기는가
기미년 3·1 운동 선두에 서서
구국의 일념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태극기 앞에 두고서 독립만세를 외쳤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은 아직도 과거사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는 태도와 노골적인 우경화로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초계기 위협 비행과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불거진 한일 갈등은 일본 내 극우세력들의 극단적인 혐한(嫌韓)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백 년 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꽃다운 소녀들이 피 흘리며 흔들었던 '태극기의 진정한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나간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말한다.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채널코리아뉴스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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