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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거주할 때의 일이다. 길을 걸을 때면 어린 아이들이 다가와 구걸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곳에서 나는 눈에 띄는 외국인이었으므로 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주요 공략 대상이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넉넉한 돈을 주거나 풍성한 음식을 사주고 때로는 집에 데려와 마음껏 씻고 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 아이에게 커다란 빵을 살 수 있는 돈을 주었지만 대번에 거절 당했다. 아이는 내 지갑을 가리키며 더 큰 돈을 요구했다. 십 분이 넘도록 나를 쫓아오며 계속해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아이에게 나는 화를 냈다. 저리 가, 가라고. 나 너한테 한 푼도 줄 생각없다면서. 

집에 돌아와 머리가 아플 때까지 울었다. 나는 왜 열 배의 돈을, 두 팔 가득 안길 음식을 사주지 않았나. 그들이 영원히 구걸로 먹고 살려고 들까 봐?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까 봐? 그건 가난한 나라를 갈 때마다 내 마음을 무장하는 비루한 핑계는 아니었나. 어찌됐든 그 아이가 바싹 마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며칠을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보기 싫었고, 그들을 방치하는 그 나라가 싫었고, 현명한 대처법을 갖고 있지도 않고, 쉽게 호의를 베풀지도 않는 내가 싫었다. 그 모든 미움이 나를 며칠씩 못살게 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혼란스럽다. 돕지 않으면서 가슴 아프다 하는 것은 위선은 아닌가. 나는 그 아이들 때문에 울었다 말할 자격이 있는가.

오늘, 애써 내 편이 되어본다. 나는 적어도 그 아이를 생각하며 우는 한 사람이었다고. 세계의 한켠에는 언제나 가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무심하지는 않았다고. 적어도 나는 타인의 고통에 한순간이나마 공명했다고. 

볼썽사나운 자기연민이라 해도 괜찮다. 나는 죄책감에 몸부림 쳤고 나의 윤리를 돌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내 감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과 내 사이에 차단벽을 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을 보았다. 
 
 <공감 연습> 책표지
 <공감 연습> 책표지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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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공감하고 나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돕는 작가를 만났다.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책이다. 부제는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 저자의 지독히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공감을 향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고백을 하고 싶게 만든다. 

그녀는 공감이 때로 자기연민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를 확장하겠다는 선택일 수 있음을 말한다. 타인의 불행이 내게 벌어질까 봐 걱정하더라도, 행여 의무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살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보살핌이 공허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 행위란 단순히 우리 개인적 경향성의 총합보다 훨씬 큰 일단의 행위에 헌신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의 슬픔에 귀를 기울일 거야, 설사 나 자신의 슬픔에 깊이 빠져 있을지라도. 이렇게 몸짓을 해 보이겠다고 말하는 것, 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나 정신 상태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 - 그 노동, 그 몸짓, 그 춤 - 을 깎아내린다기보다는 인정하는 것이다."(p50)

그녀는 모겔론스 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만난다. 피부 밑에서 이상한 섬유가 나오는 병.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은 만여 명이 넘지만 의학계에선 인정되지 않고 때때로 질병이 아닌 망상으로 치부된다고 한다. 타인의 불신은 이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고, 그들은 외로움과 맞닥뜨린다. 

그들을 위로하기에 앞서 고민에 봉착하기 쉽다. 의학계에서 인정되지 않은 병을, 실재하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이 병을,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 믿지 않고서 위로한다는 것은 거짓은 아닌가? 어디 이 병뿐이겠는가. 우리 모두는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각자의 고통을 끌어안고 산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고통의 근거를 따질 것이 아니라, 상대가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귀기울일 수 있다고. 고통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고. 나는 그녀가 공감과 동시에 인간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짧은 관광으로 타국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허구다. 그녀는 고통 또한 마찬가지임을 말한다. 빈곤, 통증, 고된 노동 등 타인의 고통을 잠깐 들여다본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하루를, 1년을,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단지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 이해할 수도 없다면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녀는 말한다. 그 불편함이 핵심이라고.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둘러보는 관광객일 뿐이지만, 결국 머리에서 그것을 떨쳐낼 수 없게 된다. (중략) 당신이 누리는 특권에 대한 커다란 부끄러움은 내내 뜨거운 화끈거림으로 나타난다. (중략) 당신은 죄책감의 기계장치가 덜커덩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를 듣기 힘들지 모른다. 어쨌거나 경청하려고 애쓰시라."(p157)

물리학에는 "관찰자 효과"(p301)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어떤 물리적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지켜보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공감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공감의 영역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다. 

책을 닫는 마지막 장의 소제목은 '여성 고통의 대통일 이론'이다. 저자는 여성의 고통을 감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이야기 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상처는 실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의 고통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나는 아파하는 여성이 하나의 클리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수많은 여성이 여전히 아파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나는 여성의 상처란 낡아버린 것이라는 명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주장에 내가 상처받는 기분이니까."(p329)

그녀는 각자의 피해가 개인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유아론적인 것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바뀔 때, 비로소 고통은 그 자체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또 우리는, 듣고, 또 들어야 한다. 고통에 둔감해지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감상성을 경계할 필요도 없다. 때로 무력감을 느끼고,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그저 공감하시라. 나의 삶이 고단해도, 세상에 거대한 뉴스가 너무 많아도,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공감의 유한 경제를 믿지 않는다. 나는 관심을 쏟는 것이 세금만큼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p359)

공감 연습 -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문학과지성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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