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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산 아랫동네 모습(사진 위는 구암병원과 영명학교)
 구암산 아랫동네 모습(사진 위는 구암병원과 영명학교)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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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전북 군산 지역 주민들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전시회가 군산시 장미동 군산근대역사박물관 3층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기간은 5월 18일~6월 2일까지. 행사를 주최한 (사)전킨기념사업회 전병호 이사장은 "전시된 사진은 모두 40여 점으로 군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전킨 선교사가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전킨 선교사는 1893년 전라도 지역을 처음 답사하고 1895년 가을 드루 의료선교사와 함께 군산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수많은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한 그는 1907년 폐렴으로 몸져눕게 되고 이듬해(1908) 1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따라서 사진 속 풍경은 112년~125년 전 군산 모습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전병호 이사장이 사진을 보내준 프레스톤(전킨 손자) 선교사 부부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전병호 이사장이 사진을 보내준 프레스톤(전킨 손자) 선교사 부부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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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사장은 한 부부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두 사람이 사진을 보내준 '프레스톤' 선교사 부부입니다. 프레스톤은 전킨 선교사 손자인데, 제가 쓴 책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를 읽고 감동해서 전킨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보내줬다고 그래요. 두 사람 뒤로 한국식 장롱이랑 족자랑 보이죠. 프레스톤도 할아버지를 따라 한국을 무척 사랑한다고 합니다."

전시 사진 중 충남 장항을 배경으로 찍은 군산 지역 주민들 모습을 비롯해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행해지던 수상장(樹上葬), 호남 최초 서양의료기관으로 알려지는 군산 구암병원(궁멀병원)과 영명학교, 만자산교회 남녀 신도 단체사진, 구암산에서 바라본 죽성포구(째보선창) 치료 후 감사 표시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달걀 꾸러미 사진 등이 눈길을 끈다.

구암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1919년 3월 군산영명학교 졸업반이던 동생(양기철)과 함께 삼일만세운동에 앞장서 참여했다가 두 형제가 나란히 옥고를 치른 양기준(군산 최초 야구인) 선생 가족사진, 고즈넉한 농촌풍경(구암산 아랫마을), 마을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사진은 한동안 발길을 멈추게 했다.

120년 전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120여 년 전 군산 주민들 모습
 120여 년 전 군산 주민들 모습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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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금강과 충남 장항이 카메라에 잡힌 것으로 미뤄 수덕산 아래 해변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지게에 똥장군과 함지박을 짊어진 두 노인과 팔짱을 낀 채 상대방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청년, 저고리 차림에 가죽가방을 들고 있는 젊은이 등 모두 신도로 보인다. 특히 그들의 자연스러운 표정이 조용한 어촌마을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무척 평온하게 느껴진다.
 
 서해안 도서 지방에서 행해졌던 ‘수상장’ 모습. 나뭇가지 중간에 시신을 싼 가마니가 보인다.
 서해안 도서 지방에서 행해졌던 ‘수상장’ 모습. 나뭇가지 중간에 시신을 싼 가마니가 보인다.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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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처음 보는 '수상장' 모습이다. 수상장 사진은 가까이서 찍은 것과 멀리서 찍은 두 장이 있는데 이 사진은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전병호 이사장은 "전킨 선교사는 배를 이용해 금강, 만경강, 고군산군도 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산 높이와 나무가 우거진 것 등으로 미뤄 고군산 어느 섬에서 찍지 않았나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저도 이러한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 참 신기했어요. 시체를 굵은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는 장례를 '수상장' 혹은 '수장'이라고 합니다. 주로 시체를 가마니로 싸거나 관이나 항아리에 넣어 나무에 올린다고 합니다. 섬에서 어린아이가 죽으면 '수상장'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특히 선유도는 일종의 '풍장'으로, '세골장'인 '초분' 풍습이 최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빨래터 모습
 마을 빨래터 모습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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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사진은 구암동 둔덕천 입구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둔덕천은 군산에서 유일한 자연 하천으로 입구 부근에는 빨래하기 좋은 널찍한 바위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공동 빨래터였던 것.

부잣집 대청마루처럼 널찍한 바위에 질펀히 널려놓은 뽀얀 무명치마와 저고리들, 광주리에 담긴 빨랫감 뭉치, 한가롭게 소꿉장난하는 아이들, 빨래 헹구기에 여념이 없는 아낙들 모습 등이 옛 향수를 자극하면서 '화난 며느리 빨래 두들기듯 한다'는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우수 경칩이 지나고 얼었던 시냇물이 풀리면 동네 빨래터는 분주해졌다. 아낙들이 가슴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내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 아들 자랑, 딸 자랑, 며느리 자랑, 사위 자랑을 비롯해 바람피우는 남편 때문에 속상했다는 얘기 등이 격의 없이 오갔던 빨래터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양기준 선생 가족사진
 양기준 선생 가족사진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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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준 선생 가족사진이다. <군산 야구 100년사>(2014)에 따르면 양기준은 1896년 군산구암교회 초대 장로인 양응칠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명학교 야구부 선두타자로 활약했다.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이리(익산) 삼산의원에서 조수로 근무하였고, 1932년 한지의사(限地醫師) 면허를 취득, 무의촌 지역 공의로 전염병 예방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전북 익산시 보건소장, 경기도 강화군, 연평도 진료보건소장 등을 지냈다.
 
 메리 레이번 여선교사와 초창기 군산 주일학교 학생들
 메리 레이번 여선교사와 초창기 군산 주일학교 학생들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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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레이번 선교사(전킨 선교사 부인)와 군산 주일학교 여학생반 사진이다. 레이번 선교사는 지금의 군산영광여고(멜볼딘여학교 후신)와 인연이 깊다. 멜볼딘여학교 수업을 그의 안방에서 처음 시작한 것. 그는 학교를 설립하고 조사(助事)인 김씨 부인과 함께 마을을 찾아다니며 학생을 모집했는데, 그 속에는 양갓집 규수, 여종, 30대 부녀자 등이 뒤섞여 있었다고 한다.

레이번 선교사는 건강이 악화된 남편을 따라 전주로 이주한다. 그 후임으로 온 엘비 선교사(부위렴 선교사 부인)가 자신의 모교인 미국 메리볼딘대학에 지원을 호소하였고, 그곳 대학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모금 운동에 나섰다. 미국 여대생들이 끼니를 거르거나 빵장수를 해서 보내준 기금을 토대로 3층 교사를 신축할 수 있었다. 그 후 메리볼딘대학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고마움을 기리는 뜻에서 '군산멜볼딘여학교'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대야 만자산교회 남신도 단체사진(1904년 촬영)
 대야 만자산교회 남신도 단체사진(1904년 촬영)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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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야 만자산교회 여신도 단체사진(1904년 촬영)
 대야 만자산교회 여신도 단체사진(1904년 촬영)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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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찍은 대야 만자산교회(지경교회 전신) 남녀 신도 단체 사진이다. 남신도 사진에서 전킨 선교사와 가마꾼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시대를 반영한다. 사진 속 인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들의 옷차림과 표정은 물론 신발에서조차 궁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구한말 군산 지역 농촌이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옹색하거나 가난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 사진은 양국주 선교사가 제공한 사진이에요.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아무튼 숨겨진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여신도 단체 사진 맨 왼쪽 엄마 품에 안겨있는 꼬마가 '이순길'이라고, 훗날 훌륭한 선생이 됩니다. 공부를 잘해서 전주 기전여학교 선생님이 되는데 그 밑에서 공부한 여학생이 상공부장관과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낸 '임영신'이에요.

이순길 이야기는 제가 쓴 책에도 소개됩니다. 젖먹이 때 눈이 아팠는데 어머니가 30리 떨어진 군산 드루 의료선교사에게 데리고 가 치료받고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후 부모의 믿음 안에서 잘 자라 군산 멜볼딘여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기전여학교 선생이 되죠. 그때 이순길이 임영신을 충남 천안의 모 학교(良垈學校) 교사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사진 외에도 미국 필라델피아 역사관에 보관 중인 조선선교부 지도를 비롯해 최초로 호남 땅을 밟은 7인의 선교사(레이놀즈, 펫시 볼링, 전킨, 매리 레이번, 테이트, 매티, 리니 데이비스), 초창기 군산 지역 교인들, 전킨 선교사와 자녀들 묘(구암동산), 전킨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기 전 다녔던 신학교 및 대학교 사진 등도 전시되고 있다.

조선과 군산을 사랑했던 전킨 선교사
 
 전킨 선교사 집 사랑방에 모인 교인들. 창문의 커튼, 자명종, 서구식 의자, 테이블, 난로, 벽에 걸린 액자 등 가재도구와 실내 장식이 이채롭다.
 전킨 선교사 집 사랑방에 모인 교인들. 창문의 커튼, 자명종, 서구식 의자, 테이블, 난로, 벽에 걸린 액자 등 가재도구와 실내 장식이 이채롭다.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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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1865~1908) 선교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출신이다. 유니언 대학을 졸업하고, 언더우드 선교사 귀국보고회 때 감동하여 아름다운 나라 조선 선교를 꿈꾸게 된다. 1892년 11월 미국 남장로회 '7인의 선교사(7인의 선발대)' 일원으로 조선 땅을 처음 밟는다. 서울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한다. 1895년 3월 드루 의료선교사와 함께 군산 수덕산 기슭에 초가 두 채를 매입하여 의료선교 활동을 펼친다.

군산이 개항하는 해(1899) 12월 지금의 구암동산에 선교스테이션을 세운다. 병원, 학교, 교회 설립 등 선교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아들 셋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1904년 몸져눕게 되고 전주에서 휴양하라는 선교본부 결정에 따라 군산을 떠난다. 전주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1908년 1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이렇게 되뇌였다고 한다.

"저를 궁멀(구암동)에 묻어주세요. 저는 '궁멀 전씨 전위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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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