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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간편하게 혈액검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정맥에서 채혈하는 방식이 아니라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 단 한 방울의 피로 병원에서 하는 혈액검사를 대체할 수 있다면? 얼핏 들어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그 일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이 있다. 테라노스를 설립한 엘리자베스 홈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배드 블러드>,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
 <배드 블러드>,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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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블러드>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 존 캐리루가 테라노스와 관련된 수십 명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꼼꼼히 자료를 분석해, 실리콘밸리의 떠오르는 벤처기업으로 촉망받던 테라노스의 초대형 사기행각을 밝혀낸 책이다. 46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몰입감이 상당히 좋아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내려놓기가 힘들다.

이 책의 저자 존 캐리루는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월스트리스저널'의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다. 2015년 말 그는 엘리자베스 홈즈가 창업한 최첨단 스타트업 기업 '테라노스'에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언론과 미국의 많은 저명인사들은 하나같이 테라노스와 젊은 CEO를 극찬하기 바빴지만, 캐리루는 갖은 방해 공작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취재한 끝에 테라노스의 사기극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과로 캐리루는 금융 보도 부문 '조지 폴크상'을, 탁원한 기업 및 금융 보도 부문에서 '제라드 롭 최고 보도상'을 받았으며, 기업 탐사보도 부문에서는 '바를레트&스틸 실버상'을 수상했다.
 
엘리자베스 앤 홈즈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야망을 어린 시절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이미 일곱 살에 타임머신을 디자인했고, 상세한 공학 기술 도면으로 수첩을 가득 채웠다.

아홉 살에서 열 살쯤 됐을 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친척 한 명이 엘리자베스에게 "크면 뭐가 되고 싶니?"라며 어린아이라면 한 번은 들을 법한 질문을 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나는 억만장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20쪽)

어려서부터 성공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스탠퍼드대학교에 대통령 장학생 자격으로 입학해 화학을 전공한다. 그는 박사학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찌감치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에 성공해 돈을 버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스탠퍼드 대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의 지인들에게 투자를 받아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제2의 스티브 잡스'가 직원들에게 벌인 만행

엘리자베스는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복잡한 검사에 회의를 느꼈다. 피 한 방울로 여러 질병을 진단하고 질병의 추이를 예측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피 한 방울이었다. 바늘 공포증이 있는 엘리자베스에게는 최소한의 고통으로 딱 한 방울의 피로 혈액검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혈액검사기도 초소형이길 원했다. 이런 생각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테라노스의 혈액 진단 시스템을 "보건계의 아이팟"이라고 즐겨 부를 정도로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신봉자였다.
 
엘리자베스는 환자의 집에 카트리지와 판독기를 배치하여 환자가 정기적으로 혈액을 검사받을 수 있도록 계획했다. 판독기의 통신용 안테나는 진단 결과를 중앙 서버를 통해 환자 주치의의 컴퓨터로 보낸다. 그렇게 하면 환자가 채혈 센터에 방문하여 혈액 검사를 받거나 다음 병원 방문을 기다릴 필요 없이, 의사가 환자의 처방전을 신속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될 터였다. (32쪽)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생각과는 달리, 피 한 방울로 혈액검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혈액이 필요한데, 피 한 방울로 기계를 작동시키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용액을 희석해야 하고, 혈액이 희석되는 과정에서 혈액이 가진 정보를 대부분 잃게 되어 올바른 결과를 도출할 수가 없었다.

기계의 크기도 문제였다. 현재의 기술로는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크기로,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끝까지 피 한 방울과 기계의 소형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사람을 사로잡는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고, 무엇보다 설득의 귀재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투자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직원을 대하는 태도와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유능한 직원들을 고용해 놓고는 그들의 의견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부서 간의 소통을 금지했고, 회사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비밀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직원을 회사의 부속품처럼 대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은 가차 없이 자르고 새로운 직원을 뽑았다. 직원들은 퇴사할 때에도 기업 기밀유지에 대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고, 회사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일절 발설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직원들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을 원했으며 지독하게 직원들을 감시했다.
 
엘리자베스의 행정 비서들은 직원들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친구 신청을 하고, 그들이 게시한 글을 열람 후 엘리자베스에게 보고했다. 비서 중 한 명은 직원들이 정확히 몇 시간씩 근무하는지 엘리자베스가 알 수 있도록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여 보고했다.

심지어 직원들이 더 오래 근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엘리자베스는 매일 저녁 식사를 주문해서 제공했는데, 보통 저녁 8시나 8시 30분이 되어서야 회사에 배달됐다. 따라서 직원들은 일러도 밤 10시 정도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55쪽)

이 회사에도 존재했던 '비선 실세'

하지만 그렇게 고집 세고 완강한 엘리자베스도 단 한 사람의 말은 귀담아들었는데, 바로 그의 연인이자, 나중에 테라노스의 경영 부위원장을 맡게 되는 서니라는 인물이었다. 서니는 말하자면 테라노스의 비선 실세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해 전 우리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인물들이 떠오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한마디로 말해 테라노스는 모든 부패한 조직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을 두루 갖춘 셈이었다.
 
경영 부위원장이라는 서니의 직함은 아주 높아 보일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모호했다. 그의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서니는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회사의 모든 면에 관여하고 끼어들었다.

서니는 좋지 않은 의미로 자연의 힘과 같았다. 신장이 165센티미터인 그는 엄청나게 공격적인 태도와 노골적인 경영 스타일로 자신의 작은 체형을 보완했다. 그의 짙은 눈썹과 아몬드 모양의 눈, 양쪽 끝이 처진 입술과 각진 턱으로 인해 매우 위협적인 인상을 풍겼다. 서니는 거만했고 직원들에게 모욕적이었으며, 윽박지르고 질책했다. (107쪽)

테라노스의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업 운영방식과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사기행각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고 당한 직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테라노스의 유별난 기밀 유지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회사들이 직원에게 기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하라고 요청하지만, 테라노스는 차원이 달랐다. 끈질긴 감시는 물론 온갖 치졸한 법적 조치와 협박까지 일삼았다.

그렇지만 결국 상상을 초월한 액수의 소송 협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저자 존 캐리루는 테라노스에 대한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태라노스의 온갖 사기행각을 낱낱이 밝혀낼 수 있었다.

책에서 기자가 사건을 하나씩 밝혀내는 부분은 그동안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통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통쾌함 이면에는 부러움도 있었다. 한 언론사 내에서도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어떤 한 사안에 대해서 얼마든지 반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기자를 회사 차원에서 법적으로 보호해주고 지지해주는 모습이 부러움과 동시에 씁쓸했다. 굳이 내가 느낀 씁쓸함의 정체를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언론의 현실을 생각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갔지만, 읽고 나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다. 언론의 역할과 올바른 기업문화에 대해서, 기업의 기밀유지는 어디까지 보호해줘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최근 문제가 된 '인보사 사태'를 비롯해 정부의 '바이오헬스 산업 혁신 전략'까지. 그런 의미에서 <배드 블러드>는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드 블러드>가 곧 영화로도 제작될 계획이라고 한다. 궁금해서 읽고는 싶지만 책이 두꺼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영화를 기대해 보면 어떨까. 제니퍼 로렌스가 엘리자베스 홈즈를 연기한다고 하니, 책을 읽은 나도 영화가 몹시 기대된다.

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존 캐리루 (지은이), 박아린 (옮긴이), 와이즈베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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