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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편지>표지
 <백년편지>표지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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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편지

지난 4월 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아래 임정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두툼한 <백년편지> 책 한 권을 받았다. 아마도 이 책 속에 내 글도 한 편 실렸기에 보내준 듯했다.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 회장은 책머리 헌사 '감사와 존경, 그리고 다짐의 백년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한민국의 뿌리는 독립운동입니다.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국민이 1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독립운동가에게 바치는 감사와 존경, 그리고 다짐의 편지입니다. 후인(後人)들은 <백년편지>를 주고받으며 독립정신을 되새깁니다. 선인들이 그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백년편지>는 임정기념사업회에서 기획한 사업의 하나인데 2010년 4월부터 시작해 2019년 4월까지 10년 동안 347통의 편지 중 100편의 편지를 엮은 책이다. 이 편지를 쓴 분들은 독립지사 후손 57명, 학자 55명, 학생 46명, 사회운동가 45명, 작가 29명, 언론인 24명, 교사 24명, 정치인 15명, 문화예술인 7명, 기업인 5명, 군인 4명, 기타 36명이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게 띄우는 편지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 책 서문 '독립운동사에 살을 붙이고 피가 통하게 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자는 백년편지를 빼놓지 않고 거의 읽은 셈인데, 어떤 때는 그 편지를 읽으며 가슴 뭉클할 때도 있었고 눈물을 흘렸던 때도 있었다. 무감각하게 역사책을 대했던 것과는 달리, 백년편지를 통해 공분뿐만 아니라 따뜻한 인간미도 느낄 수 있었다. 백년편지 독자들도 조국 독립을 위해  바람을 먹으면서 이슬잠을 잔 선조들의 삶에 한 걸음 다가가면서 그와 대조되는 삶을 살아간 이들에게 분노할 줄 아는 역사의식도 갖게 되었다. (중략)

아울러 백년편지라는 공간을 통해 그동안 뼈대만 세워져 있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살을 붙이고 피가 흐르게 하여 투쟁력 못지않게 인간미가 넘치도록 했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와 삶을 풍요하게 만든 주역들을 발굴해 백년편지의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그들의 삶과 정신에 더 다가가길 기대한다. 그 일은 바로 우리 민족공동체의 몫이다. 그분들의 삶은 각박한 오늘 우리 삶을 더 윤택하게 하면서, 나아가 어떤 민족의 독립운동이든 인류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임을 밝히는 계기도 되겠다. <백년편지>가 우리 민족의 숙원인 자주독립 ․ 민주통일의 공동체 수립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에 실린 100통의 귀한 편지 중 임의로 일부만 추려 소개한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 김정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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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들 김정륙이 띄운 편지

아버지 뵙고 싶습니다. 그 험난한 독립운동의 고행과 우리 가족의 비애를 소자는 알기에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6․25 때 신생 대한민국 건설에 꼭 필요한 수많은 인사가 서울에 갇혀 납북 당하자, 거짓 사기극을 연출한 소위 고위층에서는 비판여론을 되돌려 볼 요량으로 북으로 끌려간 인사들에게 이념의 덤터기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2006년 10월 1일, 성묘단이 당시 엄두도 낼 수 없는 북쪽 묘역 참배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임정기념사업회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묘역을 디딘 것도 잠시, 만나자 이별의 발걸음은 참으로 저희 남매를 서글프게 했습니다. 아버지! 아들 능이와 딸 길성이 따르는 술잔을 그때 받으셨습니까? (중략)

아버지, 지금 돌아가고 있는 세상은 불의가 정의를 밀어내는 난세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곧 반민특위 때 노덕술, 최운하, 최난수 등에 견줄 자들이 불쑥 나타나 세상을 난도질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조국을 무지막지하게 동강내고 있는 이 망나니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임시정부는 우리나라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사실이 없으므로 임시정부는 없는 것이고, 미군정이 대한민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으니, 건국의 모태는 미군정이라는 것입니다.

1950년 6월 28일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인공기가 높이 올라 펄럭이고 있는데도 도하 신문에는 의정부 탈환이라는 기사가 대서특필했고,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의 허풍에 맞추어 일국의 대통령이 육성방송으로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나 이승만을 믿으라'는 소리를 아버지와 소자가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잡혀간 것이 진실인데, 진실이 살아있는 당시에는 조사해서 감추어 놓고, 이제 와서 슬그머니 납북인사들을 '월북 좌파'로 이념 매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예로부터 하늘은 몹쓸 인간들에게 천형을 내려 경종을 울리는 것을 저희는 천둥번개를 통해 봐왔습니다. 그러잖아도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강국에 둘러싸여 슬픈 조국에 이들의 작태는 응징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아버지, 우리 세상에 이런 고약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해방 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다 못다해 생겨난 혼동인 만큼 하늘나라에 품의하시어, 이를 바로잡아 반민특위 위원장의 못다한 몫에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아래 생략)

2010년 7월 27일 소자 능 올림
  
 임시정부 주석 차리석 비서실장
 임시정부 주석 차리석 비서실장
ⓒ 차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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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동암 차리석 비서실장에게 띄우는 아들 차영조의 편지

아버님!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함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아버지이기 전에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킨 동암은 저에게 너무 큰 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 동암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목 메이게 부르는 저는 어느덧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보다 더 늙은 일흔여섯의 아들이 되어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중략)

아버지,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아들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힘들고 위태로운 길이었습니다. 백범이 흉탄에 서거한 뒤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어머니는 저를 지키기 위해 차(車) 씨에서 두 획을 지워 신(申) 씨로 바꿔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학업을 중단한 뒤에는 아이스케이크 장사, 여관 보이, 국밥집 배달원 등의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홀몸으로 저를 키우신 어머니는 1979년 66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동암 차리석의 아들 차영조 선생님.
 동암 차리석의 아들 차영조 선생님.
ⓒ 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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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에 어머니를 잃은 저는 한전 검침원으로 일하다가 중동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가서 건설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일제가 물러갔는데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에 울분이 쌓였던 것이 화가 병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법통인 임시정부를 훼손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곡하는 친일파 천지의 세상에 절망한 것입니다. (중략)

청렴과 강직으로 소임을 다한 음지의 독립운동가 동암의 아들로서 역사 정의의 바른 길을 걷겠습니다.

2019년 3월 21일 임정막내둥이 차영조 올림
 
 약산 김원봉(해방 후 모습)
 약산 김원봉(해방 후 모습)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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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군무부장에게 띄우는 아내 박차정의 편지

여보, 당신의 아내 차정입니다. 당신을 두고 먼저 떠난 지 어느덧 75년이 흘렀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참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필사적으로 대일항전을 모색하던 충칭. 자주독립은 독립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당신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이끌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쳤지요. 약산이 (광복군) 군무부장을 맡았다는 소식에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일전선을 염원하던 온 동포들은 기뻐했습니다.

쑨자화위안(孫家花園), 기억나세요? 민족혁명당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던 충칭 근교 창장(長江) 남쪽 강변 작은 마을, 그곳이 우리의 유일한 쉼터였습니다. 당신은 사십대 중반, 저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고요. 우리가 부부로 된 게 1931년 맞지요? 단란하고 화사한 부부생활은 바라지 않았어요. 함께 싸운 게 우리 두 사람이 누린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제 볼을 어루만지며 단잠에 빠지던 당신이 생각나요. (중략)

당신은 진정한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의열단 의백(義伯) 약산 김원봉, 일제는 전전긍긍, 제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 원이 넘는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친일파들은 당신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요. 당신은 동포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저 역시 의열단에 가입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항일의 의지를 키웠으니까요. (중략)

광복군이 왜놈들에게 결전의 총탄을 퍼붓기도 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갑오농민전쟁 이래, 의병과 독립군,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조선의용대와 동북항일연군의 수십 수백만의 피를 쏟고서도, 우리는 참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원통하고 비참한 역사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까.

제 유골을 품에 안고, 당신은 고향 밀양 땅을 밟았습니다. 감격과 환대는 열렬했습니다. 경남 각지에서 20만이 넘는 인파가 오셨지요. 고향사람들은 밀양역에서 밀양초등학교 운동장까지 당신이 걸을 길을 가마니로 덮고도 성에 안 찼는지, 교문에서 연단까지는 광목으로 깔았어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영웅을 맞이하는 '레드카펫'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했어요. 한반도의 정세는 살얼음판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위험했어요. 냉전의 사슬은 한반도를 칭칭 동여매고, 38선이 삼천리강산의 허리를 분질렀습니다. 참전국의 지위를 쟁취하지 못한 대가가 이토록 클 줄이야… 거꾸로, 친일파에게는 분단과 미군을 업고 죽기 살기로 독립운동가들을 죽이려 들었으니까요.
 
 상하이임시정부 초창기 청사
 상하이임시정부 초창기 청사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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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당신을 해방된 조국에서 왜놈의 개 노릇을 하던 노덕술 따위가 고문하다니! 치가 떨렸어요. 여운형 선생이 비명에 가시자, 당신도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피눈물을 뿌리면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중략)

여보, 어디 계셔요?
아직도 눈을 못 감고 계시나요?
제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어주세요.
남은 짐과 해원(解寃, 원통한 마음을 품)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맡기고,
여보, 우리 용서하기로 해요.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아내 차정 올림
(* 참고: 박차정 지사는 1944년에 돌아가셨기에 이 편지는 작가이며 언론인인 박미경씨가 대필한 것입니다.)

백년편지 - 1919~2019

이만열 외 99인 지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엮음, 삼우반(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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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