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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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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월 첫 인터뷰 후 꼭 석 달 만인 지난 3일 다시 서울 도렴동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을 찾아갔다. 그날 약속시간 임정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이르자, 때가 때인지라 사무실 안팎에는 여러 장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대한민국 100년 포스터
 대한민국 100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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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대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학술대회 포스터
 ‘3.1 대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학술대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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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야 할 인물들’
 ‘기억해야 할 인물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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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년 2019년 4월 11일'이라는 포스터, '3.1 대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학술대회 포스터, 또 다른 벽면에는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중 '기억해야 할 인물들' 포스터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담아놨다. 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이다. 임정기념사업회로서는 그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김자동 회장은 당신 사무실에서 단정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순 노인이지만, 아직도 동안(童顔)으로 모범 학생처럼 앉아 있었다. 김 회장은 듣는 데 불편함이 심했다.

"어서 와요, 박 선생!"

내가 자리에 앉아마자 당신은 그 며칠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자랑을 했다.
 
 중국 난징에서(1935) 김자동 회장 가족
 중국 난징에서(1935) 김자동 회장 가족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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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의한

"내가 오래 살긴 살았나 봐. 엊그제는 내한한 브루스커밍스를 만났지. 내가 그 사람 책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지 30년이 훨씬 지났는데 말이야.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고 양심적으로 본 사람이었지."

내가 "오늘은 아버님 이야기를 주로 들려달라"고 하자 김 회장은 아버지 김의한 선생의 생애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김의한 선생은 1900년 태생이었다. 어머니 정정화 지사와 결혼한 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지내다가 1919년 10월 할아버지(동농 김가진)의 망명에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따라나섰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듬해 초 상해로 가셔서 다시 상봉해 김자동 회장이 태어나게 됐다.

"아버지는 상해에 있으면서, 고국 잠행으로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을 어머니가 주도한 것은 당시 프랑스 조계에 살았기에, 특히 남자들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 꼼짝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할아버지의 망명으로 본가의 살림이 어려웠기에 형편이 나은 외가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 했지요.

임시정부 수립 후 몇 년이 지나자 재정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요원 및 직원들에게 '생계는 각자 해결하라'고 하였지요. 사실 아버지는 외국어도 능통치 못했어요. 마침 영국인 기차공사(버스회사)에 감표원으로 취직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김의한 선생의 인생역정은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잘 정리돼 있다. 이후의 삶은 일부만 발췌해 소개한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 의사 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항주 등지로 이동할 때 김구 주석과 함께 동행하면서 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안공근(安恭根)·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군관학교 분교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의 비서와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특히 충칭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 회계책임자)에 선임되었다.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에 선임되었으며 한편으로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 아버지 묘비 앞에 선 김자동 회장 부부. 묘비 앞에 남에서 가져간 어머니 사진이 놓여있다.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 아버지 묘비 앞에 선 김자동 회장 부부. 묘비 앞에 남에서 가져간 어머니 사진이 놓여있다.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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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나는 중국에서 귀국한 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일제 패망 이듬해인 1946년 5월 15일 부산항을 통해 우리 가족이 입국했어요. 나는 보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해 다니다가 졸업 후 서울대학교 법학과로 진학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지요. 사흘 만에 인공 세상으로 우리 가족은 피란치 못하고 서울에서 지내다가 1950년 8월 초에 의용군에 소집됐어요. 일신초등학교에 집결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오셔서 만났습니다. 그날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 될 줄은 몰랐지요.

나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입대 후 서울 시흥에서 500리 길을 걸어 그해 9월 초에 해주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귀향코자 결핵으로 꾀병을 부리다가 진짜 이질에 걸렸습니다. 해주에서 요양 치료를 받다가 그해 9월 15일 귀향증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9월 19일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나를 껴안고 한참 우셨습니다. 내가 귀가하기 하루 전날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온 청년들을 따라 나가신 뒤 소식이 없다고 말씀하시대요.

아버지가 북으로 가신 지 56년 만인 2006년 우리 가족들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들고 평양 용궁동에 있는 재북인사 묘역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그때 나는 현충원 어머니 묘에서 파온 흙을 아버지 묘소에 뿌려드렸지요. 두 분은 사후에 그렇게 해후하셨습니다."
 

나는 그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겨레의 수난사가 어찌 한 집안만의 일이겠는가. 미군부대 통역시절, <조선일보> 입사 및 <민족일보> 기자 시절 등 김 회장이 직접 겪은 한국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줄인다. 더 이상 얘기를 듣고 싶은 독자는 김자동 회고록 푸른역사 발간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을 읽길 권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진도가 궁금했다.

"이종찬 우당기념관장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나는 너무 늙었기에 그분이 그 일을 맡아 수고하고 있습니다. 상해서부터 우당 집안, 백범 집안, 우리 집안은 세교가 아주 두텁지요. 내가 태어날 때는 이종찬 관장 어머니가 받아냈다고 하고, 이 관장 태어날 때는 우리 어머니가 받아내고 산후 수발까지 했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백범 선생을 '아저씨'로 부를 만큼 친밀했지요. 제 보성중학교 졸업식 때도 백범 선생이 축하하러 오셨고요."

대담의 마지막 말씀을 부탁드렸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남북교류가 활성화되고, 통일의 그날이 내 생전에 오기를 기다립니다."
 
김 회장은 거동이 불편해 의자에 앉은 채 내게 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실을 벗어났다. 그 길로 우당기념관장을 찾아갔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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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