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하얼빈에서 만난 고향 출신 항일 빨치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고향 이야기를 평생토록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다. 독일의 헤세(Herman Hesse 1877~1962)는 그의 고향 칼브를 <데미안> 등 여러 작품에서 그렸다. 또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Emilly Brote 1918~1848)도 당신의 고향 호워드의 황야에 살면서 불후의 명작 <폭풍의 언덕>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박경리, 현기영, 김원일, 박완서 등의 작가들도 당신들의 고향 풍물과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뒷날 작품화했다.

사실 나도 습작기인 고교시절에는 고향의 한 인물(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람은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충고를 했다. 그러면서 그 무렵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그분의 전력을 들려주셨을 때, 나는 '멘붕'을 일으킬 만큼 큰 충격에 빠진 채 지냈다.

그런 가운데 내 나이 쉰다섯이던 199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 후손 이항증 선생과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무장투쟁의 선봉장이었던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후손 김중생 선생의 알뜰한 안내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그때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許亨植)이라는 인물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얼빈 동포 사학자 서명훈 선생으로부터 허형식 장군에 대한 소개를 받는데, 그때 동행한 이항증 선생이 내게 불쑥 말했다.
 
 <허형식 장군> 표지
 <허형식 장군> 표지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허형식 열사는 구미 금오산사람이에요."
"네에?"
 
나는 그 말에 온 몸에 전류가 흐른 듯 전율했고, 동시에 가슴 벅차게 뭉클했다. 그와 함께 내가 이 분을 만나기 위해 수륙만리 먼 길을 왔다는 어떤 소명의식을 갖게 됐다.

일제강점기 허형식과 박정희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났어요. 임은동과 상모동은 철길 하나 사이지요."
"네에!"

나는 '임은동과 상모동은 철길 하나 사이'라는 이 선생의 그 말에 또 놀랐다. 상모동은 박정희 생가마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비로소 내가 찾던 작품의 주인공을 찾았다고, 마치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어떤 황홀경에 빠졌다.

그때 연길의 한 서점에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4 <결전>이란 책을 샀다. 귀국한 뒤 아들에게 그 얘기를 하자 그 책 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사진을 스캔해줬다. 그때 나는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오늘까지 서가에 세워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동안 대여섯 차례 허형식 장군을 주인공으로 실록소설을 쓰려고 기필했으나 번번이 탈고치 못한 채 세월만 보냈다.

그렇게 된 연유를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나의 게으름에다가 독립운동사에 대한 나의 무지요,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라는 공간에 대한 나의 공부 부족이요, 중국어와 한자 실력 부족 등이었다.

그런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내 나이 일흔에 이르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2014년 10월 5일부터 이듬해인 2015년 2월 14일까지 오마이뉴스에 <들꽃>이라는 제목으로 <허형식 장군> 일대기를 모두 41회로 연재했다. 나로서는 마치 게으름뱅이 초등학생이 방학숙제를 미뤄오다가 개학을 앞두고 허급지급 쓴 작품으로 연재를 마치자 어딘가 작품으로서 성글고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2015년 연말부터 오대산 월정사 명상관에 머물면서 이 작품을 새로 쓰듯이 다시 집필하여 비로소 탈고한 것이 이 작품 <허형식 장군>이다. 탈고한 후 다시 읽어보아도 '대붕(大鵬)을 그리려다가 연작(燕雀)을 그린 꼴'로 매우 미흡하지만 역사에 파묻힌 한 항일파르티잔을 세상 밖으로 꺼낸다는 소명감으로 감히 세상에 이 작품을 내보내고자 했다.

이 작품을 탈고하고도 선뜻 책으로 펴낸 줄 출판사가 없어서 한동안 낙담했다. 이는 내가 이 작품을 성글고 거칠게 쓴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좌우 흑백 이념논리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고자 동북항일연군의 항일투쟁한 것조차도 무조건 백안시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매카시즘에 절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허형식 장군>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주신 귀빈들(왼쪽부터 이항증, 기자, 이종찬, 정운현 선생)
 <허형식 장군>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주신 귀빈들(왼쪽부터 이항증, 기자, 이종찬, 정운현 선생)
ⓒ 정운현

관련사진보기

 
 고향 서점(삼일문고)에서 만난 장세용 구미시장(오른쪽)과 기자.
 고향 서점(삼일문고)에서 만난 장세용 구미시장(오른쪽)과 기자.
ⓒ 장세용

관련사진보기

 

고향에서 일어난 기적

다행히 그동안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집을 펴내준 눈빛출판사에서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펴내주었다. 그러자 나의 옛 제자들과 우당기념관 이종찬, 임청각 후손 이항증 선생 등 독립후손들과 김태동, 정운현, 장세윤, 고상만 선생 등이 자리를 함께 해주시고 리뷰도 써줬다(관련 기사 : 박정희만 알고 허형식은 모르는 그대에게).

게다가 지난해 6.13선거 당시 대구경북의 심장 내 고향 구미에서 더불어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된 장세용 구미시장이 선거공약으로 허형식 장군의 기마상을 건립하고자 한다는 얘기 등으로 초판 1쇄가 일찍이 품절됐다.

그러자 지난해 8월 고향 후배들이 원주 내 집까지 찾아와 증쇄를 부탁했다. 지난달에는 고향 후배들이 기마상 건립에 앞서 허형식 장군을 독립유공자로 포상신청을 하겠다면서 자료 수집을 위해 두 번이나 내 집을 찾아왔다.
 
 내 서재를 찾아 온 고향 후배 지도자들(왼쪽 신문식 구미시의원, 전 더불어민주당 장기태 구미시을지역위원장).
 내 서재를 찾아 온 고향 후배 지도자들(왼쪽 신문식 구미시의원, 전 더불어민주당 장기태 구미시을지역위원장).
ⓒ 박도

관련사진보기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패자의 기록, 역사에 묻힌 한 인물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작가의 몫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일제강점기 때에 투철한 항일 영웅인 한 항일파르티잔의 순결한 희생을 그리고 싶었다.

그분은 동북의 인민과 자기 전구를 지키기 위하여, 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가 되지 않기 위해 끝내 소련으로 월경하지 않았고, 스스로 당신의 육신을 이 겨레에 바친 조선의 무명베와 같은 올곧은 항일 명장이다.

그분은 혈육 이육사가 노래한 '백마 타고 온 초인'이기도 하다. 이육사 시인의 어머니가 허길로 허형식 장군의 사촌누이다. 이육사는 허형식을 모델로 불멸의 시 <광야>를 썼다. 나는 그 언젠가 허형식 장군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항일 파르티잔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날이 오리라 확신한다.

그분의 생애를 그린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 개정판 1쇄를 대한의 작가로서 삼가 이 나라 이 겨레에게 바친다.
 
"이 작품의 주인공 허형식 장군은 당대의 여러가지 모순을 척결하고, 억압과 폭력, 차별이 없는 사회, 불평등과 탐욕, 약자에 대한 수탈없는 사회,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풍요로운 사회,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맹렬히 투쟁하다가 끝내 33세의 나이로 만주국 토벌대의 총탄에 장렬히 산화 했다." -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
 
 <영웅 안중근> 표지
 <영웅 안중근> 표지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영웅 안중근>

우리 근현대사에서 남북한을 초월해 이론 없이 추앙하는 항일 투사는 아마도 안중근 의사일 것이다. 그분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권총 한 자루를 단신으로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처단하여 2000만 백성들의 체증을 시원히 뚫어주셨다.

나는 그분의 순국 100주년 기념일 날, 한국을 떠나 연해주 크라스키노 연추하리 마을로 가서, 안중근 의사의 이승에서 마지막 행장 160일을 곧이곧대로 아흐레간 답사했다.

연추마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거기서 열차를 타고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아, 쑤이펀을 경유하여 40시간 45분만에 하얼빈에 이르자 하얼빈의 동포 사학자 김우종 선생이 하얼빈 역에서 두 손을 들어 반겨 맞았다.

"내 평생 하얼빈 안 의사 답사자를 숱하게 만났지만, 박 선생처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수분하를 거쳐 곧이곧대로 열차를 타고 온 이는 처음 보오. 선생의 그 열정에 여기까지 마중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거쳐 간 곳을 한 치 어긋남이 없이 답사한 뒤 지야이지스고(채가구)역을 거쳐 다롄 뤼순 역까지 갔다. 그곳의 뤼순 관동지방법원, 뤼순 감옥을 둘러본 뒤 뤼순감옥 옛 묘지로 가서 그곳 흙은 두어 홉 담아왔다. 서울에 온 뒤 효창원 안중근 의사 가묘에 헌토했다.

이 모든 과정을 <오마이뉴스>에 2010년 9월 10일부터 2010년 11월 16일까지 43회에 걸쳐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뒤 같은 제목으로 묶어 눈빛출판사에서 펴냈다. 출판 불황 속에서도 그동안 4쇄까지 발행 후 2년 전부터 품절된 것을 이 봄에 5쇄를 펴냈다. 
 
 시베리아 철도변 아무르강 낙조
 시베리아 철도변 아무르강 낙조
ⓒ 박도

관련사진보기

 
'죽어도 좋아'
 
"어디선가 체첸의 비애가 담긴 '백학'이 들려오는 듯하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를 찬미하는 이 노래는 약소민의 아픔이 물씬 묻은 노래다. 이 가사에는 '돌아오지 않은 병사'라는 노랫말이 있다. 꼭 일백년 전 하얼빈 행 열차를 타고 이 철길을 달렸던 안중근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전사'가 아니었던가.

갑자기 열차 차창에 비가 뿌렸다. 그러자 바깥 언저리가 어두워졌다. 그러자 열차 밖 풍경은 보이지 않고 차창에는 내 얼굴이 점차 뚜렷해졌다. 늘그막에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한 영웅의 마지막 발자취를 뒤쫓아 가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번 답사 중에 나는 죽어도 조금도 억울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죽어도 좋아'라는 말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