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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한일관계를 '사상 최악'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다. 28일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담이 열리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의 정상회담 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오는 10월 자위대 관함식에도 한국 해군이 초청되지 않을 거라고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한일관계가 사상 최악이라는 주장이 진짜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현대 한일관계의 전환점은 1965년 국교 정상화다. 1965년까지는 국교가 단절돼 있었을 뿐 아니라 독도 영유권이나 대마도 문제, 식민지배 청산 문제 등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에서 한일관계가 최악이었던 것은 1965년 이전이다.

그렇다면 1965년 이후만 놓고 봤을 때는 지금의 한일관계가 최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1965년 이후를 기준으로 할 때, 최악의 시기는 박정희 정부 때 있었다.

최악의 시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한일협정 조인식.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한일협정 조인식.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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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국교 정상화를 강행했다. 그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가장 많이 애쓴 정권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일본과 갈등을 빚었다. 국교 중단이 암시되는 상황까지 간 적이 있었을 정도다.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국가기관이 도쿄에서 불법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한 이 사건은 당연히 일본 정부의 분노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1년 뒤 8월 15일 또 다른 대형 사건이 터졌다. 1974년 광복절 행사장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사건이다.

사건 직전, 문세광은 일본 여권으로 입국했다. 그가 사용한 총은 일본 경찰한테서 훔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 공범의 조력을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북한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일본이 방조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의 태도도 박 정권을 더욱 더 화나게 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은 '북한이 배후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일본인 공범에 대한 증거는 없다'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에 분개해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리려고 단독으로 벌인 일이다'는 등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박 정권이 제기하는 북한 배후설과 일본 방조설을 반박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문세광을 독재자에 맞서 싸운 이로 부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오른 박정희는 8월 30일 우시로쿠 도라오 일본대사를 불러 "이번과 같은 사건이 겹치면 신념만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며 국교 중단 가능성을 시사했다. 196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다나카 내각은 한술 더 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혹은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까지 건드렸다.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한국' 원칙,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 원칙까지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1974년 9월 6일 치 <동아일보>에 따르면, 마쓰나가 노부오 외무성 조약국장은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출석해 "한국과 한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뒤이어 기무라 도시오 외무대신마저 "나도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이다"라며 동조했다. 일본 외교의 수장이 한국 정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도 남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하나의 한국’ 원칙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보도하는 1974년 9월 6일자 <동아일보>.
 ‘하나의 한국’ 원칙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보도하는 1974년 9월 6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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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74년의 한일 양국은 국교 중단을 암시하거나 상대의 정체성을 자극하는 등의 방법으로 상호 간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1965년 이후로 사상 최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때의 한일관계는 극단을 달렸다.

깜짝 놀란 미국이 급하게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면, 한일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튀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박정희가 처음에는 미국에 고분고분하다가 나중에는 미국을 거역하려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중재가 없었을 경우에 박정희가 한일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미국의 압력을 받은 다나카 총리는 9월 19일 시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파견해 박정희한테 가서 사과하도록 했다. 일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그냥 뒀다가는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그로 인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사실, 관계 악화의 책임이 일본한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일본한테 사과를 권유한 것은 한국 정부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한일관계를 파탄낼 가능성을 미국이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상황이 그 정도로까지 치달았으니, 이때의 한일관계가 사상 최악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버르장머리' 운운한 김영삼, 불쾌감 드러낸 일본

1974년 사례 외에도 한일관계가 나빴던 적은 많다. 일례로, 위안부 문제 등을 비롯한 한일 과거사가 한층 더 부각된 1990년대 전반, 한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꽤 수위 높은 경고성 발언을 하는 일이 있었다. 주인공은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역사 문제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던 상황에서, 김영삼은 장쩌민(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상회담 뒤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 일본은 정부 대변인인 노사카 고켄 관방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버르장머리란 말은) 거의 공식으로 사용되지 않는 용어로 알고 있다"며 "보다 절도 있는 발언을 해주기 바란다"는 말로 항의를 표시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 버르장머리’ 발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보도하는 1995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 버르장머리’ 발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보도하는 1995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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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때는 훨씬 더 강도 높은 사건이 있었다. 독도 영유권이나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냉랭하던 2012년 8월 10일, 그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뒤이어 광복절 전날인 14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현직 대통령 최초로 일왕(천황)의 사죄를 요구했다. 일본열도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총리도 아니고 일왕을 상대로 사죄를 요구한 것에 대해 일본인들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이처럼 지금보다 더, 혹은 지금처럼 한일관계가 나빴던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국교가 체결된 1965년 이후를 놓고 볼 때, 박정희 때인 1974년에는 지금보다 확실히 험악했다. 김영삼이나 이명박 때는 지금보다 더하거나, 못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한일관계가 사상 최악이다'라는 말은 현재 얼어붙은 한일 관계의 심각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과거에 관계가 더 안 좋았던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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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101.9 (목)11시25분경.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