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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엄마가 화장하고 외출하는 일은 내가 화장하지 않고 출근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어느 날, 친척 돌잔치가 있어 엄마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다. 머리를 감고 화장대 앞에 앉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안방에 들어가 보니 엄마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화장대는 있지만 화장품은 없는 엄마. 화장대 위에는 스킨과 로션, 흰머리 염색약과 염색약을 사며 받아온 샘플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내가 언제 사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파운데이션 하나가 기초 화장품을 제외한 유일한 색조 화장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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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스킨과 로션을 바른 엄마는 다음 단계 화장품을 고르지 못한 채 거울만 멀뚱히 쳐다봤다. 화장대를 잠시 둘러보던 엄마는 주름진 무딘 손으로 파운데이션을 천천히, 서투르게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딸내미를 부른다.

"희정아! 이리 와봐라."
"응, 엄마. 왜?"
"... 이제 뭐 발라야 되냐."
 

엄마는 고를 화장품도 없는 텅 빈 화장대 앞에서 망설였다. 뭘 발라야 할까가 아니라 뭘 바를 화장품이 없었다. 나도 한참을 망설이다 내 가방에 있던 빨간 립스틱 하나를 꺼내왔다.

"엄마! 내 립스틱 발라줄게!"
 

딸내미 앞에서 어린애처럼 입술을 쭉 내민 엄마는 그렇게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엄마의 입술에 나의 빨간 립스틱을 발라드렸다.

"됐냐? 괜찮냐?"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푸석푸석한 피부, 주름과 기미가 가득한 엄마의 얼굴은 더 이상 파운데이션으로도 가려지지 않았고 빨간 립스틱으로도 살아나지 않았다. 눈, 코, 입보다 시간의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 일흔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엄마의 고된 삶이 얼굴에 생채기 같은 흔적을 남겼다. 보고 있자니 울컥 회한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엄마의 얼굴을 코 앞에서 바라보는 일은 순식간에 가련해지는 일이었다.

나는 그 감정들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응! 우리 엄마 화장하니까 너무 예쁘다!"

그 말 한마디에 환하게 웃어 보이며 비로소 엄마는 오랜만에 여자가 된 듯했다.

"엄마! 평소에도 립스틱도 좀 바르고 화장도 좀 해! 하니까 너무 예쁘잖아!"

나는 평소 목소리보다 두 톤 올려, 일부러 반복해서, 예쁘다는 말로 엄마의 얼굴을 위로했다. 엄마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우리 엄마의 화장은 딸의 빨간 립스틱과 예쁘다는 소리에 피어난 환한 미소로 완성됐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신고 외출하셨다.

엄마의 화장대는 엄마를 닮았다

엄마가 나간 후 엄마의 화장대를 찬찬히 바라본다. 색조 화장품 하나 없는 엄마의 화장대. 무채색인 엄마의 나날들이 허전한 화장대를 닮았다.

오늘은 집에 오는 길에 빨간 립스틱도 하나 사고, 알록달록 반짝이가 들어간 아이섀도도 색깔별로 사고, 주름 개선 기능이 있는 크림도 하나 사와야겠다. 이제라도 엄마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가리고 여자가 될 수 있도록 화장대 위에 놔드려야겠다.

나는 매일 아침 더 이상 놓을 자리도 없는 화장품 가득한 화장대 앞에서 아이크림까지 챙겨 바르며 열심히 얼굴에 화장하는데, 엄마의 텅 빈 화장대를 채워드릴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내 얼굴이 칠해지는 만큼 엄마의 얼굴이 바래는 줄 왜 몰랐을까. 딸이 성숙하는 만큼 엄마는 늙어간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엄마의 삶을 진즉에 알록달록 칠해 드렸어야 했는데. 많이 늦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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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 삶의 면역력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