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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희망의 등불', '국난극복의 구세주'로 칭송한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희망의 등불", "국난극복의 구세주"로 칭송한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
ⓒ 안동MBC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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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칭해 온 경북 안동시가 뉴스의 한가운데로 불려 나왔다. 지난 13일, 지역 유림이 안동을 방문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구세주", "백 년에 한 번 나올 사람"이라고 추켜세운 일 때문이다. 

'유림(儒林)'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이런 호칭은 얼른 실체가 드러나는 낱말이 아니다. 사전이 풀이하는바,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사림"(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뜻을 새기는 게 만만찮은 일이 아닌 까닭이다. 

전근대에야 학문이라면 성리학 일색이었으니 '글줄이나 읽은 사람'은 모두가 유림의 일원이었겠다. 그러나 만인이 근대교육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하는 오늘날에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를 특정하고 이를 가리켜 '유림'이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구설의 주역은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과 박원갑 경북향교재단 이사장이다. 알다시피 황교안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국정농단'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책임을 지는 대신 자유한국당의 새 대표가 되어 현 정부를 무차별 공격하면서 차기 대선의 유력한 보수 후보로 떠올랐다. 

구설에 오른 두 사람이 황 대표를 구세주로 여기든 말든 그것은 물론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다. 단, 그들이 유림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지 않은 자연인이라면 말이다.

서애의 후예 손팻말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
 
 안동 유림의 황교안 칭송에 분노한 서애의 후예가 일인시위에 나섰다.
 안동 유림의 황교안 칭송에 분노한 서애의 후예가 일인시위에 나섰다.
ⓒ MBC뉴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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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잔뜩 뿔난 시민들은 시내에 "안동 선비 어데 가고~ 아첨쟁이 넘쳐나노~" 펼침막을 달아 이들을 비판했고, 안동 하회마을 출신 풍산 류씨 서애파 14대손이라는 이는 시내 한복판에서 일인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이 서애의 후예가 든 손팻말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관련기사 : "안동선비 어데가고 아첨쟁이 넘쳐나노" 안동에 유림 비판 현수막)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이는 의성김씨 청계(靑溪) 김진(1500~1580)이 다섯 아들을 훈계하며 남긴 말이다. 그 다섯 아들 가운데 넷째가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이다. 그런데 황교안 대표를 구세주로 칭송한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은 학봉의 종손이다. 이웃으로부터 자기 조상의 말씀으로 경계를 받은 셈이니 치욕이라면 치욕이다. 

 
 의성김씨 종택. 청계 김진은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쳤다.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모두 36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았다.
 의성김씨 종택. 청계 김진은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쳤다.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모두 36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았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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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청계나 학봉을 불러오지 않더라도 김종길 원장의 '구세주' 발언은 과한 정도를 넘었다. 박원갑 이사장의 '백 년 인물론' 역시, 그러잖아도 '혁신 유림'의 본고장인 안동이 언제부터인가 고루한 보수의 본향이 되어버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분통을 터뜨리기에 족하다. 

안동은 퇴계 이황을 낳은 고장이다. 퇴계의 이름자가 가진 무게는 안동의 여러 명문거족의 그것을 합해 놓은 것보다 더 무겁고 크다. 안동을 특징지은 것은, 퇴계의 학맥이 이어지면서 뿌리내린 퇴계학의 정신이었다. 

오늘날에는 다분히 퇴색하였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퇴계 유학의 근본이 살아 있던 시기에 유학은 참된 인(仁)과 의(義)를 소중히 생각하는 가장 '민본적'이고 '민주적'인 사상"이었다. (안동MBC 특집 '혁신 유림')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안동 출신의 유학자들이 의병과 계몽, 독립운동에 대거 나선 것은 그들이 품은 유교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기치로 내건 의병운동이 애국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안동의 전통·보수 유림은 근왕(勤王) 주의를 넘어 '민본'에 바탕을 둔 이상적 유학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1907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설립된 영남지역 최초의 3년제 중등 교육기관 '협동학교'는 안동의 보수 유림이 혁신 유림으로 전환하는 극적 상황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협동학교는 초기에 보수 유림의 반발과 문중 원로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4)이 태도를 바꿔 적극적 후원자가 되면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예순다섯의 노인이었지만 <대한협회보>를 구독하면서 근대를 각성한 백하가 전폭 지원하면서 협동학교는 안동지방의 애국계몽 운동의 기점이면서 경술년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 되었다. 
 
 백하구려. 백하 김대락은 예순다섯에 근대의 세례를 받고 혁신유림으로 거듭나 협동학교 설립을 적극 도왔다.
 백하구려. 백하 김대락은 예순다섯에 근대의 세례를 받고 혁신유림으로 거듭나 협동학교 설립을 적극 도왔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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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부와 스승으로부터 의절과 파문을 감수해야 했던 설립자 동산(東山) 유인식(1865~1928)을 비롯하여 석주 이상룡(1858~1932), 일송 김동삼(1878~1937) 등이 그들이다. 협동학교는 일제에 의한 탄압은 물론이고, 지역 유림의 배척을 받았고, 급기야 예천지역 의병의 습격으로 세 사람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관련 기사 : "나라 없는 몸…무덤은 남겨 무엇하겠느냐")

항일 독립투쟁 전선에 선 '혁신 유림'

이 과정에서 이들은 보수를 넘어 혁신으로 담대히 나아갔고,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경술국치(1910)로 나라를 잃게 되지, 이들은 식민통치에 협조해 기득권을 보전하는 길이 아니라 '의(義)'의 실천으로서 '항일의 길'을 선택했다. '혁신 유림'이라 불리는 이들은 사상과 방법은 달리했지만, 항일 독립투쟁의 전선에 서게 된 것이다. 

일찌감치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며 독립지사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한 석주 이상룡(1858~1932), 김동삼, 김대락, 유인식 등을 비롯하여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 항일 활동을 벌이며 농민·노동운동을 펼친 권오설(1899~1930), 이준태(1892~?), 김남수(1899~1945), 의열투쟁에 투신한 김지섭(1885~1928)과 김시현(1883~1966) 등이 그들이었다.

안동이 낳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50여 명으로, 400여 명의 서울에 이어 전국 두 번째다. 평균 40∼50여 명에 불과한 다른 시군에 견줘 안동이 압도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혁신 유림뿐 아니라, 안동의 선비들은 보수적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자정(自靖) 순국(殉國)'하여 왕토에 사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다한 예순여섯 분 가운데 무려 열 분에 이른다. 그중 여섯 분은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관련 기사 : 장엄하여라, 우국(憂國)의 황혼이여)

이른바 안동 유림을 대표한다는 두 사람이 '구세주'로, '백 년 인물'로 칭송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평생을 공안검사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5개월간 국정을 대리했다. 그가 국정농단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구설에 오른 두 사람은 '의례적인 환영 인사'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가 궤멸해 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줄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극복을 해결해 줄 '구세주'…", "건국 100년, 3·1절 100년 만에 나타난 것이 황교안 대표"라는 노골적인 칭송을 '의례적'이라고 보아줄 사람은 없어 보인다. 

황교안 대표를 '우리의 희망의 등불'로도, '건국과 삼일절 100년 만의 인물'로 여길 수 없다는 안동 사람들이 '안동 사람들과 안동 유림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항변하는 이유다. 더구나 이들은 유교의 종단 지도자로서 정치적 중립 측면에서도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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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 이상룡(1858~1932).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석주 이상룡(1858~1932).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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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이 선택한 길을 떠올리는 이유


안동 유림을 대표했다는 두 사람의 모습 위로 떠오르는 이는 서른여덟에 책을 덮고 의병 활동을 시작한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이다. 그는 류인식, 김동삼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웠고, 나라를 잃자, 1911년 쉰셋의 나이로 인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4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 독판(督辦)으로 취임하고 부설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1925년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개정헌법에 따라 석주는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에 선출되었다. 이후 남북 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다 1932년 75세를 일기로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석주와 함께 우당 이회영(1867~1932)이 전 재산을 팔아 만든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석주는 현재 화폐 가치로 무려 6백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마련해 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화신으로 불리는 우당에 비겨진다. 

우당은 남의 노비에게 높임말을 쓰는가 하면, 집안 노비들을 모두 해방하고 임금을 주는 현대적 고용 관계를 체결했다. 석주 역시 망명에 앞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집안의 종들을 해방했는데 이는 안동의 반가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우당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청상과부가 된 누이를 재가시키는 등 인습을 거부했다. 석주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서간도 망명을 감행한다. 사당에 나아가 망명의 사유를 아뢴 석주는 친척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그 신주를 땅에 묻고 길을 떠났다. (관련 기사 : "공맹은 나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

근대로 옮겨가는 전환의 시대에 나라를 잃고 망명을 떠나면서 석주는 선비였지만,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 박제된 유교의 전례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열린 눈과 마음이 삼십몇 년 뒤에 나라를 되찾게 한 힘이 되었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아우와 조카, 아들과 손자, 손부 등 모두 8명(당숙 포함 9명)이 그가 간 길을 따라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안동 유림 발 뉴스를 들으며 석주를, 그의 시대에 선비 석주 이상룡이 선택해 떠난 길을 생각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나 뒷사람들은 선인들이 담대히 걸어간 혁신의 길을 잃고 구태의연한 보수로 되돌아가고 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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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기사 포함, 모두 1천여 편의 글을 썼다. 2019년 5월,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에 연재한 '친일문학 이야기'를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으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