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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증심사 대웅전 앞마당에 가득 내려앉아 있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증심사 대웅전 앞마당에 가득 내려앉아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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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이 끝나고 난 뒤, 절집은 고요하기만 했다.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정지된 듯, 무중력 상태의 우주 공간과도 같은 깊은 적막 속에 침잠해 있었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만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대웅전 앞마당에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무유등등(無有等等), 차별 없는 평등한 마음을 담고 있는 빛고을 광주의 무등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아담한 절집. 증심사(證心寺)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어느 봄날 오후의 풍경이다.

광주와 무등산과 증심사,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무등산 하면 증심사요, 증심사 하면 무등산이다. 셋은 동의어처럼 한 몸으로 묶여 있다. 광주의 어머니산, 무등의 품속에 안기려는 산행객들의 약 7할 정도는 증심사와 마주하게 된다.  

광주불교의 중심 도량

무등은 그 이름과는 달리 먼 옛날부터 차별과 소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차별은 통일 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 강점기의 착취와 수탈로 이어졌으며, 1980년 5월에 이르러서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물론, 그 진실 여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지만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죽기 얼마 전에 '훈요십조(訓要十條)'라는 유훈을 통해 '충청도 일부와 호남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후손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뒤틀린 정치권력과는 다르게 무등산은 그 무정한 세월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무등의 마음, '평등'을 실천하고 있다. 그 중심에 증심사(證心寺)가 있다. 절 이름 '증심(證心)'은 마음(心)을 증득(證得)하다, 즉 진리와 지혜를 깨달아 얻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부처의 덕은 그 무엇과도 비할 바가 없다 하여 무등(無等)이라 불렀다. 무등의 자락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좇아 증심(證心)을 이루는 곳인 증심사. 광주를 대표하는 기도 도량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철감선사 도윤 스님(798~868)이 창건했다. 그 뒤 고려 선종 11년(1094)에 혜조국사의 중창을 거쳐, 조선 세종 25년(1443)에 광주에 경양방죽을 축조한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수했다. 이때 오백나한을 모시는 오백전(五百殿)을 지었다.

다른 고찰들과 마찬가지로, 증심사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의 화마를 비켜 가지는 못했다. 전라도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원년(1609)에 대규모로 중수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오백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들을 또다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1970년대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을 복구한 증심사는 1200여 년 영욕의 역사를 안은 채, 무등산 서쪽 기슭에서 '무등의 가치'를 설 하고 있다.
       
'속세(俗世)'에서 '진계(眞界)'로 들어가는 관문
 
 속세에서 진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 증심사 일주문
 속세에서 진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 증심사 일주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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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버스종점에서 증심교를 지나 중머리재로 향하는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고즈넉이 자리 잡은 증심사가 나온다. 증심 계곡의 청량한 봄 물소리를 뒤로 한 채, 속세(俗世)를 떠나 진계(眞界)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을 지나자 왼쪽 언덕에 부도전이 보인다.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들과 스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부도와 비석들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한다.
     
가파른 언덕길이 연하여 이어진다. 진계로 들어가는 두 번째 관문,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만난다. 사천왕문은 불국 정토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대천왕이 있는 곳으로, 악귀들을 쫓고 불자들에게 절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게끔 하기 위해서 천왕들이 칼과 비파와 탑을 들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오르는 언덕길 끝무렵에 이르자 비로소 증심사의 얼굴 취백루(翠柏樓)가 높은 석축 위에서 그 위용을 드러낸다. 취백루는 2층 누각으로 6·25 때 불타고 없어진 것을 1970년대에 다시 지었다. 1층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은 강당으로 쓰고 있다.

1574년 호남 의병장 제봉 고경명이 쓴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를 보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취백루는 광해군이 중수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취백루의 높은 언덕길을 돌아 경내로 들어선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대웅전의 화려한 꽃문살이 따스한 햇볕을 받아 아름다운 봄꽃으로 피어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중생을 반긴다.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지장전과 행원당, 적묵당이 봄볕 가득한 절집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물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증심사는 다른 절들과는 다르게 대웅전 뒤쪽에 석탑을 비롯한 주요 문화재와 전각이 들어서 있다.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를 돌아서면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는 오백전(五百殿)을 만난다. 오백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은 1443년(세종 25) 전라감사 김방이 지은 것으로, 6·25 한국전쟁 때도 불타지 않은 유일한 당우이며,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개미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증심사에서는 해마다 '오백대제'를 열어 뭇 중생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증심사 철조비로나좌불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대표적인 철불(鐵佛)이다. 보물 제131호
 증심사 철조비로나좌불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대표적인 철불(鐵佛)이다. 보물 제131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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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전 바로 옆에 비로전(毘盧殿)이 있다. 주존불인 '철조비로자나불상'이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두루 비치며 중생들을 광명의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검은색 철조 불상과 붉은색의 후불탱화가 '적과 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나좌불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대표적인 철불(鐵佛)이다. 이 불상은 원래 증심사에 있었던 게 아니다. 대황사라는 절에 있었던 불상이라고 전해진다. 1934년 대황사 폐사지에 옛 전남도청이 들어서게 되면서 증심사로 옮겨 오게 됐다. 대웅전과 비로전 사이에는 사각모 지붕이 얹혀있는 원통전이 있다. 건물보다는 안에 있는 석조 불상이 눈길을 끈다.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이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인 석조보살입상도 원래 증심사의 것이 아니었다.
     
전남 담양의 서봉사지에 있던 것을 증심사 신도였던 현준호(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조부)가 증심사로 옮겨 왔다고 <광주시사>는 전하고 있다. 2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는 석조 입상은 마모 상태가 심해 얼굴 모양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타원형의 잘생긴 얼굴임에는 틀림없다. 목걸이를 걸고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면 절에는 '석탑'이 있다
 
 오백전 앞 3층 석탑이 증심사의 창건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오백전 앞 3층 석탑이 증심사의 창건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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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백전 옆에 5층 석탑과 7층 석탑이 나란히 서있다. 5층 석탑은 고려 시대 때 만들어졌다. 7층 석탑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오백전 옆에 5층 석탑과 7층 석탑이 나란히 서있다. 5층 석탑은 고려 시대 때 만들어졌다. 7층 석탑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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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에는 창건 당시 세워진 3층 석탑을 비롯해 신라, 고려, 조선의 각 시대별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3기의 석탑이 있다.

오백전 앞에 서있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3층 석탑은 증심사의 창건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 전수된 탑으로 증심사 소장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칠감선사가 창건 당시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백전 옆으로 한 발짝 옮기면 5층 석탑과 7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5층 석탑은 고려 시대 때 만들어졌다. 면석에 꽃문양이 새겨져 있는 5층 석탑은 1933년 해체 복원 시 탑 안에서 작은 철탑과 철부처, 청옥과 금동 불상 등 국보급 복장 유물이 나왔다. 당시 국보 제211호로 지정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제212호인 '금동보살입상'은 6·25 동란 중 분실돼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7층 석탑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다른 탑들과는 달리 기단이 없는 게 특징이다. 지대석 위에 바로 탑신을 올렸다. 몸돌에는 연꽃을 넣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옴마니반메흠'이라고 새겨져 있다.

무차(無遮)의 마음을 담고 있는 무등산 증심사에는 이처럼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물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나란히 서서 극락정토를 이루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채널코리아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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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