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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가 터졌을 때,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몇 번이고 할 말을 잃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단 한 번도 더러운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다. 서로 이미 공유한 일도 있었지만, 가슴 속에 묻으려 했던, 그러나 끝내 없던 일로 만들지 못한 이야기를 이제와 꺼낸 친구도 있었다. 

내 경험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아주 조금은 안도했음을 고백한다. 뜬금없는 안도감에 혼란을 느끼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 감정의 정체를 찾을 수 있었다. 그건, 이제야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 일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찾고 또 찾고 있었다. 

친절하지 말았어야 해, 술을 마시면 안 됐어, 멍청하게 사람을 믿었어 등등 잘못된 접근이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생생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 경솔한 농담이었건, 악의적 행동이었건 간에, 잘못을 처절하게 반성하며 잠 못 이뤄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간을 당하는 게 아니다.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는 건 누군가 그들을 강간하기 때문이다." (p17, 제시카 발렌티 <순결 신화> 재인용)

여기서 '강간'을 보다 넓은 범위의 성폭력으로 치환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존 크라카우어의 르포르타주 <미줄라>는 몬태나 대학교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과 이와 관련된 미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건의 무게감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돌아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분명 일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 소개하고 싶다. 
 
 <미줄라> 책표지
 <미줄라> 책표지
ⓒ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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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무부의 2014년 발표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3년간, 18~24세 여성의 강간 및 성폭행 피해율은 0.7퍼센트로 모든 연령층 가운데 가장 높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2011년 자료를 토대로 한 2014년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의 발표는 전 연령층을 통틀어 미국 여성의 19.3퍼센트가 강간을 당했다고 말한다.

이 큰 차이는 성폭력 피해자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음을 보여준다. 피해 여성의 80퍼센트 이상이 범죄를 신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치밀한 조사를 통해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지, 성폭행은 피해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간이 어떻게 합리화되는지 보여준다. 

책의 제목이자 배경이 되는 미줄라는 몬태나 주의 한 도시로, 한때는 '강간 수도'라는 오명이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보자면 이곳의 강간 사건은 미국 평균이거나 오히려 조금 낮아서,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스캔들"임을 말한다. 강간이 미국 전역에서 빈번하게 벌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 두 가지가 강간과 전쟁이라고 한다. 많은 성폭행 피해자가 전쟁을 경험한 이들과 같은 증상과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플래시백, 불면증, 악몽, 과민, 우울, 고립감, 자살생각, 분노발작, 심각한 불안, 통제력 상실감 등이다. 

사건 자체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끌어안은 피해자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요구가 이어진다. 섬세한 대우를 받는다 해도 증거 채취 절차는 수치심을 일으키고, 가해자와 세간의 시선들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평판을 깎아 내리기 십상이다. 이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삶인 듯하다. 

강간에 관한 구태의연한 관념들은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장애물이 된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덮치는 것만을 강간으로 생각하거나 여성이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관념이 그렇다. 전문가는 강간범에 관한 일정한 프로파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책에 실린 소름끼치는 연구 결과가 있다. 데이비드 리삭과 폴 M. 밀러가 매사추세츠 보스턴 대학교의 남학생 1882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 중 120명(6.4%)이 강간범이었고, 그 중 76명은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도록 섬세하게 만들어진 조사에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그렇게 응답했다. 

이들 76명이 저지른 강간은 최소 439건으로 1인당 6건에 가까웠다고 한다. 즉 소수의 처벌받지 않은 강간범이 많은 여성을 강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을 강간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복면을 하고 칼을 휘두르며 여성을 끌고가는 것만이 강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리삭은 강간에 관한 오해와 근거 없는 믿음이 연쇄 강간범들에게 방패가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모범생이나 서글서글한 운동선수 같은 '좋은 남자'가 연쇄 강간범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 부정 역시, 이들이 같은 범죄를 되풀이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면식범에 대한 고소/기소가 꺼려지는 것은 일반 대중 모두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처벌받지 않으면 그 행동이 고착화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속 성적 포식자로서의 기술을 연마한다. 강간 사건 하나를 무작위로 골랐을 때 그것이 연쇄 강간범의 범행일 확률이 90% 안팎이라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한 피해자는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말고 골목길에서 누가 따라오면 조심하라고 배웁니다. . .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같이 가지 말라고 배웁니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이런 지옥 속에서 사는 게 정말 힘듭니다."(p416)
 

피해자의 자기비난은 지극히 흔한 현상이며, 강간범이 지인인 경우 그 현상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세상이 몹시 두렵고, 예상 불가능한 곳이 되어버리므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공포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자기 비난이 더 편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비난하는 동안,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침묵을 이용해 책임에서 벗어난다. 저자는 이 침묵을 깨는 것만으로도 가해자에게 일격을 날릴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법정에서 끝내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다른 피해자를 격려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성폭행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밝히는 피해자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힘도 커진다. 이 집단적 강인함이 모든 피해자에게, 너무 두려워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피해자에게도 힘을 준다. 그들이 느끼지 않아도 될 수치심은 대개 고립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p454)

나는 모두가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이것이 또 하나의 압박이 되진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끌어모아 나선 자를 응원할 수 있고, 또 그럼으로써 사회 구성원 모두가 치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부당하게 자책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미줄라 - 몬태나 대학교 성폭행 사건과 사법 시스템에 관한 르포르타주

존 크라카우어 지음, 전미영 옮김, 원더박스(2017)


태그:#미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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