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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표현이 역설적인 뜻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T.S.엘리엇의 <황무지> 첫 소절을 읊던 시절이 있었다. 온 동네가 제삿날이던 다음날, 가난한 까까머리 촌놈들 도시락 반찬에 산적고기가 보여도 무슨 날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던 그날이 4월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제삿밥에 소주를 들이부으며 아무도 발설하려 하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남정네 옆에서 나이 든 어른들은 연신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던 시절, 제주에서 4.3은 금기어였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침묵을 강요당했던 4.3이 국가 추념일로 지정되고, 현직 경찰청장이 머리 숙여 애도를 표하는 시절이 된 걸 보면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철저한 4.3 진상조사를 거부하며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세력 또한 여전하다.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당시 진행된 군사재판의 무효화 등의 내용을 담은 4.3특별법 개정안이 1년 넘게 국회 문턱을 못 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기본에 충실한 소설

발설조차 금지됐던 기억, 제주 4.3을 반추하며 담담하게 전달한 소설 <검은 모래>는 제1회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저자 구소은은 제주 해녀의 삶을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사까지 익숙한 사건들 속에서 풀어냈다.

공간적으로는 제주 우도에서 일본 어느 화산섬까지 폭넓게 펼쳐진다. 그 속에 일어난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위들이 별다른 묘사 없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옛 신문을 들추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소설 속 허구가 아니라 역사 속 이야기를 시간 흐름에 따라 기록한 서사로 읽히는 장점이 있다. 
 
검은 모래 구소은 장편소설, 바른북스 출판
▲ 검은 모래 구소은 장편소설, 바른북스 출판
ⓒ 바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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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적 관점을 갖고 작가는 제주 여인이 핏덩이 딸자식을 보며 가련하고 애처롭게 생각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제주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천형으로 삼고 살아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였고, 그 어떤 모진 간난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목숨을 뜻했다."-16쪽

자식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과 달리 제주 여인들은 고생을 각오하고 살아야 했다. 특별히 출향 해녀들은 외지에서 서러움을 느끼면서 궁색한 가운데도 바다 속으로 녹아드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힘든 물질에 어느 정도 돈을 벌었다 해도 어깨가 가벼워지는 일은 없었다. 돌아가면 갚아야 할 빚, 원금에 새끼까지 친 이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라는 놈은 진저리처지는 시궁쥐처럼 번식력이 좋았다." -24쪽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늘날 송출업자들에게 돈을 빌려 이주노동을 떠났던 이들의 삶을 떠올려 보면 작가의 말이 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물론 소설 속 제주 여인들은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을 떠나는 이들보다 좀 더 강인하고 긍정적이다. 세상이나 환경을 탓하는 법이 없다.
 
"구월은 수업의 마지막에 해금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바다가 아무리 험악하고 모질게 굴어도 절대로 원망하지도 말고 탓하지도 말아라. 우리 잠녀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까. 우리네 인생이 바다에 달렸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101쪽

여전히 여행 중인 사람들

<검은 모래>는 단순하게 제주 출신 해녀의 삶만을 조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디아스포라인 주인공을 통해 어딘가에 정착을 꿈꾸는 이방인과 선주민의 상생과 화해를 이야기한다. 작가가 표현한 디아스포라, 원치 않게 국경을 넘은 이들의 삶은 가슴 아프다.
"그들의 삶에는 늘 결핍이라는 물이끼가 습진처럼 끼어 있다. 아무리 먹고살 만해도 그들의 가슴은 허기지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늘 춥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설명한들 알 수 있을까." -215쪽

작가가 보기에 가난하고 슬픔 삶, 처절한 죽음이 너무나 흔했던 시절을 산 이들, 고향을 등지고 상처받은 이들의 새살을 돋게 하는 마법은 세월이다. 그 세월을 산 이들 가운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여행 중이라는 대목에서 울컥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 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 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321쪽

<검은 모래>는 눈에 밟히는 고향으로 달려가는 여행을 수십 년째, 어쩌면 대를 이어 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조망한다. 고국산천을 떠나 민들레 홀씨처럼 강인하게 정착했지만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부모 세대와 자식들과 같을 수 없다. 그로 인한 갈등과 화해 과정을 묘사하며 <검은 모래>는 디아스포라라는 삶을 긍정적으로 그렸다.
"어디를 간들 제한된 인간의 삶이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무너지면 다시 세우고 파이면 메우면 되는 것을. 그러나 속절없는 인생, 파도에 훨훨 씻어가며 산다." -325쪽
 
<검은 모래>는 어디를 가든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인간이 낯선 존재들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를 보여준다. 설령, 기억이 언제나 고향 땅으로 달려가고 그리워한다고 해도 말이다. 

<검은 모래>는 소설 기법만 놓고 보면 역사적 사건 등을 설명으로 처리해 묘사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제주평화문학상 심사자들이 평했던 바대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요즘의 경향과 달리 <검은 모래>는 소설에서 서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입증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본질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4.3을 기억할 것인가, 망각할 것인가는 기록에 달렸다. <검은 모래>는 출향 제주 해녀들의 삶을 통해 잔인한 달을 떠올리며, 희망의 달로 부활시킬 것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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