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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압록강 철교. 오른쪽 철교는 옛 철교로써 한국전쟁 때 한국 쪽 1/2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기자의 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현재의 압록강 철교. 오른쪽 철교는 옛 철교로써 한국전쟁 때 한국 쪽 1/2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기자의 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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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지난 1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 정정화 지사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어렵게 상해에 가자 국내에서 기대한 것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 생계조차도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는 상해에 간 지 두어 달 뒤 친정에 가서 돈을 구해 올 목적으로 귀국을 결심하고 임시정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선생을 찾아가 상의했다. 예관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시가와 허물없는 사이였다.
 
"제가 친정에 가서 돈을 좀 얻어 올까 합니다."
"부인, 지금 국내는 사지(死地)나 다름이 없습니다. 동농(시아버지 김가진)의 일로 시댁은 왜놈들의 감시가 철저할 것입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겁이 없는 분이었다. 어떤 고초가 따르더라도 귀국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예관은 어머니에게 사사로운 일이 아닌 공적인 임무를 맡겼다. 곧 임정 독립자금을 국내에서 조달해 오는 일을 어머니에게 맡긴 것.

어머니는 상해 출발에서부터 국내 잠입, 국내에서 거처할 곳, 상해 귀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로와 절차를 임정의 지시에 따랐다. 예관은 어머니 친정조차도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을 테니, 당신 조카로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의사인 신필호의 집에 은신하라고 일렀다. 
 
 임시정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선생
 임시정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선생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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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편지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은 어머니 편에 국내 접촉할 인사들에게 편지를 여러 장 써주었는데, 한지에다 백반 물로 쓴 일종의 암호 편지였다. 그냥 무심히 보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지만 그 종이를 불에 갖다대고 쪼이면 글씨가 뚜렷이 나타났다. 또 다른 방법의 통신수단은 한지에 글을 써서 그 종이를 노끈 꼬듯이 꼬아서 물건을 묶어놓으면 편지는 꼭 노끈처럼 위장됐다.

어머니는 예관과 시아버지(동농)의 지시를 받은 다음, 1920년 3월 초순 상해를 출발했다. 국내 잠임 경로는 연통제(聯通制)를 따랐다. 당시 임시정부 연통제는 국내 각도, 및 군 등에 거점을 마련해 임시정부의 법령 및 공문 배포, 군인 및 군속 모집, 독립자금 모금 등의 임무를 원활케 하는 비밀조직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상해에서 단둥까지는 이륭양행의 배편을 이용했다.

이륭양행은 아일랜드인 쇼(George L. Show)가 경영했던 무역회사로 통신 연락이 쉬웠다. 당시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아일랜드와 조선의 처지가 같았기에 쇼는 암묵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초기에 독립자금 운반, 무기의 국내 반입, 독립운동자의 체류지, 망명 인사의 길 안내, 각종 정보의 수집과 연락 등의 중간 기지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아일랜드인 쇼(George L. Show) 가족사진
 아일랜드인 쇼(George L. Show) 가족사진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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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단둥에는 최석순이라는 이가 임정 비밀 연락업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고자 일경 형사로 있으면서 많은 독립운동가의 망명이나 내왕을 도왔다. 어머니는 단둥에 닿자마자 임정의 지시대로 최석순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의 누이동생으로 행세하면서 압록강 철교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신의주에서도 역시 임정 비밀 연락책인 이세창이란 양복재단사의 도움으로 경성(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어머니는 예관 신규식 임정 법무총장이 일러준 대로 세브란스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 박사 집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시아버지와 예관이 지시한 사람들을 한 분 한 분 접촉했다.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옛 동료였던 민영달을 은밀히 찾아갔으나 맨손으로 돌아섰다. 아마도 그는 자금 지원 후유증을 염려해 빈손으로 돌려보낸 듯했다. 그밖에도 시아버지기 지시한 몇 사람을 은밀히 만났다. 하지만 애초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다소의 독립자금을 확보했다. 
 
 젊은날의 아버지와 어머니
 젊은날의 아버지와 어머니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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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배로 압록강을 건너다

어머니는 상해의 지시대로 친정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큰오라버니(외삼촌)는 옥중에 있었기에 일경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가는 대낮에 잠시 들러 시어머니에게 몰래 당신 곁을 떠난 일을 사죄했다. 크게 나무랄 줄 알았던 시어머니는 오히려 대단히 반기면서 시아버지와 아들의 안부를 물으며 뒷바라지를 부탁했다.

어머니 정정화 지사는 서울에서 20여 일 머물렀다. 다소 모은 자금을 전대에 깊숙이 보관한 뒤 상해로 향했다. 서울에서 열차로 신의주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이세창 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단둥에서 신의주로 입국할 때보다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출국하는 길은 더 경비가 삼엄해 위험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열차로 국경을 넘는 것을 포기하고, 배로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일경 몰래 압록강을 건너자면 컴컴한 밤에 건너야만 했다. 그래서 칠흑 같은 한밤중에 이세창씨의 도움을 받아 압록강 하류 강변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 둔 쪽배를 탔다. 어머니는 나루터에서 이세창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서부턴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잠자코 있으라우."


어머니의 만류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행했다. 어머니는 그날 밤 강물소리는 어찌나 무서웠던지 평생 두고두고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어디선가 일경이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아 바짝 긴장했다.

두어 시간 후 쪽배가 중국 쪽 강변에 닿았을 때는 공포감과 긴장감으로 지쳐 기진맥진했다. 이세창씨는 단둥의 최석순 집까지 데려다 주고 그 길로 돌아갔다. 최씨 내외는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어머니를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온 듯이 반겨 맞았다.
 
 압록강 하류. 멀리 보이는 섬이 북한의 위화도이다.
 압록강 하류. 멀리 보이는 섬이 북한의 위화도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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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잔 다르크'

어머니 정정화 지사는 그 집에서 며칠 숨어 지내다가 마침 상해로 떠나는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꼬박 사흘 낮밤을 항해한 뒤 무사히 도착했다.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오자 시아버님도, 예관도 감격하며 맞아줬다. 아버지(김의한)의 반가워하는 표정은 첫 번째 방문 때 못지 않았다. 비록 예상보다 적은 독립자금이었지만 무사히 돌아왔다는 데 세 사람은 감격했다.

어머니가 상해를 떠날 때는 시아버지, 남편, 예관만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오시자 상해 망명사회에서 일대 화제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상해 임시정부의 밀명을 띠고 몇 차례나 더 고국을 잠행 왕래했다.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 우승규(필명 나절로) 기자는 후일 정정화 지사를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명명했다.

김자동 회장이 들려준 정정화 지사의 국내 잠행 이야기는 마치 첩보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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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