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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이다. 아직 아침저녁은 서늘하지만, 잠시 한 눈만 팔면 여름이 코앞에 와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 작년 같은 폭염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름은 여름일 터. 그 여름의 절정에 내 머리카락은 아마도 허리께를 넘실거릴 것이다. 지금도 비슷하단 얘기다.

나는 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가. 확고한 패션 철학이나 뛰어난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긴 머리가 딱히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미용실은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고 헤어스타일링이란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그냥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둘 뿐. 

머리카락이 길든 짧든 더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덥긴 할 테다. 그렇다고 겨울에 따뜻한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별 다른 헤어 제품을 쓰지는 않지만 샴푸값은 더 들 것이고, 말리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건 당연지사. 나는 왜 비효율적인 긴 머리를 고수하는가.

나이 들수록 긴 머리가 청승맞다는 말에는 그대 머리나 아름답게 관리하시오, 대차게 쏘아 붙이지만 그렇다고 긴 머리를 편들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탈코르셋을 지지하며 댕강 잘라버려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오늘도 생각뿐. 나는 오늘도 긴 머리를 고수하며(방치하며) 이유를 생각해 본다. 

 
 <이사부로 양복점> 책표지
 <이사부로 양복점> 책표지
ⓒ 황금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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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살 권리를 명랑하게 말하는 소설이 있다. 가와세 나나오의 장편소설 <이사부로 양복점>이다. 목차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뢰파 코르세티에, 도호쿠 사투리 스팀펑크, 자포니즘과 평행 세계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행방 등.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신경쓰지 마시라. 명랑하고 발랄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면 그만. 물론, 작가의 전공을 살린 해박한 지식이 가득하니 생소한 단어들은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쭉 변변찮을 것이 분명하다.
 중학생 때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 확신으로 바뀌었다."(p8)

한창 생기 넘칠 법도 한 만 17세 소년이 하는 말로는 울적하기 그지없다. 그는 자신의 별 볼일 없을 인생을 진작 받아들였다. 소년은 자신의 네 가지 비극을 이렇게 설명한다.

후쿠시마 현의 어중간한 시골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트라우마 수준의 상처를 안기는 '아쿠아마린'. 생활고에 허덕이는 모자 가정인 것은 괜찮다 쳐도, 엄마는 에로 만화가다. 심지어 아들에게 미성년자 관람불가 만화의 배경 그림을 부탁하는 지경. 마지막으로 꼽는 비극은, 볼품 없는 자기 자신이다. 

여느 때처럼 긍정적 에너지라곤 하나도 없이 학교에 가던 그의 눈에 쏙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사부로 양복점'이다. 문 닫은 가게가 대부분인 퇴색한 상점 거리. 그 안의 남성 양복 전문점에 여성 코르셋이 떡하니 걸려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프랑스의 유서 깊은 의상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수준의 아름다운 속옷이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만화를 그리고 당시 의상을 철저하게 조사해 실제와 가깝게 그리는 엄마 덕분에, 아쿠아마린은 이 코르셋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본다. 뼈대를 이루고 있는 고래수염, 한껏 발휘된 18세기 로코코풍의 기교. 완벽한 장인의 솜씨, 예술의 경지다.

그 작품의 주인은 진작 폐업한 이사부로 양복점의 사장이자 까칠하고 꼬장꼬장한 여든두 살의 노인, 이사부로. 소년이 코르셋을 만든 이유를 묻자 노인은 엉뚱한 대답을 한다.
 
"(…)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한다! 화염병을 여자 속옷으로 바꿀 때야! 속옷으로 이 세상을 깨부술 순간이 왔어!"(p54) 

이사부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쿠아마린은 그의 완벽한 솜씨와 열정, 넘치는 투지에 빠져든다. 또한 이사부로 역시 자신의 솜씨를 알아보는 아쿠아마린의 독보적인 재능을 알아본다. 비관과 체념으로 가득하던 소년, 매일 똑같던 그의 지친 일상에 활기가 생겨난다.
 
"엄마 일을 돕다 보면 따라붙는 지긋지긋한 지식이어서 이런 데 흥미를 느끼는 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최대한 거리를 두고 늘 나와는 별개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는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이런 시골마을에 존재하다니,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p67)

소년은 이사부로 양복점에 매일 들러 그의 일을 지켜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사부로가 거는 조건은 단 하나.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라고 해도 무방할 테다.
 
"남의 눈치 보지 마. 남과 비교하지 마. 의견을 억누르지마. 네 인생을 너 이외의 누구에게도 맡기지 마."(p79)

이들의 행보가 순탄치는 않다. 지역 상공회는 여성 속옷이 상점가의 이미지를 하락시킨다며 영업을 방해하고 심지어 이사부로의 아들마저 남 눈치를 살피며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혁명의 동지가 된 이들이 그들의 훼방에 물러설 쏘냐. 이사부로와 아쿠아마린은 또 다른 동지들을 찾으며 영업 재개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재치 가득한 이야기는 성장 소설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을 경계하던 소년은 이사부로와 대등한 신뢰관계를 쌓아가고, 누구나 저마다의 연약한 내면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년의 열등감도 시나브로 사라져가고 그는 자신있게 제 의견을 표현하게 된다.  

재미있는 성장 소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소설의 배경이 후쿠시마현이라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마을 사람들은 공유하고 있는 슬픔이 있다. 이들이 내면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참사를 딛고 서로를 의지하며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는 가슴 뭉클한 뜨거움이 전해진다. 

단, 성차별에 극렬히 반대하는 마나베 여사가 타인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된 다소 부도덕한 인물로 묘사된 것은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10대 소년과 80대 할아버지의 우정으로 마을이 재건되는 과정은 확실히 유쾌하고,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메시지는,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일 테다(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는 물론이다). 이사부로가 몸소 실천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널리 퍼뜨렸듯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이유 따윈 필요없다. 

남이 한 마디만 해도, 심지어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도, 괜히 눈치를 보며 움찔하게 되는 게 우리네 삶 아니던가. 그러지 말자, 이 말씀. 간단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그러니 매일의 다부진 각오가 필요할 터. 나는 오늘도 산발이 된 긴 머리를 방치하며 내 맘대로 살아보자 굳게 다짐해 보는 바이다. 

이사부로 양복점

가와세 나나오 지음, 이소담 옮김, 황금시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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