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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서부전선방어부대 화력타격훈련... 김정은 지도 북한이 지난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조선인민군 전연(전방) 및 서부전선방어부대들의 화력타격훈련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훈련에는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추정되는 발사체 외에 240mm 방사포와 신형 자주포로 보이는 무기도 동원됐다.
▲ 북한, 서부전선방어부대 화력타격훈련... 김정은 지도 북한이 지난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조선인민군 전연(전방) 및 서부전선방어부대들의 화력타격훈련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훈련에는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추정되는 발사체 외에 240mm 방사포와 신형 자주포로 보이는 무기도 동원됐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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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정치화'일까 '소통의 씨앗'일까.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의 식량안보분과 보고서'를 통해 북의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의견을 낸 지 보름여가 지났다.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을 두고 여론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통일부는 지난 8일 대북 식량지원을 공식적으로 추진한다고 했지만 진전된 건 없는 상태다. 통일부는 북측의 발사체 실험으로 인한 국민 정서를 고려한 듯 대북 민간단체‧종교계 등을 만나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대북 식량지원은 꾸준히 정치적 조건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남과 북, 체제 경쟁에 따른 자신감을 과시했던 1980년대, 인도주의․동포애에 입각한 대북 포용정책의 2000년대를 거쳐 2009년 북의 인공위성 로켓 발사, 핵실험 등으로 식량지원의 냉각기를 갖기도 했다.

지난 20여년, 대북 식량지원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과거 대북 식량지원, 굴곡의 과정을 짚어봤다.

첫 쌀지원, 북->남
 
모내기 나선 북한 농민들 북한 평원군 원화리 농장에서 올해 첫 모내기가 시작됐다고 조선중앙TV가 11일 보도했다. 사진은 중앙TV가 공개한 원화농장 모내기 모습.
▲ 모내기 나선 북한 농민들 북한 평원군 원화리 농장에서 올해 첫 모내기가 시작됐다고 조선중앙TV가 11일 보도했다. 사진은 중앙TV가 공개한 원화농장 모내기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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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에서 쌀을 처음 받은 건 북이 아니라 남측이다. 1984년 남측 중부지방의 홍수피해가 심각하자 북은 쌀 7200톤을 보냈다. 당시는 남북이 체제 경쟁을 하며 '누가 더 잘 사는지' 선전에 열을 올리던 때다.

이후 1995년 여름, 북한은 대홍수로 식량난이 극심해져 대규모 기아사태가 발생했다. 김영삼 정부는 대북 쌀 지원을 위한 남북회담을 추진했다. 이 회담에서 남측은 쌀 15만톤을 북측에 무상 지원한다고 합의했다.

합의까지는 순조로웠지만, 쌀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쌀을 싣고 북의 청진항에 들어간 남측의 씨아펙스호에 북이 인공기를 강제로 게양하도록 한 것. 이후 쌀을 싣고 간 남측 삼선비너스호의 선원이 몰래 북을 촬영하다 발각돼 배와 선원이 억류된 사건도 있었다.

각각 북측의 사과와 남측의 사과로 일은 마무리 됐지만,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김영삼 정부 차원의 직접적인 대북지원은 중단됐다.

민간단체에 의한 대북 인도지원은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1980년대 후반 쌀 풍년이 이어지고 남은 쌀을 어떻게 처리할지 문제가 되자 '남아도는 쌀을 북에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과 <한국일보>는 '사랑의 쌀' 캠페인으로 성금을 모았다. 이 성금으로 1990년 7월 쌀 1만 가마가 북으로 갔다. 민간단체의 첫 대북 인도적 지원이었다.

1997년부터는 종교단체, 구호단체, 일반 시민단체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해 대북 식량지원을 했다. 이들 단체들은 대한적십자사를 창구로 삼거나 자체적인 전달 창구를 통해 북한에 식량 등 구호물품을 제공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대북지원 집중
 
 지난 2008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는 이명박 대통령 뒤로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 2008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는 이명박 대통령 뒤로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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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남북관계 개선과 대북 지원의 폭을 한층 넓혔다. 정부의 직접 지원은 지금까지 총 1조9990억여 원에 달하는데, 특히 대북 포용정책을 펼쳤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인 1999년~2007년에 집중됐다.

정부는 2000년 6‧15 공동선언 합의에 따른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전후해 정부 차원의 대규모 비료와 식량을 지원했다. 2000년대부터는 차관방식(10년 거치, 20년 상환, 이자율 연 1%)으로 대북 식량지원을 시작했다.

2001년 미국 부시행정부가 등장하며 북미는 대립을 거듭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북미 관계의 부침과 상관없이 매년 북에 식량, 비료를 지원했다.

2002년과 2003년에는 각각 국내산 쌀 40만 톤을 북에 제공했다. 2003년에 등장한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을 계승했다. 정부는 2004년에 쌀 40만 톤(국내산 10만 톤, 외국산 30만 톤), 2005년에는 쌀 50만 톤(국내산 40만 톤 외국산 10만 톤)을 북에 지원했다.

대북 식량 지원을 주춤거리게 한 건 북핵문제였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을 하자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다. 대북지원이 북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오히려 북의 핵무장만 강화했다는 여론이 생겼다. 남측에서도 대북지원에 대한 갈등이 상당했고, 정부 역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북핵', 대북 식량지원의 장벽

결국 2006년에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으로 인한 국민 정서와 남북관계 상황 등을 고려하여 차관방식의 식량지원은 일시 중단했다. 북한 수해에 대한 긴급 구호지원 성격으로 국내산 쌀 10만 톤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2007년에는 다시 쌀 40만 톤(국내산 15만 톤, 외국산 25만 톤)을 역시 같은 차관방식으로 북한에 지원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정부 차원의 대북 원조는 끊겼다. 2010년 국내 쌀 5000톤을 지원하는 게 마지막이었다. 천안함 피격 사건과 핵, 미사일 실험에 따른 유엔 대북제재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 정부가 대북 식량지원을 결정하면, 직접지원일 경우 8년여 만이다. 국제기구를 통한 정부의 인도적 지원은 2016년 1억 원을 집행한 이후 약 3년 만이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2017년 9월 유니세프와 WFP의 북한 모자보건·영양지원 사업에 남북협력기금에서 800만 달러를 공여하기로 의결했지만, 집행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대북지원의 전개과정 및 주요 지형의 변화 (2012. KDI 북한경제리뷰, 이종무), NGO의 대북 지원 현황과 발전 방안(2003, 김형석),통일부 '북한정보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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