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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3년이나 된 일이지만, 내겐 여전히 선명하다. 당시 나는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 된 새내기였다. 우리 과는 전라도로 답사를 다녀오는 길이었고, 그 시각 서울에서는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 및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대학생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버스가 점점 서울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과 학생회장 선배가 "시위에 참여했던 연대생 노수석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원래는 학교에서 해산한 후 집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우리는 일정을 바꿨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생회 깃발을 챙겨들고 곧장 시위현장에 합류했다. 나의 첫 집회 경험이었다.

그날 경험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한 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뭉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압경찰들과 맞닥뜨렸을 때 서로를 향해 내뿜던 증오는 사람과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가 외쳤던 '정의로운 사회'란 분명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일 텐데 시위 현장에서는 그 누구의 인권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거리의 모습은 참혹했다. 시위대가 지나간 거리는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고, 평소 활기를 띠던 노점상들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날 노점의 상인들은 생계를 위한 벌이를 포기했음을 분명했다.

당시 나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생명을 기리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집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거리의 노점상들은 집회 때문에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다. 인권을 위해 또 다른 인권이 희생되는 아이러니에 나는 혼란스러웠고 더 이상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권 vs 공리주의

그 후로도 인권과 인권의 충돌은 종종 목격됐다. 장애인들의 학교설립 문제에서, 난민수용의 문제에서, 미투와 여성혐오 그리고 남성혐오의 문제 등에서 끊임없이 인권과 인권은 충돌했다.

누구도 토 달지 않는 궁극의 가치인 인권이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런 의문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되살아나곤 했다. 그런 내게 성균관대 사회학과 구정우 교수가 쓴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는 제목부터 가슴을 뛰게 했다.

저자는 인권의 충돌은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벤담 이후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공리주의'가 대립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집약되는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인권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을 이 두 가치의 충돌로 해석한다.

지난해 부각됐던 난민문제는 난민 개개인의 인권과 다수인 국민들의 안전과 경제적 이익이 충돌한 경우였다.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설립을 둘러싼 논쟁에선 장애인들의 인권과 지역주민들의 행복이 대립된다. 또한, 제소자들의 인권은 흉악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보다 안전해지기를 바라는 국민 다수의 행복권과 곧잘 충돌하곤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체복무 문제 역시 병역의 의무를 진 대다수의 국민들의 형평성을 고려하는 것이 핵심 이슈다.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 구정우 지음, 북스톤(2019)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 구정우 지음, 북스톤(2019)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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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감수성'이란

저자는 인권과 인권이 충돌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인권감수성'이라고 강조한다. 인권감수성이란 '인권의 원리를 중심으로 생각과 태도, 말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 '왜 인권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토론을 요청하는 이성적 활동이지만, 동시에 적절한 감성적 반응을 요구하는 복합적 개념(p35)'이다.

'남의 처지와 아픔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고 감정이입하는 능력(p38)'인 '공감'은 인권감수성의 필수요소다. 저자는 공감할 수 있을 때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난민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장애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인권감수성은 정서적 개념인 '공감' 능력 하나로만 완성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기에 이성과 의지적 태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인권 감수성은 오히려 자신의 윤리적, 지적 판단이 오류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판단근거를 점검하고 오류 가능성을 성찰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p40)

책에 소개된 '양심적 병역거부자'(지난 1월 국방부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표현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체복무'로 용어를 통일해 사용하고자 한다고 밝혔으나 본 글에서는 책에 나온 표기를 따른다 - 편집자말) 정춘국씨의 말은 '인권감수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20대를 몽땅 교도소에서 보낸 정씨는 2018년 6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복무를 마련하라는 헌재의 판결 이후, 한 변호사로부터 재심 권유를 받는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답한다.
 
 "변호사님, 서산에 해가 집니다. 제게 제가 갈 길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처럼 그분들도 조국에 대한 열정이 있었겠지요. 사회를 지켜야 하는데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거부하면  '안되게 만들어!'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도 이해 못할 건 아니잖아요." (p120)

'나를 해코지한 상대에게까지 공감할 수 있는 것, 상대의 입장에서 그가 한 행동의 맥락을 찾아보는 것(p120)'이 결국 인권감수성인 것이다.

인권감수성을 키우려면

그렇다면 인권감수성을 어떻게 하면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공감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그가 한 행동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게 될까. 저자는 인권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것'이 먼저임을 이야기한다.

난민문제에 대해서 그는 "주변에 살아가고 있는 난민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정작 살펴보지(p72)"도 못하면서 여러 가지 논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던진다. 또한, 평소 교도소 수감자들의 인권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쇼생크탈출>이나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영화를 보면 수감자들에게 공감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 역시 그는 "신뢰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이 커밍아웃을 할 때 더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다"며 "믿고 따르는 사람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될 때 부정적인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한결 커진다(p168)"고 강조한다. 즉, 더 많이 알수록, 가까이서 관찰하고 관심을 갖게 될수록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생각을 점검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이 거의 모든 악의 치료약을 찾아냈긴 했지만, 그중 최악에 대한 약은 찾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무관심이다 (헬렌 켈러, p203)'
  
저자가 책 속에 인용한 헬렌 켈러의 이 말은 어쩌면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핵심원리인지도 모르겠다. 무관심을 거두고 주변의 이웃과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알아나갈 때, 공감할 수 있으며 타인이 처한 맥락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권감수성으로 연결될 것이다.

인권감수성이 발휘될 때

지난 2016년에 나는 내 생애 두 번째 집회에 참가했다.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외쳤던 그 촛불집회는 23년 전 기억과는 너무나 달랐다. 집회참가자들은 거리의 상점과 행인들을 배려했고, 집회 후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되가져가 시민들의 불편을 줄였다.

시민들은 집회참가자들에게 응원을 보냈고, 거리의 상점에선 집회참가들에게 음료수를 나눠주기까지 했다. 경찰의 저지선은 안전선처럼 느껴졌고, 참가자들은 그 선을 존중했다. 23년 전 집회현장에서 충돌했던 시위대와 경찰, 거리 상인의 인권이 촛불집회에선 다함께 지켜지고 있었다.
 
 '개별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인권의 권리가 반영되고 또 사람들이 이를 내면화하는가가 중요합니다' (p39)

2016년의 촛불행진이 더 감동적이었던 건, 저자가 책의 첫 장에 적었던 이 말처럼 인권감수성이 현장에서 발휘되었기 때문아니었을까. 인권감수성이 개개인의 일상에서 실천된다면, 저자의 표현처럼 '웃으며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 일단 이 책부터 읽어보자.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매우 잘 정리해 놓은 이 책을 통해 이웃과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인권감수성을 가꿔가는 첫 걸음 일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 - ‘나는 괜찮다’고 여겼던 당신을 위한 인권사회학

구정우 지음, 북스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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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